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에젖어

김춘수(金春洙) 님 시 모음

채운 (彩雲)신윤정 2023. 5. 1. 15:16

📝꽃-김춘수(金春洙)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인물

김춘수(金春洙) 시인

출생 – 사망 : 1922. 11. 25. ~ 2004년

출생지 : 국내 경상남도 충무

데뷔 : 1948. 죽순 8집에 시 「온실」 등을 발표

1922년 11월 25일 경남 충무 태생.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를 거쳐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했으나 1942년 12월 퇴학 처분을 당했다

통영중‧마산고 교사, 마산대‧경북대‧영남대 교수 등으로 재직하였다

문예진흥원 고문,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거쳐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었다

1981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1958), 제7회 아시아자유문학상(1959), 경남문학상, 경북문화상, 예술원상, 대한민국문학상, 문화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柳致環)‧윤이상‧심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예술운동을 전개했고, 1946년부터 조향(趙鄕)‧김수돈(金洙敦) 등과 동인지 『노만파』를 발간했다

1948년 대구에서 발행되던 『죽순』 8집에 시 「온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 1956년 유치환(柳致環)‧송욱(宋稶)‧고석규(高錫珪) 등과 시동인지 『시연구』를 발행하기도 했다

시집

『늪』(1950), 『기』(1951), 『인인』(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 기타』(1969), 『처용』(1974), 『김춘수시선』(1976), 『꽃의 소묘』(1977), 『남천』(1977), 『비에 젖은 달』(1980), 『처용 이후』(1982), 『처용 단장』(1991), 『서서 잠드는 숲』(1993), 『들림, 도스토옙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등이 있다.

시론집

『시의 이해』(1972), 『의미와 무의미』(1976), 『시의 표정』(1979) 등과 수상집 『빛 속의 그늘』(1976), 『오지 않는 저녁』(1979),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1980) 등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986년 『김춘수 전집』(1권 시, 2권 시론)을 간행하였다

[옮긴 글]​

존재의 위치와 자세를 탐색하기 시작한 김춘수의 세 번째 시집 〈기〉

김춘수님 시모음

1954년에 내놓은 시선집 〈제일시집〉

시(詩) 1-김춘수

 

 

동체(胴體)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地球)를 밟고 갈

허물어진 세계(世界)의 안쪽에서 우는

가을 벌레를 말하라.

아니

바다의 순결(純潔)했던 부분을 말하고

베고니아 꽃잎에 듣는

아침 햇살을 말하라.

아니

그을음과 굴뚝을 말하고

겨울습기(濕氣)와

한강변(漢江邊)의 두더지를 말하라.

동체(胴體)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地球)를 밟고 갈 때

 

타령조,기타(1969)

가을 저녁의 시-김춘수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갈대 섰는 風景-김춘수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거리에 비 내리듯-김춘수

거리에 비 내리듯

비 개인 다음의

하늘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꼬꼬리새 무릎을 보라. 발톱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네 입술

네 목젖의 얼룩을 보라.

면경(面鏡)알에 비치는

산과 내

비 개인 다음의 봄바다는

언제나 어디로 떠나고 있다.

계단-김춘수

거기 중간쯤 어디서

귀뚜라미가 실솔이 되는 것을 보았다

부르르 수염이 떨고 있었다

그때가 물론 가을이다

끄트머리 계단 하나가 하늘에 가 있었다

꽃-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나의 하나님-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너와 나-김춘수

맺을 수 없는 너였기에

잊을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너였기에

괴로운 건 나였다.

그리운 건 너

괴로운 건 나.

서로 만나 사귀고 서로 헤어짐이

모든 사람의 일생이려니.

네가 가던 그 날은-김춘수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 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노새를 타고-김춘수

기러기는 울지마,

기러기는 날면서 끼루룩 끼루룩 울지 마,

바람은 죽어서 마을을 하나 넘고 둘 넘어

가지 마,멀리 멀리 가지 마,

왜 이미 옛날에 그런 말을 했을까.

도요새는 울지 마,

달맞이꽃은 여름밤에만 피지 마,

언뜻언뜻 살아나는 풀무의 불꽃,

풀무의 파란 불꽃.

능금-김춘수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며는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명일동 천사의 시-김춘수

앵초꽃 핀 봄날 아침 홀연

어디론가 가버렸다.

비쭈기나무가 그늘을 치는

돌벤치 위

그가 놓고 간 두 쪽의 희디흰 날개를 본다.

가고나서

더욱 가까이 다가 온다.

길을 가면 저만치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들리고

날개도 없이 얼굴 지운.

물망초-김춘수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도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하늘의 별일까요.

꽃피고 바람 잔 우리들의 그 날

날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 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부재-김춘수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 없이 져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靑石(청석)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 일 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분수-김춘수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사모곡-김춘수

주신 사랑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주신 말씀이 적은 듯 싶어도 나 삽니다.

오밤중에 전기불 꺼지듯 나 삽니다.

하느님

나는 꼭 하나만 가질래요.

세상 것 모두 눈 감을래요.

하느님

나는 꼭 그 사람만 가질래요.

산엔 돌치는 징소리 내가슴에 너 부르는 징소리.

솔밭이 여긴데 솔향기에 젖는데

솔밭도 나도 다 두고 넌 어디쯤서 길 잃었니.

나도 바람이더면 아무대나 갈껄

그대 가는 곳 어디라도 갈껄

내가 물이라면 아무대나 스밀껄

그대 몸 속 마알간 피에라도 스밀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서풍부(西風賦)-김춘수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온통 풀 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순명(順命)-김춘수

처서 지나고 땅에서 서늘한 기운이 돌게 되면 고목나무 줄기나

바위의 검붉은 살갗 같은 데에 하늘하늘 허물을 벗어놓고

매미는 어디론가 가 버린다.

가을이 되어 수세미가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런 수세미의 허리에 잠자리가 한 마리 붙어 있다.

가서 기척을 해봐도 대꾸가 없다. 멀거니 눈을 뜬 채로다.

날개 한 짝이 사그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내 손이 그의 몸에 닿자 긴 꼬리의 중간쯤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린다.

인동(忍冬) 잎-김춘수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정-김춘수

외로운 밤이면

자꾸만 별을 보았지.

더 외로운 밤이면

찬란한 유성이 되고 싶었지.

그토록 그리움에

곱게곱게 불타오르다간

그대 심장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별빛처럼

포옥 묻히고 싶었지.

쥐 오줌 풀-김춘수

하느님,

나보다 먼저 가신 하느님,

오늘 해질녘

다시 한 번 눈 떴다 눈 감는

하느님,

저만치 신발 두짝 가지런히 벗어놓고

어쩌노 멱감은 까치처럼

맨발로 울고 가신

하느님, 그

하느님

처용-김춘수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흔적-김춘수

망석이 어디 갔나

망석이 없으니 마당이 없다

마당이 없으니 삽사리가 없다

삽사리가 없으니

삽사리가 짖어대면

달이 없다

망석이 어디 갔나

꽃을 위한 서시-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처용단장(處容斷章)-김춘수

삼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 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옮긴 글] 인터넷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