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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시

 

물소리를 꿈꾸다   / 이정록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나는 그 소리를 숨차게 쟁이며
분꽃 씨처럼 늙어 갈 것이다
고치 속이 눈부신 하늘인 양
맘껏 날아 다니다 멍이 드는 날갯죽지
세찬 바람에 가지를 휘몰아
제 몸을 후려치는 그의 종아리에서
겨울을 나고 싶다. 얼음장 밑 송사리들
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
그때마다 결이 환해지는 버드나무
촬촬 물소리로 울 수 있다면
날개를 달아도 되나요? 슬몃 투정도 부리며
버드나무와 한 살림을 차리고 싶다
물오른 수컷이 되고 싶다








사랑     / 이정록


연초록 껍질에
촘촘 가시를 달고 있는
장미꽃을 한 아름 산다.

네가 나에게 꽃인 동안
내 몸에도 가시 돋는다.

한 다발이 된다는 것은
가시로 서로를 껴안는다는 것

꽃망울에게 싱긋
윙크를 하자
눈물 한 방울 떨어진다.

그래, 사랑의 가시라는 거
한낱 모가 난 껍질일 뿐

꽃잎이 진 자리와
가시가 떨어져 나간 자리, 모두
눈물 마른자리 동그랗다.

우리 사랑도, 분명
희고 둥근 방을 가질 것이다.




눈사람의 상처    / 이정록
                               
 
삽날에 잘린 눈사람을 어루만진다
삽질 속에 결을 만들어놓은 흙 부스러기
때문에, 삽날이 지나간 자리가 꽃등심처럼 곱다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
등을 찍혔는데도 무늬를 보여주는 눈사람








혈거시대    / 이정록                                                    
- 1993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1
어쩌다 집이 허물어지면
눈이 부신 듯 벌레들은
꿈틀 돌아눕는다
똥오줌은 어디에다 버릴까
집안 가득 꼴이 아닐텐데
입구 쪽으로 꼭꼭 다져 넣으며
알맞게 방을 넓혀간다
고추에는 고추벌레가
복숭아 여린 살 속에는 복숭아 벌레가
처음부터 자기 집이었으므로
대물림의 필연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으며
집 한 채씩 갖고 산다
벌레들의 방은 참 아늑하다
   
 2
PVC 파이프 대림점 옥상엔
수많은 관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아직은 자유로운 입으로 휘파람 불고
둥우리를 튼 새들 관악기를 분다
아귀에 걸린 지푸라기나 보온 덮개 쪼가리가
빌딩 너머 먼 들녘을 향해 흔들린다
때론 도둑고양이가 올라와
피묻은 깃털만 남기고 가는
문명과 원시의 옥상으로
통이 큰 주인아줌마가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또 몇 개의 관이 땅 속이나 콘크리트 사이에서
우리들의 쓰레기나 소음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관을 타고 온 것에는
새끼 잃은 어미 새 소리가 있고
회오리치는 바람 소리가 있고
도둑고양이 이빨 가는 소리가 뛰쳐나온다
피묻은 둥우리, 숨통을 막는
보온덮개의 질긴 터럭이
우리들 가슴에 탯줄을 늘이고,
PVC 파이프 그 어두운 총신들이
퀭한 눈으로 꼰아보고 있다
   
 3
우리들의 가슴속에도
제 집인양 덩치를 키워온
수많은 벌레들 으쓱거린다
햇살 반대편으로 응큼 돌아눕는
그들과 우리는 낯면이 많다
코를 풀고 눈곱을 떼내며 아침마다
우리는 벌레의 집을 청소한다
그들의 방으로 채널을 돌리고 보약을 넣고
벌레의 집은 참 아늑하다








물푸레나무라는 포장마차   / 이정록   
                     


버스는 떠났네
처음 집을 나온 듯 휘몰아치는 바람 
너는 다시 오지 않으리, 아니
다시는 오지 마라 어금니 깨무는데
아름다워라 단풍든 물푸레나무
나는 방금 이별한 여자의 얼굴도 잊고
첫사랑에 빠진 듯 탄성을 지르는데
산간 멀리서 첫눈이 온다지
포장마차로 들어가는 사람들
물푸레나무 그 황금 이파리를 
수많은 조각달로 고쳐 읽으며
하느님의 지갑에는 저 이파리들 가득하겠지
문득 갑부가 되어 즐겁다가
뚝 떼어서 함께 지고 갈 여자가 없어서
슬퍼지다가, 네 어깨는 작고 작아서
내가 다 지고 가야겠다고 다짐하는 늦가을 
막차는 가버렸고, 포장마차는 물푸레나무 그림자로 출렁이는데
주인은 오징어의 배를 갈라 흰 뼈를 꺼내놓는데
비누라면 함께 샤워할 네가 없고
숫돌이라면 이제 은장도는 품지 않아
그렇지만 가슴속에서 둥글게 닳아버린 저것이
그냥 지상의 도마 위로 솟구쳤겠나
그래 저것을 나는 난파밖에 모르는 조각배라 해야겠네
너에게 가는 마지막 배라고 출항표에다 적어놓아야겠네 
나에게도 함께 노 저어 갈 여자가 있었지
포장마차는 사공만 가득한 채 정박 중인데
물푸레나무 이파리처럼 파도를 일으키며
가뭇없이 사라져도 되겠네 먼바다로 
첫눈 맞으러 가도 되겠네




[ 이정록 시인 약력 ]



1964년 충청도 홍성 출생.
* 공주사범대학 한문학, 고려대 대학원 문학전.
* 1989년 대전일보에 시 <농부일기>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穴居時代>가 당선. 
* 수상 : 제20회 김수영 문학상(2001년), 제13회 김달진 문학상(2002년) 등을 수상
* 시집으로는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문학동네, 1994) <풋사과의 주름살>(문학과 지성사, 1996)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문학과 지성사, 1999) <제비꽃 여인숙>(민음사, 2001) <의자>(문학과 지성사,2006) <정말>(창비,2010)등이 있고, 시우화집 <발바닥 가운데가 오목한 이유>(청년정신, 1998)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