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소개
曾山里 (증 산)
五湖里 (오호리)
④기름진 앞들, 씨앗을 뿌리면 이루는 풍작
⑤ 이곳의 무우로 담근 달고 시원한 맛의 동김치 등이
五佳(오가)이다. 외동, 내동, 신촌리가 있다.
吉谷里 (길곡리)
馬川里 (마 천)
어만리 유래를 올려봅니다.
어만(於萬)리는 길곡면과 경계를 이룬 도천면의 동남부이다. 석천산의 서쪽 아래에 있는데 이 늘어진 산줄기 계곡에 마을이 있다.
서화현이 있었다는 서부실의 남쪽 마을이라 이곳도 신라때 크게 번성하였다고 구전되는 큰 동리로, 그때 일만여 호가 살았으므로 어만리라고 한다고 한다. 안어만과 바깥담 사이의 들이 넓기는 하나 일만여 호가 들어설 만큼 넓지는 않다. 아마 신라 때 서부실의 서화현을 중심으로 번창하였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토기류가 발견되었고, 또 글이 보이지 않는 입석이 2개나 마을입구에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말을 매어 두었다는 마전이 바로 앞에 있으며, 신라의 한길이라는 무정태 고개, 서화현의 새미라 전하는 우물이 이곳에도 있는 등 여러 상황들을 보아 서화현의 소재지가 예리 뿐만 아니라 어만리 까지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할 것이다.
산줄기가 늘어지거나 그 지형이 [細長] [愈遠]함에서 생긴 칭호가 [늘,느러](延, 舒)로 우리나라 여러 곳의 지명으로 사용되었던 글자인 [於]의 훈차로 보면 [늘]로 읽으며,[萬]은 음차로 보아 [먼] [만]으로 읽어 [늘먼] [느르만]등이 되니 [만]은 [골]의뜻을 가지고 있다.
곧 [늘골]로 읽으면 그 뜻이 늘어진 골(골짜기, 마을)이 된다.
행정 리는 어만리 1개 리이지만 자연 마을은 2개로 안어만, 바깥담 등이 있다.
최근 마을 앞들을 경지정리하여 농사짓기에 편하여 졌다.
**어만(於萬)
신라 때 만여호가 살았다 하여 어만이라 하였다 한다. 글자를 해석하면 [늘 골]이 되어 석척산의 줄기가 늘어진 아래 마을이란 뜻이기도 하다.
**안어만 (內於萬)
어만리 중 북쪽에 있는 마을로 어만의 본동이라 할 것이다. 석천산 아래에 있는데 양달, 음달 두뜸으로 나눈다.
과거 32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9호이며, 450여년 전부터 금산 김씨가 세거하여 왔으며, 밀양 박씨도 많이 살고 있다. 원천재(源泉齋 :錦山金百朋 祭閣)가 있다.
**양달
안어만의 뜸으로 양지쪽의 양달에 있으므로 양달이라 한다.
**바깥담 (外洞)
밭 (밧)어만이라고도 하는데, 안어만 남쪽 마을로 논리에서 가자면 바깥으로 입구이다.
[밭] [밧]은 바깥의 옛 말로 뒤 또는 북을 가르킨다.
밭어만을 요새는 바깥담이라 부르며 지도에도 바깥담으로 나와 있다. 웃담과 아래담이 있다. 서쪽에 두레 두 아름되는 정자나무가 있다. 65호였던 것이 지금은 36호로 줄었으며, 400여년 전부터 밀양 박씨의 세거지이다.
**웃담
밭어만의 뜸중 웃쪽에 있으므로 웃담이라 부른다
**아랫담
밭어만의 두뜸 중 아래쪽에 있으므로 아랫담이라 한다.
**석천산 (石泉山)
어만리 동쪽편 산으로 길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높이는 344미터로 정상은 남북으로 길다. 낙동강을 건너는 남지대교에서 보면 이 산이 잘 보이는데 길고도 펑퍼짐한 정상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 돌로 되었다. 돌기둥이 있었다 하여 석주산(石柱山)이라고도 하였다.
이 산은 날이 가물면 도천 면민들이 올라가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었다.
7월 보름까지 날이 가물어 나락이 타들어 가면, 석천산 만댕이에 아무개가 은장(隱葬)을 하여 한발이 심하다는 소문이 돌아 난리가 나곤 했다. 그러면 창을 들고 올라가 암매장한 곳을 찾아내 시체를 파내 버리곤 했다. 수 년전에도 비를 기다리자 못해 결국 도천면내 이장이 모여 의논하여 돼지 머리등 제수를 차려 들고 올라가 암매장 한 것을 찾고 기우제르 지냈다. 기우제를 지내고 논리 비석걸에 오니 비가 왔다. 그래서 영험있는 산으로 치부하고 있다.
이 산의 정상은 바위로만 되어 있고, 그 바위 아래 샘이 있어 석천산이라 불린다. 남쪽 오호리에서 부터 북쪽 어만리를 거쳐 도덕봉에 이어지는데 바위들이 층층으로 쌓여 층계덤을 이루고 있어 사람이 올라가기에 힘들다. 정상은 밋밋한 모습이다.
옛말에.
"석천산 호랭이하고 강철산 호랭이하고 싸우면 석천산 호랭이가 이긴다."
하는 말이 잇다 한다. 강철산을 길곡면에 있는 험한 산인데 그 산이 아무리 험하다 하여다 그보다 석천산이 험하다는 뜻으로 알려진 말이다.
이 산 정상의 바로 아래에 석천사가 있다.
**석주산 (石柱山) 돌기둥
석천산 정상은 돌기둥같은 바위가 있어 석주산이라 불리었다.
옛날 천지개벽 때 이 산이 돌기둥만큼 남고 물이 들었는데 그 돌기둥에 사람의 씨종자가 살아 남았다 하는 전설이 전해 온다.
도론골의 옹기굴에 그 때 앞일을 환히 아느 이인(異人)노인이 살았는데, 영산 고을 총각하나를 하나를 사람의 씨종자로 남기기 위해 여러 이상한 일을 행하여 이리로 오게 만들어 물 피난을 하였다 한다.
이 돌기둥은 어느 세월 풍우에 꺾여 사라져 버렸는지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있다.
**석턴사 터 (石泉寺址)
석천산 서쪽 중턱에 옛날 석천사가 있었다.
이 절의 폐망에 관한 전설이 구전되고 있는데 그곳에 쌀 나오느 구멍이 있었다. 매일 절의 공양에 필요한 양 만큼만 쌀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 "매일 조금씩만 나오는 구멍을 크게 하면 한꺼번에 며칠을 먹을 량이 나오겠너니..." 하고 욕심을 낸 상좌가 부지깽이로 구멍을 크게 하였다. 그랬더니 쌀은 온데간데 없고 그 구멍에서 빈대가 우굴우굴 쏟아져 나와 결국 절을 불살라 버렸다 한다.
지금도 산에 나무를 하러가서 절터의 바위나 돌을 들치면
빈대 죽은 껍데기가 많이 있다 한다.
아마 절에 사람이 많이 모이면 빈대가 끓게 되거나 불결하게 되어
신도들이 오지 않게 되어 폐망하게 된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 이 터 아래에 불령사가 있다.
불령사는 불령도사라는 이가 수 년 전에 창건하였다 하는 절이다.
**바람재
석천산 남쪽으로 아홉등 산 아래로 높이는 300미터이다.
옛날에는 고개길이 있어 바람재 고개라고도 하였으나 그 길이 없어져 버렸다.
바람재는 가맣게 높이 올려 바라보이는 재라는 뜻인데,
바람만이 불고 있다는 뜻도 된다.
바람재의 동쪽은 길곡면 길곡리 삼거리이다.
**아홉산등 (九嶝山)
바람재 남쪽 산으로 높이는 410.8미터로 이 일대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산 등성이가 아홉개가 뻗어 있어 아홉등 산, 그 골짜기를 아홉등골 또는 아홉골이라 부른다.
**아홉등골
아홉산등의 골짜기로 이곳에 아홉개의 등이 있기 때문에 아홉등골, 아홉골로 불린다.
**달력곡
아홉등골 일대를 달력곡이라고도 한다. 아마 달력이 여러 장이듯
그 구비가 여러 곳이니 달력곡으로 불려졌으리라.
밭어만에서 점곡을 거쳐 산 정상을 오르면 길곡면 오호리와
길곡리 음달로 내려가는 고개길이 있다.
**아홉등 산모랭이
아홉등산의 산길이 어만 점곡에서 올라오는 길과 우강리 효우촌에서 말골로 거쳐 오르는 두 길이 산 정상에서 만나 길곡면 오호리와 길곡리 옥상골, 음달 등지로 여러 갈래 돌아가니 그 모퉁이를 아홉등 모랭이라 부른다. [모랭이]는 모퉁이의 이 지방 말이다.
**점곡(店谷)
어만의 남쪽편 골짜기로 옛날 옹기를 만들었다는 곳이다.
도자기를 만들었던 곳을 점(店)이라 불렀다.
여기서 길곡면 오호리로 가는 고개도 점곡이라 부른다.
**대밭(竹田)고개
안어만에서 예리 새터로 가는 고개이다.
대밭이 있어 대밭고개인데, 대추밭이 있어 대추밭고개라 불리었다고도 한다.
**절골
불령암이 있는 골짜기이다. 예전 석천사가 있었으며 절로 올라가는 골짜기이기 때문이다.
**활끝
전에는 2호가 살았던 뜸이엇는데 지금은 집이 없다.
산이 뻗어 내려와 굽어 활 형국의 끝이므로 활끝이라 부른다.
**서불새미 (西火井)
안어만 입구 드복판에 정자나무 윗쪽 100미터 있는 오래된 샘이었다.
향나무가 샘가에 있어 물이 좋다고 인근에 소문난 것이었다. 서화현 시절 있었던 새미(우물)이므로
서불새미라 하였는데 [서불]이 [서물]로 와전되어 서물새미라 하는 이도 있다.
1990년대 경지정리 때 매몰되어 없어 졌다.
**서낭당 입석(立石)
어만 입구로 둘레 두 아름쯤 되는 정자나무 근처로 돌무지 위에
남근 모양의 돌이 박혀있어 서낭당 입석이라 하였다.
키가 두 자쯤 되는 돌이었다.
이 입석은 옛날에 힘이 아주 센 장사가 세웠다는 말이 전하며,
글이 있엇는지 없엇는지 분간할 수 없고 그 옆 작은 것 1기도 있었다.
1988~89년 사이 경지정리 때 입석은 분실되었고,
돌무지마져 그후 경지정리로 밀어 없어져 버렸다.
입석의 기원은 권위, 힘, 종족의 번성 등의 상징으로
남근을 다듬어 세우던 오래전 민속으로
창녕 송현동과 이곳 등 두 곳에 있었다고 알려져 왔다.
**어만 앞들
어만 마을 앞의 들이므로 앞들이라 부른다.
이 들은 내리미들의 일부인데, 6.25 때 크나큰 참사가 있었던 곳으로
도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곳이다.
1950년 8월 초순, 공산군이 남지읍 시남리 이이목나루를 통해 낙동가을 도하하였는데,
이들이 장마 대봉리 능선과 영남수리 제방을 따라 남하하여 송진리에 이르니
그날 남지 사람들은 피난을 나가게 되었다.
바로 공산군들은 영산을 향해 나아갔는데
어만쪽의 산길릉 택하여 오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어만에 있던 동민들과 피난을 온 영산 등
여러 곳의 사람들에게 갑자기 소개령(疏開令)이 내렸다.
사람들은 어만 앞들로 나와 어디로 갈지 몰라 우왕좌왕 하는데
이때 연합군의 비행기가 날아와 폭격을 가하였던 것이다.
아마 공산군으로 오인하였거나 피난민 속에 적군이 숨어 같이 행동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는지고
모른다. 소이탄과 기관총 난사로 어만앞 (내리미들 복판 농막 열)정자나무가 일격에
공중으로 날아가고 콩밭에 숨었던 사람들 중 이쪽 고랑에 엎드린 자는 살고
저쪽 고랑의 사람들은 죽었다 한다.
이 어이없는 폭격으로 백여명의 사상자자 났다고 전한다.
6.25전쟁 초기에 있었던 비참한 희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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