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는 잘 알려진 고갯길이다.
새재에서 먼 한반도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
진도에서 부르는 〈진도아리랑〉에도 사설의 첫 대목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도 관련이 깊은 곳이다.
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로
조선시대 영남과 한양을 잇는 제1대로였던 영남대로에 위치하고 있다.
‘새재’라는 이름의 유래는 매우 다양하다.
고갯길이 워낙 높아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고갯길 주변에 새(억새)가 많아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고갯길을 의미하는 ‘새(사이)재’에서 연유했다는 주장이 있고,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만든 고개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새재의 어원에는 많은 유래가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지리학자들이 말하는 ‘새로 낸 고갯길’이다.
문경새재는 영남과 기호 지방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옛길이었다.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넘나들던 길로,
문경(聞慶)이라는 이름과 옛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경사로운 소식,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의미도 과거길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연유로 문경새재는 급제를 바라는 많은 선비들이 좋아했던 고갯길이었다.
그래서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했다.
《택리지》에도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이곳을 왕래하였음을 헤아릴 수 있다.
새재는 과거를 보기 위해 선비들이 즐겨 넘던 길로 옛 모습이 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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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는 태종 13년(1413)에 개통되었다.
새재가 열리기 전까지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계립령의 하늘재가 주요 교통로였다.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새재는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는 세 개의 관문을 따라 옛날 선비들이 다니던 길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약 10km에 이르는 구간이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새재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초점(草岾),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충청도의 한강 유역과 경상도의 낙동강 유역을 가르는 주된 도로였다.
새재는 임진왜란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영남내륙을 지나
올라오는 왜군과 맞선 신립 장군은 새재를 버리고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지만
크게 패하고 탄금대에서 투신했다. 전후 조정에서는 새재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이곳에 전쟁 대비 시설이 없음을 한탄했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서애 유성룡은 관문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그 후 선조 30년(1597)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자 일자형의 성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령산성이 축조되었다.
새재길은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이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고갯길에 얽힌 설화와 민요가 매우 다양하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이후 설치된 세 개의 관문이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첫째 관문은 주흘관(主屹關)이다. 숙종 34년(1708)에 설치되었으며
세 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두 번째 관문은 조곡관(鳥谷關)으로 선조 27년(1594)에 신충원이 축성하였으며
중성(中城)이라고도 한다. 마지막 관문은 조령관(鳥嶺關)으로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18세기에 만든 조선의 각 도별 군현 지도로 문경새재 옛길이 세 개 관문을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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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가 시작하는 곳에 위치한 제1관문인 주흘관 주변의 전경이다. 성벽과 관문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배경의 산림이 아름답다. 문경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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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이화령 고갯길이 만들어지면서 문경새재는 폐도가 되었다. 그러나 새재에 설치된 관문과 더불어 새재 고갯길은 옛 모습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다. 새재길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와 임지를 떠나 새로 부임하는 신구 경상도 관찰사가 만나 관인을 주고받았다는 교귀정터가 남아 있다. 관문을 지나 오르는 옛길에는 아름다운 주변의 경치와 함께 산불을 막기 위해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서 있고 정자와 주막터, 성황당 등이 있어 다양한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음미할 수 있다.
오늘날 새재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조성 및 재현되어 있다. 제2관문에서 조곡계곡을 따라 4km 정도 올라가면 산허리에 돌무더기를 세로로 쌓은 뒤 그 위에 작고 넓적한 돌을 얹어 마치 장승처럼 만든 곳이 있는데 이를 꽃밭너덜이라고 한다. 또한 새재길 옆에는 용추라는 폭포가 위치하고 있다.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해지는 용추폭포는 사면과 바닥이 모두 돌로 되어 있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바위에는 용추(龍湫)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구지정이 숙종 25년(1699)에 쓰다(己卯具志禎書)”라고 각자되어 있다. 이 밖에도 옛날 7명의 선녀가 구름을 타고 와 목욕을 했다는 여궁폭포,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와 상인들이 한잔의 술로 여독을 풀고 정분을 나누었다던 주막도 위치하고 있다.
새재길에서는 주흘산과 조령산의 다양한 식생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 수림터널 등 매우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접할 수 있다. 그래서 문경시에서는 ‘옛길 걷기체험’, ‘과거길 재현’ 등의 다양한 행사를 매년 개최하여 현대인들이 조선시대 옛길 및 선비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제1관문 안쪽의 하천 건너에는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이 설치되어 있다. 사극을 촬영하기 위한 시설로 수십여 채의 전통한옥이 있고 관문의 풍경과 조화가 빼어나 많은 탐방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문경새재는 옛길의 모습을 잘 간직한 고갯길로서 옛날의 분위기를 느끼며 한번쯤 걸어볼 만하다. 그 옛날 이 길을 넘던 수많은 선조들의 감흥과 애환을 떠올리며 새재를 걷는 것은 매우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줄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새재를 넘으며 이렇게 읊고 있다.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嶺路崎山虛苦不窮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危橋側棧細相通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長風馬立松聲裏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盡日行人石氣中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幽澗結氷厓共白
눈 덮인 칡덩굴엔 마른 잎 붙어 있네
老藤經雪葉猶紅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到頭正出林界
서울 쪽 하늘엔 초승달이 걸렸네
西望京華月似弓
- 〈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冬日領內赴京 踰鳥嶺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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