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오세영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모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9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모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듯 9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
9월/이외수
가을이 오면
그대 기다리는 일상을 접어야겠네
가을역 투명한 햇살 속에서
잘디잔 이파리마다 황금빛 몸살을 앓는
탱자나무 울타리
기다림은 사랑보다 더 깊은 아픔으로 밀려드나니
그대 이름 지우고
종일토록 내 마음 눈시린 하늘 저 멀리
가벼운 새? 구름 한 자락으로나 걸어 두겠네
9월/목필균
9월이 오면
앓는 계절병
혈압이 떨어지고
신열은 오르고
고단하지 않은 피로에
눈이 무겁고
미완성 된 너의 초상화에
덧칠되는 그리움
부화하지 못한
애벌레로 꿈틀대다가
환청으로 귀뚜리 소리 품고 있다
나의 9월은/서정윤
나무들의 하늘이, 하늘로
하늘로만 뻗어가고
반백의 노을을 보며
나의 9월은
하늘 가슴 깊숙이
짙은 사랑을 갈무리한다
서두르지 않는 한결같은 걸음으로
아직 지쳐
쓰러지지 못하는 9월은
이제는
잊으며 살아야 할 때
자신의 뒷모습을 정리하며
오랜 바램
알알이 영글어
뒤돌아보아도, 보기 좋은 계절까지
내 영혼은 어떤 모습으로 영그나?
순간 변하는
조화롭지 못한 얼굴이지만
하늘 열매를 달고
보듬으며,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9월/헤세
정원이 슬퍼한다
꽃송이 속으로 빗방울이 차갑게 스며든다
임종을 향하여
여름이 가만히 몸을 움츠린다
높은 아카시아나무에서
잎이 황금빛으로 바래져 하나씩 떨어진다
죽어 가는 정원의 꿈 속에서
여름은 놀라고 지쳐 웃음 짓는다
여름은 아직도 장미 곁에
한참을 머물며 위안을 찾다가
그 크고 지친 눈을
조용히 감는다
9월과 뜰/오규원
8월이 담장 너머로 다 둘러메고
가지 못한 늦여름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뜰 한켠
까자귀나무 검은 그림자가
퍽 엎질러져 있다
그곳에
지나가던 새 한 마리
자기 그림자를 묻어버리고
쉬고 있다
구월 비/강영환
수리를 마치지 못한 지붕을 밟고 지나가는 비가
9월의 산과 들을 때린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비가
먼 길 떠난 사람의 등 뒤에서 다시 내린다
한 시라도 빛이 더 필요한 목과 들이
어디로 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젖는다
따끈한 볕살이 더 먹고 싶은 조생 벼들이
9월을 지나는 길목에서 몸을 떤다
쉽게 지워지는 발자국이 어디 있을까
긴 여름동안 나무를 눕힌 바람의 입술이 붉어
물이 집을 쓸어간 뒤에도
남아서 새로 집을 짓는 사람들이
대문을 열어놓고 길을 찾는 9월
저를 싫어하는 지도 모르는 비가
충만한 강에 몸을 더한 뒤
9월의 산과 바다를 껴안고 간다
9월의 기도/박화목
가을 하늘은 크낙한 수정 함지박
가을 파란 햇살이 은혜처럼 쏟아지네
저 맑은 빗줄기 속에 하마 그리운
님의 형상을 찾을 때, 그러할 때
너도밤나무 숲 스쳐오는 바람소린 양
문득 들려오는 그윽한 음성
너는 나를 찾으라!
우연한 들판은 정녕 황금물결
훠어이 훠어이 새떼를 쫓는
초동의 목소리 차라리 한가로워
감사하는 마음 저마다 뿌듯하여
저녁놀 바라보면 어느 교회당의 저녁종소리
네 이웃을 사랑했느냐?
이제 소슬한 가을밤은 깊어
섬돌 아래 귀뚜라미도 한밤내 울어예리
내일 새벽에는 찬서리 내리려는 듯
내 마음 터전에도 소리없이 낙엽질텐데
이 가을에는 이 가을에는
진실로 기도하게 하소서
가까이 있듯 멀리
멀리 있듯 가까이 있는
아픔의 형제를 위해 또 나를 위해 ...
9월의 시/문병란
9월이 오면
해변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된다
나무들은 모두
무성한 여름을 벗고
제자리에 돌아와
호올로 선다
누군가 먼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
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
기도를 마친 여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울타리에 매달려
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
때묻은 손수건을 흔들고
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
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
먼 항구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되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
눈물에 젖는다
9월의 시/함형수
하늘 끝없이 멀어지고
물 한없이 차지고
그 여인 고개 숙이고 愁心 지는 9월
기러기떼 하늘가에 사라지고
가을 잎 빛 없고
그 여인의 새하얀 얼굴 더욱 창백하다
눈물 어리는 9월
9월의 풍경은 애처로운 한 편의 시
그 여인은 나의 가슴에 파묻혀 우다
9월의 약속/오광수
산이 그냥 산이지 않고
바람이 그냥 바람이 아니라
너의가슴에서, 나의 가슴에서
약속이 되고 소망이 되면
떡갈나무잎으로 커다란 얼굴을 만들어
우리는 서로서로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손내밀면 잡을만한 거리까지도 좋고
팔을 쭉 내밀어 서로 어깨에 손을 얹어도 좋을 거야
가슴을 환히 드러내면 알지 못했던 진실함들이
너의 가슴에서, 나의 가슴에서
산울림이 되고 아름다운 정열이 되어
우리는 곱고 아름다운 사랑들을 맘껏 눈에 담겠지
우리 손 잡자
아름다운 사랑을 원하는 우리는
9월이 만들어놓은 시리도록 파란 하늘 아래에서
약속이 소망으로 열매가 되고
산울림이 가슴에서 잔잔한 울림이 되어
하늘 가득히 피어오를 변치않는 하나를 위해!
9월의 이틀/류시화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 손까지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온다 해도 나는
소나무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9월의 정오/헤세
푸른 날이 머물러 있다
한 시간 동안 휴식이라는 언덕 위에
그 빛은 모든 사물을 감싸 안고 있다
꿈속에서 보이는 듯한 모습으로
그림자 없이 세계는
푸른빛과 황금빛 속에서 고요히 흔들려
높은 향기와 무르익은 평화에 잠긴 채 펼쳐져 있다
ㅡ 이 모습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ㅡ
네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황금빛 시각이
그 가벼운 꿈에서 깨어나고
더 고요히 웃음 짓는 동안, 더 창백해지고
더 서늘해진다, 돌고 있는 태양이
9월이/나태주
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대추는 대추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너는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익는다
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서
서서히 물러가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를 떠나야 하고
너는
내 가슴 속을 떠나야 한다
9월이 오면/안도현
그대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9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9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9월이 온다/박이도(1938 - )
9월이 오면
어딜론가 떠나야 할 심사
중심을 잃고 떨어져갈
적, 황의 낙엽을 찾아
먼 사원의 뒤뜰을 거닐고 싶다
잊어버린 고전 속의 이름들
내 다정한 숨소리를 나누며
오랜 해후를, 9월이여
양감으로 흔들리네
이 수확의 메아리
잎들이 술렁이며 입을 여는가
어젯밤 호숫가에 숨었던 달님
혼사날 기다리는 누님의 얼굴
수면의 파문으로
저 달나라에까지 소문나겠지
부푼 앞가슴은 아무래도
신비에 가려진 이 가을의 숙제
성묘 가는 날
누나야 누나야 세모시 입어라
석류알 터지는 향기속에
이제 가을이 온다
북악을 넘어
멀고 먼 길 떠나온 행낭 위에
가을꽃 한 송이 하늘 속에 잠기다.
강고개를 넘으며
- 유금-
9월이라 호젓한
산중에
패랭이꽃 길가에 피었어라
무심히 한 송이 꺾어
손에 들고 길을 가노라
맑은 물 속 모래가 희고
가지런한
풀에 저녁 햇빛 선명하여라
산길에는 인적이 뚝 끊어져
나뭇잎이 발자욱 소릴 내누나
걸어서 산골짝 다 지나고
한낮에
높은 고개 넘어가누나
먼 들에 구름 그림자 아득도 하고
외딴 마을에 닭 우는 소리 고요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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