<사랑 시 모음> 최승자의 '너에게' 외
<사랑 시 모음> 최승자의 '너에게' 외
+== 너에게 ==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최승자·시인, 1952-)
+== 사랑의 나라 ==
하루를 살아갈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천만 번 사랑의 맹세 주고받을
약속도 없이
남자와 여자
함께 손잡고 걸어간다
아득히 꽃눈 내리는 눈물길
길 없는 길의 나라
그리움뿐인 먼 나라
(이병금·시인, 서울 출생)
+== 저기, 저 흙을 보아요 ==
저기, 저 흙을 보아요
모든 것들이 다 제 안에 있어도
한꺼번에 드러내어 다 말하지 않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송이 하나 서 있는 만큼만
그 하늘만큼만
제 안의 큰사랑 보여줍니다
우리가 서 있는 땅
이 땅의 어디를 보아도
저마다 그만그만한 사랑의 무게로
노래부르고 있습니다
돌아가 다시 흙이 되는 순간까지
그 노래 그치지 않습니다
진실로 나 또한 지금 그대를 향하여
한 줌 흙이 되고 있습니다
그대가 내 정원의 아름다운 꽃으로 있을 때
나는 그대 연한 뿌리 받치고 누운
한 줌 흙이고 싶습니다
(김시천·시인, 1956-)
+==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
바다 그리워, 깊은 바다 그리워
남한강은 남에서 흐르고
북한강은 북에서 흐르다가
흐르다가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아아,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한강 되어 흐르는데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설레는 두물머리 깊은 들에서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바다 그리워, 푸른 바다 그리워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이현주·목사 시인, 1944-)
+== 사랑의 연기 ==
처음 사랑 앞엔 수줍어
어눌한 연기로
무대에 서서 엉거주춤 망설였지만
사랑하면 할수록
시간 가면 갈수록
사랑이 뭔 줄 알고부터는
담대히 연기하는
사랑무대 주인공 되어 갑니다
불붙는 사랑 앞에
온몸으로 연기하다
맡겨진 열애에 불태우고
무대를 내려설 땐
후회하지 않는 모습으로
영원히 남기 위해
오늘도 멋진 연기 위해
영혼을 불태우며
사랑하렵니다
(함영숙·시인)
+== 겨울 사랑 ==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박노해·시인, 1957-)
+== 지치지 않는 사랑 ==
그대가 원하는 만큼 그대를 사랑할 순 없겠지만
그대가 원하는 이상 그대를 사랑할 순 있습니다
그대가 노래를 불러달라고 할 때
항상 노래를 들려줄 순 없겠지만
그대가 외로울 때
갑자기 나타나 안아줄 수는 있습니다
그대가 나를 그리워할 때
항상 그대 곁에 달려갈 순 없겠지만
그대가 힘들 때엔
만사를 제치고 달려갈 수는 있습니다
그대가 나에게 짜증을 부릴 때
항상 다 받아줄 만큼 완벽할 순 없겠지만
그대가 방황할 때
살며시 다가가 함께 있음을 선물할 수는 있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만큼 많은 사랑을 줄 순 없겠지만
그대를 위한 나의 사랑은 지치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그대의 마음에 흡족할 순 없겠지만
나는 그대에게 아무런 불평도 없습니다
설령 그대가 나를 떠난다고 말할지라도
나는 노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항상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묵연·스님)
+== 사랑은 밥 ==
배고프면 현기증이 난다
쓰러질 것 같다
밥을 먹으면 기운이 난다
금방 새 힘이 솟는다.
외롭고 쓸쓸하면 눈물난다
죽고 싶기까지 하다
사랑이 찾아오면 신난다
살아 있는 게 고맙고 재밌다.
삶에서
사랑은 밥과 같은 것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밥이다.
(정연복·시인, 1957-)
+== 사랑이 올 때 ==
사랑이 올 때는
내 가슴
꽃잎처럼 흔들린다
가볍게 울리는
심장의 진동이
우주의 한 끝에 닿고
사랑이 올 때는
눈을 감아도
사랑이 보인다
그 사랑
우주보다 멀다해도
꽃잎처럼
기뻐하는 사랑
나를 흔들고 있다
(강선영·시인, 충남 서천 출생)
+== 꽃님 ==
꽃님
환하게 길 밝혀 오시더니
조용히 떠나십니다
그냥 가시는가 하였더니
머물던 자리마다
열매 맺어 놓으시고
다시 오마 나직이 이르십니다
내 사랑도 그대에게서
그렇게 자라고 있는지요
오늘 꽃님 가신 그 길
서둘러 따라가 봅니다
(김시천·시인, 1956-)
+== 며칠 후 며칠 후 ==
별을 사랑하며 살아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달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면
당신을 볼 수 있을까
해를 기다리며 살아가면
당신을 껴안을 수 있을까
(권태원·시인, 1950-)
+== 나에게 있어서 ==
나에게 있어서
시는 고통스러운 숙명을 사는 기쁨이며
사랑은 고통스러운 목숨을 이어 주는
어쩔 수 없는 숨은 기쁨의 형벌이옵니다
그렇게 나에게 있어서는
꿈은 살아야 하는 먼 고독한 순례의 길이오며
사랑은 고통스러운 그 순례의 길을 이어주는
구걸스러운 따뜻한 숨은 동냥이옵니다
(조병화·시인, 1921-2003)
+== 사랑스런 도둑 ==
감쪽같이
내 깊은 곳에
작은 꽃씨 하나 던져놓고
그대는 멀어져 갔습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해와 달이 뒤바뀜에 따라
어느새 그 꽃씨 톡
볼가진 심줄처럼 이리저리
가지를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이 있어야 만이
함께 있어야 만이
사랑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봅니다
더 멀어질수록
더 보이지 않을수록
한없이 가깝게 느껴진다는 걸
그리하여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도둑질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김현태·시인, 1972-)
+== 마음속의 사람을 보내며 ==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젊은 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 아픈 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냅니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잘 가라 사랑아, 내 마음속의 그대를 놓아 보냅니다.
불혹, 마음에 빈자리 하나 만들어 놓고서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나도 알게 되었나봅니다.
(정일근·시인, 1958-)
+== 꽃보다 더 예쁜 꽃은 ==
꽃보다 더 예쁜 꽃은
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당신의 순수한 눈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두서없이 늘어놓는 내 푸념을
끝까지 들어주는 당신의 예쁜 귀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홀로 외로워하는 내게 다가와
노래를 불러주는 당신의 고운 목소리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떨어진 내 꿈들을 희망으로
보듬어주는 당신의 깨끗한 손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비바람에 쓰러질까 늘 바람막아 주는
당신의 다정한 발걸음입니다
꽃보다 더 예쁜 꽃은
지친 내 몸을 조용히 일으켜 감싸주는
당신의 포근한 가슴입니다
꽃은 순간적 향기로 유혹하지만
꽃보다 더 예쁜 사랑향기는
감동으로 못다 핀 영혼까지 눈물짓게 합니다
(작자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