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
금수현 곡
김말봉 시
송광선 Sop.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나가 구름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양 나래쉬고 보더라
창공을 차고나가 구름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양 나래쉬고 보더라
한 번 구르니 나무끝에 아련하고
두번을 거듭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 ~ ?) - 단오풍정(端午風情)국보 135호
그네금수현 곡김말봉 시송광선 Sop.
한 번 구르니 나무끝에 아련하고
두번을 거듭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나가 구름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양 나래쉬고 보더라 한번 구르니 나무끝에 아련하고 두번을 거듭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김 말봉 선생님과 작곡가 금 수현씨가 장모와 사위의 관계 입니다. 김 말봉 선생님은 장편소설 "찔레꽃"을 쓰신 분인데 196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금 수현씨는 지휘자로 지금도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금 난새]씨의 아버님이 되십니다. 김말봉(金末峰)에 대하여 1901∼1962. 현대 여류소설가. 본명은 말봉(末鳳)이다. 부산출생.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3년 수료한 뒤 서울에 와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하였다. 그뒤 황해도 재령(載寧)의 명신학교(明信學校)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 경도(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 전상범(全尙範)과 결혼하였다. 이 무렵까지 문학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기자로서 쓴 탐방기나 수필이 주위의 호평을 받자, 1932년 보옥(步玉)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망명녀 亡命女〉라는 단편소설로 응모,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어서 〈고행 苦行〉·〈편지〉 등을 발표했고,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을,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함으로써, 일약 통속소설가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전상범과 사별한 뒤, 이종하(李鍾河)와 재혼, 부산에 살면서 광복 때까지 작품활동을 중단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여 <카인의 시장〉과 〈화려한 지옥〉 등을 발표하는 한편, 사회운동 즉 공창폐지운동(公娼廢止運動)과 박애원(博愛院)경영 등의 일을 하였다. 하와이 시찰여행을 하고 온 뒤, 6·25남침 때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문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 예술가대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여, 〈태양의 권속〉·〈파도에 부치는 노래〉·〈새를 보라〉· 〈바람의 향연〉·〈푸른 날개〉·〈옥합을 열고〉· 〈찬란한 독배(毒盃)〉·〈생명〉·〈길〉·〈사슴〉· 〈장미의 고향〉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처음부터 흥미 중심의 통속소설, 즉 애욕의 갈등 속에서도 건전하고 정의가 이기는 모랄을 지니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신조를 가진 소설가였다. 대체적으로 순수문학에만 집착하는 문단을 향하여 “순수귀신을 버리라.”고까지 하였으나, 그러한 주장은 아직도 일반화되고 있지 않다. [금수현]에 대하여 [국민가곡 「그네」의 작곡자 낙초(洛初) 금수현(金守賢·1919~1992). 그는 김해군 대저면에서 정미업과 땅콩 재배업을 한 토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모는 그를 낳자 산고로 사망하고, 사흘이 넘도록 그도 울음이 없어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기사회생했다고 전한다. 그는 보통학교 때부터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 선생들이 개별지도를 해줄 정도였다. 그는 부산 제2상업학교(부산상고)와, 수많은 원로 음악인을 배출한 일본 동양음악학교(동경음악대학)를 나왔다. 그와 함께 초기 부산음악의 황무지를 개간한 선구자의 한 사람인 김학성과 고태국이 1년 후배이다. 1941년에 귀국해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가진 그는 이듬해 동래고녀(동래여고)의 음악교사가 된다. 그는 자신이 각색 작곡 연출한 음악극을 학생들에게 여러 차례 공연하게 해, 학생들과 학부모들 사이에 많은 인기를 모았다. 그는 1943년 동래교회 피아노 담당 전혜금과 결혼한다. 장모가 당시 부산에서 문명을 떨치고 있던 소설가 김말봉(金末峰)이었다. 작곡가 사위를 총애한 김말봉은 어느 날 자작 시(詩)를 전하고, 장모의 사랑에 감격한 금수현은 심혈을 기울여 곡을 붙인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그네」다. 광복이 되자 동래고 여교장 김하덕이 경남여고로 옮기면서 약관 27세의 그를 교감으로 전격 발탁한다. 그런데 선생 18명의 절반이 성이 김씨라『김선생!』하고 누가 부르면 모두가 고개를 돌리는 판이었다. 그때까지 김수현으로 불렸던 금수현은 자기의 성을 한글로 금씨로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는 당장 교직원 회의에서 자기의 성을 금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고, 학생들 앞에서도 그렇게 선언했다. 그러나 김씨에 익숙해진 선생들이나 학생들은 실수하기가 예사였다. 금수현은 자신의 성을 김으로 부르면 선생이건 학생이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날 교무실에 불려온 여학생들도 저희들끼리 『저기 김수현 선생님 가신다!』라고 재잘거리다 여지없이 들킨 것이다. 금수현은 광복 이후 우리말 가사로 된 노래의 필요를 느끼고 많은 실용가곡과 오페레타 등을 작곡하고 「노래하자 운동」을 창도한다. 그는 도립극장 지배인 경남여중 교장 통영고등학교 교장 등을 거쳐 1956년 문교부 편수관이 되면서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긴다. 열렬한 한글전용 지지자로 한글 이름의 선구 역할을 한 그는 음악용어 한글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한때 국제신문 고문을 지냈다. 그는 경남여고 재직 때 음악주보를 발간했으며, 1970년 「월간음악」을 창간, 타계 직전까지 발행해 음악저널리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다. 그는 작곡 음악운동 음악전문지 음악행정 등 실로 다양한분야에 걸쳐 폭넓고 뚜렷한 공적을 남겨 놓았다. 그는 비록 부산을 떠난 지 오래지만, 그가 추천하여 역시 부산에서 음악활동의 뿌리를 키운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과 더불어, 영원한 부산 음악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새 봄의 아지랑이에 묻혀 우리의 귓가를 울리는 「그네」의 다정한 멜로디처럼.]노래비 작사 장모 김말봉
작곡 사위 금수현 조각 외손자 금누리 합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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