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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

홍랑(洪娘)-민수현 (트로트 버전)




홍랑(洪娘) -트로트버전


최홍호  작사

이호섭  작곡

민수현  노래


쓰라린 이별에 우는 맘 버들가지 꺾어 보내노라
진한 사랑 진한 정을 어이 두고 떠나갔나요
백 년이 흘러가도 천년이 가도 나는 그대 여자랍니다
객창에 피는 묏버들 보면 날인가 홍랑인가 여기소서
 

소리 없이 울면서 지샌(새운) 밤 방울방울 띄워 보내노라
진한 사랑 진한 정을 어이 두고 떠나갔나요
백 년이 흘러가도 천년이 가도 나는 그대 여자랍니다
객창에 우는 두견새 보면 날인가 홍랑인가 여기소서

객창에 우는 두견새 보면 날인가 홍랑인가 여기소서

 




  민수현 / 홍랑(洪娘)  디스코 버전   



노래방 MR





 


홍랑(洪娘)이란 곡은 황진이(黃眞伊), 매창(梅窓)과 함께 조선 3대 시인으로
사랑하는 임에 대한 절개로 양반신분에 까지 오른 전설적 여인,
홍랑이란 실제 인물을 배경으로 한 노래이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 (擇折楊柳寄千里)
   자시는 창밧괴  심거두고 보쇼셔 (人爲試向庭前種)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나린가도 녀기쇼셔 (須知一夜生新葉)"


출처 : 가황 남인수 팬클럽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과 홍랑(洪娘)의 순애보(純愛譜)



" 조선시대의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가 떠오를 것이외다

그러나 정말 '조선시대의 최고의 기생'으로 감히 홍랑(洪娘)을 꼽겠나이다."


두 기생의 공통점은 예기(藝妓) : 노래 춤 그림 글씨 시문 따위의

예능을 익혀 손님을 접대하는 기생이자 재색을 고루 갖춘 여류 시인이다.

       

이들 두 여인의 차이점은 황진이는 명문대가 황진사댁 첩의 딸로

동네 머슴이 황진이를 짝사랑하다가 그만 상사병으로 죽어

그의 상여가 황진이 집 앞을 지나가다 멈춰 어느 점쟁이의 부탁(?)으로

황진이의 속곳을 상여에 덮어 주어 그 상여가 움직이게 하였다.


그러나 홍랑은 황진이와 전혀 출신이 다르다 홍랑은 비록 관기였지만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명성이 높았던 풍류 문장가 고죽 최경창에게만

일생동안 그의 모든 것을 바친 여인이었다


허허~~!!! (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로군요...!"

(충신불사이군 열녀불경이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사육신 성삼문을 '충신불사이군'이라면 홍랑은 '열녀불경이부'로 비유될 수 있다

'열녀'는 물론 조강지처 적실인 여인에게만 해당되긴 하지만

'홍랑과 최경창의 애틋하고 감동적이며 고귀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선 선조 때 홍원(洪原)땅의 예기(藝妓)이자, 재색을 겸비한 여류시인이기도

하였던 홍랑(洪娘)은 이름을 애절(愛節)이라 하였으며,

 

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사대부 가문의 족보에 오르고, 선산에 그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을 보면

홍랑이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인 홍랑은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였다.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의 소양과

재질은 양반 사대부나 시인 가객들에 뒤지지 않았다.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많은 남자들의 유혹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신만의정절을 받쳐 사랑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고 있었다.

 

   이런 홍랑의 아름다운 재색과 지혜는 마침내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을

만나면서 세세생생에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을 엮어가게 된다.

       

전남영암출신인 최경창은 탁월한 문장가인데다가
악기를 다루는 재주와 활 솜씨 또한 뛰어났던 인물인데,
1568년 과거에 급제하고, 5년 후인 1573년(선조 6년)에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평사
(北道評事)부임하게 된다.

     

변방에 위치한 경성은 예로부터 국방의 요지로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최경창은 처자를 남겨두고

홀로 부임하여 오지인 경성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은
경성 땅의 기생이던 홍랑의 미모와 재능에 매료된다.
이들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홀로 고적한 생활을 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결정적인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결국 홍랑은 군사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최경창과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1574년(선조 7년),
두 사람의 사랑 앞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온다.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고, 당시 관아에 속해 있는 관기는

해당 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속절없는 이별 앞에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경창이 서울로 떠나는 날,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가며 최경창을 배웅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사모의 정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옆에 피어있는 산 버들이었다.

울음을 삼키면서 홍랑은 그 버들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주며 구슬프게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 묏버들 가려꺾어 ”..이다.

 


       

[주] 한시는 홍랑의 시를 최경창이 한역(漢譯)하여
번방곡
(翻方曲)이라고 이름 붙인 작품임. 

(折楊柳寄與千里) (절양류기여천리) 묏버들 가려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人爲試向庭前種) (인위시향정전종)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須知一夜生新葉) (기지일야생신엽)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돋아나면

(憔悴愁眉是妾身) (초췌수미시첩신)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에게 바치는 순정은 잎이 시들었다가도


심기만 하면 다시 싹을 틔우는 묏버들처럼 항상 그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 이 연정가(戀情歌)처럼, 최경창이 떠난 뒤 홍랑은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함관령에서 홍랑과 이별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이듬해,

병으로 자리에 누워 봄부터 겨울까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병석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은 홍랑은 서둘러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러 병석에서

신음하는 최경창을 만난다.

 

  

   

홍낭은 수척해진 최경창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1년 반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쌓였던 그리움을 눈물로 녹여내려는 듯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병 수발을 들었다.

홍랑의 정성으로 최경창의 건강은 빠르게 회복되어 갔으나,

호사다마(好事多魔)...좋은일에는 방해(妨害)가 되는 일이 많음)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홍랑이 최경창을 간병하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양계의 금(兩界禁) : 함경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을

어겼다는 이유와, 마침 명종 왕비 인순왕후의 국상이 있었던 직후라

정서적인 분위기까지 겹쳐서 파직을 당하게 되었고, 홍랑은 서울에서

추방되어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두 연인의 애틋한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리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서울을 떠났다.

   

​최경창은 떠나는 홍낭을 이별하면서 절절히 가슴을 오려내는 심정을

담아 송별(送別)이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相看脈脈贈幽蘭) (상간맥맥증유란)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

(此去天涯幾日還) (차거천애기일환)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리

(莫唱咸關舊時曲) (막창함관구시곡)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말라

(至今雲雨暗靑山) (지금운우암청산) 지금도 궂은 비구름에 첩첩 청산이 어둡구나.


   옛날, 함관령에서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보내며
자신처럼 여겨 달라던 홍랑의 시에 최경창은 난초 한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화답하며 자신의 애끓는 심정을 읊조렸다.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선조 9년)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의부음은 그녀를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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