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白馬江)은 조선시대에 생긴이름
백강(白江)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고려시대 이전의 기록에 실려있는 백제의 강이름이다.
삼국사기에는 白江 或云伎伐浦(백강 혹운기벌포) 라고 기록하여 백강의 다른이름이 '기벌포' 라고 하였다.
또한 伎伐浦는 지벌포(只伐浦)라고도 했다는데 좁고 험애(險隘)하여 적을 방어하기 용이한 지역이므로
붙인 이름인 것이다.
다시말해 육지전이나 해전에서 좁고 험한 지형을 이용해서 적은 군사력으로도 쉽게 적을 방어 할 수 있는
곳으로 적의 수(數)가 아무리 많아도 '병의 목(bottleneck)' 형상을 한 곳에서는 공격이 어렵고 반대로
방어는 쉬워지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伎伐浦에 해당하는 지형은 많이 있었을것 같은데 이런 경우에 伎伐浦는 보통명사 일 수도 있다.
포(浦)라는 것은 포구를 말하는 것으로 강이나 내에 조수가 들락하는 곳을 말한다.
조수(潮水)는 바닷물이 해와 달의 인력으로 주기적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으로 양자강은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에 조수가 생기지만 워낙 넓어서 양자강 그 자체도 조수현상이 생기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기벌포(伎伐浦)의 또 다른 명칭을 무려 여섯가지나 더 기록하고 있다.
'伎伐浦 卽長岩又孫梁一作只伐浦又白江(기벌포는 장암 또는 손량 한편 지벌포 또는 백강)'
또, 사비하(泗물가 비河) 사자하(泗차河) 등으로도 기록이 되어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지역 이거나 인근지역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기벌포가 이토록 다양한 명칭을 가졌다면
아마 장강(陽子江) 말고는 없을것이다.
구당서에는 웅진강구(熊津江口), 신당서에는 웅진구(熊津口), 일본서기에는 백촌강(白村江)이라고 기록
하고있다.
고려말 삼국유사 이전의 문헌에는 백마강(白馬江)이라는 명칭이 존재하지 않고 단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와 북부여편에 "사자하(泗차河) 가에는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물고기와 용을 낚았다 하여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있으므로 그 바위를 용암(龍巖)이라고 한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소정방
(蘇定方)의 조룡대(釣龍臺) 전설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백마강(白馬江)은 아무래도 조선
시대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
↑ 부여백제 문화단지
↑ 고란사
▒ 백마의 전설 조룡대(釣龍臺)
나당(羅唐)연합군의 물밀듯이 침공에 7백년 백제사직이 무너지고, 망국의 치욕에 떨던 의자왕도 포로의
몸이 되어 멀리 불귀의 땅 당경에 끌려가자 백마강은 그 쓰라린 기억을 어서 잊으려는듯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사 영고성쇠(榮故盛衰)의 무심함이여! 바로 어제만 하여도 의자왕이 용선(龍船)에 아름다운
궁녀를 싣고, 태평세월을 구가하던 그 강상에는 위풍 당당한 소정방(蘇定方)의 깃발이 나부끼는 군선
들이 오락가락 하였다.
더욱 야속하기로는 그 많은 배들이 한 때는 15만호에 사탑심다(寺塔甚多)하던 사비성을 외면하고 이제는
당의 도독부(都督府)가 설치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소부리(所夫里)는 7주야 밤낮 없는 약탈 방화로 완전 초토화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백마강의 주인인 용신은 이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백제의 유민들이 광복운동을 위해 일제히 궐기함을 안 용신은 때를 같이 하여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나리 군선들이 부소산 근처에 접근하기만 하면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시키며 돌풍을 몰아오고 호수와 같던 강물은 마치 바다의 노도와 같이 거세게 소용돌이 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당의 군선과 군병들은 물속에 삼켜졌다. 이런 당병들의 아비규환의 참변이 오는 날고 또 오는날도 계속되기를 거의 한달에 이르렀다.
사비성을 초토화 시켜버렸으니 공주의 웅진성에 머물고 있던 소정방은 이 계속되는 참변의 소식을 듣자,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일관을 불러 그 원인을 알아보게 하였다.
일관은 소정방에게 [아무래도 백마강의 용신이 된 무왕의 혼이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하고 알리었다.
[뭣이 무왕의 혼이라니?]
[네, 의자왕의 부왕인 무왕은 원래 소부리의 궁남지에 살던 용이 그 곳 궁녀와 상통하여 낳은 자임으로
죽어서 용으로 다시 환생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음, 그 말이 틀림이 없으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괴변이 강에서 일어날리 만무하옵니다.]
[그렇다면 무슨 묘책이 없겠는가?]
[그 용을 낚아채는 방법이 있사옵니다만]
[아니 용을 어떻게 낚는단 말인가?]
소정방의 귀가 번쩍 들리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용은 백마의 고기를 가장 즐긴다 하오니, 그를 미끼로 하면 틀림없이 용이 걸릴 것입
니다.]
소정방은 곧바로 소부리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일관이 일러준대로 부소산 북쪽 강물속에 솟아난 바위에 올라 타고 부하를 시켜서 만들게 한
철사 낚시줄에다 백마의 고기를 끼워 강물속에 던졌다.
한편 용은 백제 사적의 원수 당에 대한 앙갚음으로 매일 백마강 위의 하늘에 구름과 비바람을 몰고오랴,
소용돌이를 발생시키느라 몸이 닳도록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보니 피곤도 하고 몹시 시장기고 돌았다.
이 때 마침 눈앞에 그렇게도 좋아하는 백마의 날고기가 물 속에 떠내려 왔으니 [이게 웬 떡이냐]하고
용은 얼른 그 백마고기를 꿀꺽 삼켰다.
바위 위에서 낚시줄을 잡고 있던 소정방은 [옳지 걸렸구나!]하고 낚시줄을 당겼다. 놀란 것은 용이었다.
용은 아픔과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이통에 소정방은 하마트면 물속에 이끌려 빠질 뻔 했으나, 발에
있는 힘을 다 주고 버티었다.
이렇게 기를 쓰며 당기는 소정방과 이끌리지 않으려는 용 사이에 옥신 각신 필사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소정방이 올라 타고 있던 수중 바위에는 발자국과 낚시줄이 마찰되어 흠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낚시에 걸린 용의 기력은 시간이 갈수록 떨어져 가기만 하는데 소정방에게는 힘이 센 부하 장병
수명이 달려들어 가세하는지라 대세는 일변했다.
용은 물 아래 위로 출몰하며 발버둥을 쳤다. 마지막 기력을 다해 저항하는 소리를 높이며 낚시줄을 낚아
채었다.
그러나 끝내, 황금 비늘을 공중에 번쩍 빛내며 백마강 동쪽 마을 지금의 용전(龍田)의 논두렁에 뚝 떨어져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도망가고 용의 시체는 때마침 여름의 폭양에 썩기 시작하더니 그 지독한 썩은
내는 멀리 80리 떨어진 공주의 한 마을까지 진동하였으니 이 때부터 그 마을 이름이 [구린내]가 되었고,
소정방이 올라 탔던 수중 바위도 조룡대(釣龍臺)라 이름 지어졌으며, 또한 용이 낚인 부근의 강 이름도
이때부터 백마강이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백마강/허민(1929년 부산 출생~1974년)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
아 ~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이별 목맺쳐 울면
계백장군 삼척검은 님사랑도 끊었구나
아 ~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칠백년의 한이맺힌 물새가 날며
일편단심 목숨끊는 람치마가 애닲구나
아 ~ 낙화삼천 몸을 던진 백마강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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