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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동요

비목/박인수

비목 (碑木) 

   작곡 /장일남   작사 /한명희  노래 /박인수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 - (한명희 작사가의 글)

6.25 전쟁의 상잔을 노래한 비목의 가사에 얽힌 사연.


 40년 전 나의 군복무시절, 막사 주변 여기저기서 뼈와 해골이 나왔으며

땔감을 위해서 톱질을 하면 간간히 톱날이 망가지면서 파편이 숨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순찰 삼아 돌아보는 계곡이며 능선에는

군데군데 썩은 화이버며 녹슬은 철모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많은 젊음이 죽어갔다는 기막힌 전투의 현장에서 어느날

나는 개머리판은 거의 썩었고 총열만 생생한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워왔다.

그러고는 깨끗이 손질하여 옆에 두곤

곧잘 그 주인공에 대해서 가없는 공상을 이어가기도 했다.

전쟁 당시 M1 소총이 아닌 카빈의 주인공이면 물론 소대장에 계급은 소위였다.

그렇다면 영락없이 나 같은 20대 한창 나이의 초급장교로 추정된다. 


 나는 어느 잡초 우거진 산모퉁이를 돌아 양지바른 산모퉁이를 지나며

문득 흙에 깔린 돌무더기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필경 사람의 손길이 간 듯한 흔적으로 보나

푸르clr칙한 이끼로 세월의 녹이 쌓이고 팻말인 듯

나뒹구는 썩은 나무 등걸 등으로 보아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결코 절로 쌓인 돌이 아니라

뜨거운 전우애가 감싸준 무명용사의 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 카빈총의 주인공, 자랑스런 육군 소위의 계급장이

번쩍이던 그 꿈 많던 젊은 장교가 묻혔을까?

제대 후에도 나는 2년 가까이 정들었던 그 능선,

그 계곡의 정감, 그곳의 환영에 빠진 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TBC 음악부 PD로 근무하면서

우리 가곡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쏟던 의분의 시절,

그때 나는 방송일로 자주 만나는 작곡가 장일남으로부터

신작 가곡을 위한 가사 몇 편을 의뢰받았다.

바로 그때 제일 먼저 내 머리 속에 스치고 간 영상이 다름 아닌

그 첩첩산골의 이끼 덮인 돌무덤과 그 옆을 지켜 섰던 새하얀 산목련 이었다.

나는 이내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그 깊은 계곡 양지녘의 이름 모를 돌무덤을 포연에 전사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목련을 전사한 주인공을 따라 순절한 연인으로 상정하고

사실적인 어휘들을 문맥대로 엮어갔다.


1절 가사.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2절 가사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궁노루, 즉 사향노루 한 마리를 대원들과 함께 순찰 길에서 잡아왔다.

아기염소만한 궁노루 한 마리의 향기가 내무반 안을 가득 채웠다.

그날 밤부터 홀로 남은 암짝이 울어 대기 시작했다.

갸녀린 체구에 캥캥대며 며칠째 밤새 울어대는데,

살상의 잔인함과 회한에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달빛이 계곡능선을 흐르는 밤에 나도 울고,

짝 잃은 암컷 궁노루도 울고 나중에는 온 산천이 오열하는 듯하였다.



 이렇게 해서 비목은 탄생되고 널리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오묘한 조화인양 유독 그곳 격전지에 널리 자생하여 고적한 무덤가를 지켜주던

그 소복한 연인 산목련의 사연은

잊혀진 채 용사의 무덤을 그려본 비목만은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한 셈이며

지금도 꾸준히 불려지고 있다. 비목에 얽힌 일화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가사의 첫 단어어인"초연"은 화약연기를 뜻하는 초연(硝煙)인데,

"초연하다" 즉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오불관언의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때는 비목(碑木)이라는 말 자체가 사전에 없는 말이고

해서 패목(牌木)의 잘못일 것이라는 어느 국어학자의 토막글도 있었고,

비목을 노래하던 원로급 소프라노가 "궁노루산"이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한 일이 있었다.

궁노루에 대해서 언급하면, 비무장지대 인근은 그야말로 날짐승, 길짐승의 낙원이었다.


 6월이면 반도의 산하는 비목의 물결로 여울질 것이다.

그러나 군에서 휴가 나와 명동을 걸어보며 눈물짓던

그 턱없는 순수함을 모르는 영악한 이웃,

숱한 젊음의 희생위에 호사를 누리면서

순전히 자기 탓으로 돌려대는 한심스런 이웃 양반,

이들의 입장에서는 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시퍼런 비수는커녕 어이없는 우격다짐 말 한마디에도

소신마저 못 펴보는 무기력한 인텔리겐차,

말로만 정의, 양심, 법을 되뇌이는 가증스런 말팔이꾼들,

더더욱 그 같은 입장에서는 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풀벌레 울어 예는 외로운 골짜기의 이름 없는 비목의 서러움을 모르는 사람,

고향땅 파도소리가 서러워 차라리 전사한 낭군의 무덤가에

외로운 망부석이 된 백목련의 통한을 외면하는 사람,

짙푸른 6월의 산하에 비통이 흐르고

아직도 전장의 폐허 속에서 젊음을 불사른 한 많은 백골들이

긴 밤을 오열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

겉으로는 호국영령을 외쳐대면서도 속으로는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가련한 사람,

아니 숱한 전장의 고혼들이 지켜낸

착하디착한 이웃들을 사복처럼 학대하는 모질디 모진 사람,

숱한 젊음의 희생 아닌 것이 없는 순연한 청춘들의 부토위에 살면서도

아직껏 호국의 영령 앞에 민주요, 정의요,

평화의 깃발 한번 바쳐보지 못한 저주받을 못난 이웃들이여,

제발 그대만은 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죽은 자만 억울하다고 포연에 휩싸여간 젊은 영령들이 진노하기전에!


 

가곡 비목[碑木]이 탄생한 배경
1964년,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평화의 댐 북방 14km 휴전선 부근)를 순찰하던 한 청년 장교가 (한명희. 당시 25세. 소위. 전 서울시립대 교수)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이끼 낀 무명 용사의 돌무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비목'의

작사가  한명희(韓明熙)교수

6.25 때 숨진 어느 무명용사의 무덤인 듯 옆에는 녹슨 철모가 딩굴고 있었고, 무덤 머리의 십자가 비목(碑木)은 썩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습니다.

비목

녹슨 철모, 이끼 덮인 돌무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새하얀 산목련,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깊은 계곡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 그는 돌무덤의 주인이 자신과 같은 젊은이였을 거라는 깊은 애상에 잠깁니다. 4년 뒤 당시 동양방송(TBC) 에서 일하던 한명희 PD에게 평소 알고 지내던 장일남 작곡가(한양대 음대 명예교수. 2006년 9월 별세)는 가곡에 쓸 가사 하나를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목'의 작곡자 장일남 교수

돌 무덤과 비목의 잔상이 가슴속에 맺혀있던 한명희 PD는 즉시 펜을들고 가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젊은 넋을 기리는 "비목"의 가사는 이렇게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 노래는 70년대 중반부터 '가고파', '그리운 금강산'과 더불어 한국인의 3대 애창곡으로 널리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가곡 "비목" 의 고향인 강원도 화천군에는 전쟁과 분단의 흔적들이 아직도 이곳저곳에 서려 있습니다. 6.25 당시 화천댐을 놓고 벌인 치열한 공방전으로 붉게 물들었던 파로호는 지금 신록 속에 푸르기 그지 없고, 군사정권 시절 댐 건설의 필요성을 놓고 논란이 일었던 평화의 댐은 민통선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댐 옆에는 가곡 "비목"을 기념하는 '비목공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평화의 댐

파로호의 원래 이름은 호수모양이 전설의 새 대붕(大鵬) 을 닮았다고 대붕호(大鵬湖)였으나, 6.25 전쟁 직후 이곳을 방문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화천댐 공방전에서 국군이 중공군 3개 사단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 것과 관련하여, "적을 격파하고 포로를 많이 잡았다" 는 뜻으로 "파로호(破虜湖)" 라는 새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파로호는 1944년, 화천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로 산 속의 바다라고도 불리는데, 호수에는 쏘가리, 잉어 등 70여종의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파로호

파로호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는 화천읍에서 평화의 댐으로 가는 460번 지방도 오른쪽에 있습니다. 파로호 휴게소에 차를 대고 5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비목공원은 1998년, 가곡 '비목' 을 기념해서 만들었습니다. 산비탈에 돌로 한반도 모양의 단을 쌓았고 곳곳에 돌무덤과 비목이 세워져 있습니다.

비목공원

주차장 입구에 '비목 노래비'가 서 있어 방문자들은 누구나 한번씩 그 앞에 서서 가사를 되새겨 본다고 합니다. 현재 비목공원에는 기념탑 외에 철조망을 두른 언덕 안에 녹슨 철모를 얹은 나무 십자가들 이 십여 개 서 있어 한국전쟁이라는 민족비극의 아픔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비목공원 비목 노래비

화천군에서는 매년 6월 3일부터 6일까지 이곳 비목공원과 화천읍내 강변에 들어서 있는 붕어섬 등에서 '비목 문화제'를 개최합니다. 진중가요, 시 낭송 등으로 짜여진 추모제, 비목깎기 대회, 주먹밥 먹기 대회, 병영체험, 군악 퍼레이드 등이 나흘동안 펼쳐진다고 합니다. 공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산자락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렸고 그 사이로 북한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근래에 호랑이 발자국이 발견됐다고 해서 주목을 끌기도 했습 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비목의 주인공과 많은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생각하며 '비목'의 가사를 다시 되새겨 봅니다. 가곡 '비목'은 적막에의 두려움과 전쟁의 비참함,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간절한 향수 등이 서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는 노래입니다.


비목(碑木) [ 1 ]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 2 ]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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