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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명상

노들강변/박부용

                          


노들강변

 신불출 작사.

 문호월 작곡.

 박부용 노래

〈양산도 장단으로 멋들어지게〉

 

1.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매여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잊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2. 노들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밟은 자국
만고풍상 비바람에 몇 번이나 지워갔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3. 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령으로
재자가인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싣고서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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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부용


지금부터 소개하는 글은  가수 박부용의 이력에 관한 최초의 서술입니다.

기생 박부용은 1901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로 이주해서 살았지만 ,부친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집안 살림은 기울었습니다.

그 때문에 박부용은 어린시절,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는 소녀가장으로

모진 고초가 많았던 듯합니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박부용은 1913년, 불과 12세의 나이로

서울 광교조합에 기생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이때부터 독한 마음을 품고 열심히 학업에 정진해서 가곡과 가사, 경서잡가를 비롯하여

고전무용의 영역인 각종 정재무, 춘앵무, 검무, 무산향까지 모두 익혔습니다.

 '조선미인보감'에 그려진 박부용의 자태는 마치 선녀같습니다.


'단정한 용모에 성품은 온유하다.

 어여쁜 귀밑머리는 한 덩이 새털구름이 봄 산을 휘돌아 감도는 듯한데,

발그레한 두 볼은 방금 물위에 피어난 한 송이 부용화를 떠올리게 하는구나.'


한창 레코드 보급에 대한 열망으로 부풀어 오르던 1933년,

박부용은 오케레코드사로 발탁이 됩니다.

맨 처음 서도잡가인 '영변가'를 최소옥의 장구 반주로 홍소옥과 함께 병창으로 불렀고,

긴 잡가인 '유산가'를 박인영의 장구에 맞춰 불렀습니다.


이후 민요 '사발가' '신개성난봉가' '범벅타령' '오돌독' '산염불' '흥타령'

 '창부타령' '신양산도' '신청춘가' '신애원곡' '한강수타령' 등을 취입했습니다.

잡가로서는 '신고산타령' '선유가' '수심가' '엮음수심가' '신닐니리야'

 '신창부타령' '신담바귀타령' '신오봉산' '신경복궁타령' '신방아타령' '제비가'

 '신산염불' '신천안삼거리' '풋고치' '신노랫가락' 등을 취입했습니다.

서도잡가로는 '공명가' '자진난봉가' '난봉가', 가사로는 '죽지사' '수양가' 등을 불렀습니다.

박부용이 오케레코드사를 대표하는 신민요가수로 활동했던 시기는

1933∼35년까지 약 3년입니다.

이 시기 모든 신민요의 황제라 할 수 있는 '노들강변'은

1934년 1월에 신불출 작사,문호월 작곡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음반은 오케레코드 창립1주년 기념 특별호로 발매되었습니다.

노들은 '노돌(老乭)'에서 변화된 말로 서울의 노량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노들강변은 노량진 일대의 한강 지류 강변으로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한가로운 뱃놀이가 번창했지요.


 
        출처 :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신불출이 작사한 이 ‘노들강변’ 노래는 국민 누구나의 애창됐던 최고의 신(新)민요였다.

특히 초등학교에선 무용시간에 단골메뉴로 레코드를 틀어놓고 학생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 신민요 5개 대표곡은 아리랑, 도라지, 천안삼거리, 양산도, 노들강변을 꼽았다고 한다.

 


인민배우 신불출(본명 신상학 ;1907-1969) 필명 불면귀(연극에서만 사용).


2.  신불출


서울에서 태어나 개성에 이주하여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가정생활이 너무 곤란하여 단야장에서 풀무질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는 학교에 가서 검열을 마치곤 했다.
이렇게 보통학교 과정을 마친 후 서울로 가서 소년노동을

하면서 야간으로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20년대 말엽에 일본으로 건너가 연극수업을 하는 과정에

‘넌센스’라는 장르를 달고 콜롬비아 레코드에
‘아첨 끝에 봉변’, ‘대머리타령’을 취입하였다.

귀국 후 1930년에 문호월과 함께 노량진 나루를 건너고

(노들나루는 '노량진나루'를 말한다.)


‘노들강변’의 가사를 썼다.

이 시기 ‘노들강변’은 무용곡으로 창작되었다.

(노들강변은 재인청 춤 중에서도 활달한 춤에 속한다.)

이 노래가 창작되자 ‘오케(O.K)’ 레코드社 창설을 위하여

 애를 쓰던 리철은 다른 레코드회사에 의뢰하여

시험 삼아 ‘노들강변’을 음판으로 제작하였고,
1932년경에 ‘오케' 레코드회사 창설을 정식으로 선포한

다음 다시 제작하였다.
노들강변에 이어 그가 창작한 가사들은 ‘신이팔청춘가’,

‘신조 어랑타령’,장타령조의 ‘코타령’, ‘그리워’ 등이 있다.

 


서울 여의도 부근, 노량진에 노들길이 있고

전철 9호선 역으로 흑석동에 노들역이 있습니다.

노들역 부근으로 부터 노량진 일대의 강변이 노들강변입니다.

이곳을 지나노라면 어린 시절 방송에서 수시로 듣던

그리고, 모두가 함께 노들강변이라는 노래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들도 [노들강변]이라는 노래 몇 소절은

 머리에 간직하고  흥얼거렸습니다.  

그 노래의 바탕인 노들강변은 서울 노량진을 부르는 이름이요.

지금은 샛강이라 불리는 강가~.

여의도 윤중제를 쌓고 노량진을 개발하기 전 60년대까지만해도

그 강가에는 큰 버드나무가 있었고 휘 늘어진

운치 있는 버들가지들이 있었습니다.

1930년대 초 오케(OK)레코드를 창설한 "이철" 사장이

신민요 개발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

드럼을 잘 다루던 그 레코드사의 전속작곡가 문호월이

만담으로 이름을 날리던 "신불출"과 함께 이 노들강변을 지나다가

뱃사공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작곡의 착상이 떠올라

곧장 강가의 선술집으로 들어가 종이에 곡조를 옮기고

신불출이 노랫말을 다듬어 만들어진 노래가 이 노들강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노래는 1933년부터 신민요를 부른

레코드에 취입되어 1934년 발매되면서

해방공간으로부터 6.25전후를 사신 분들에게 특별히 귀에 익은 노래입니다.


♪노들강변(신민요)

작사 : 신불출

작곡 : 문호월

노래 : 박부용

 1.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여나 볼가

에헤이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2.노들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밟은~ 자국

만고~풍~상  비바~람에 몇 번이나 지나갔나

에헤이~요  백사~장~도 못 믿 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3.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령으로

재자~가~인  아까~ 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이~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싣고서 가거라


펌...마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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