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백에 관한 시모음 ]
※ 꽃처럼 살려고 / 이생진
꽃피기 어려운 계절에 쉽게 피는 동백꽃이
나보고 쉽게 살라 하네
내가 쉽게 사는 길은
쉽게 벌어서 쉽게 먹는 일
어찌하여 동백은 저런 절벽에 뿌리 박고도
쉽게 먹고 쉽게 웃는가
저 웃음에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닌지
'쉽게 살려고 시를 썼는데
시도 어렵고 살기도 어렵네
동백은 무슨 재미로 저런
절벽에서 웃고 사는가
시를 배우지 말고 .
동백을 배울 일인데’
이런 산조(散調)를 써놓고
이젠 죽음이나 쉬웠으면 한다
※ 동백은 떨어져서도 저리 붉은데
/다서 신형식
동백은 툭 떨어져서도
저리 붉은데
고개 한번 떨구는 것이
무애 대수라고
삶이 묵직하게 느껴질수록
내가 비우면 되는 일이라고
한라산 소주 몇잔에
그대에게서 고개 돌리는 순간
목련은 망설임 없이
하얗게 피어나고
만만하게 보지 마라
꽃 피우는 것도 생계다
생을 이어가는 것이다
※ 동백 선생 / 송찬호
내가 남도로 선생을 찾아간 것은 어느덧
삼월도 다 지난 어느 햇살 맑은 봄날이었다
그 깊은 내력을 알 수 없지만 선생은 의서와
역서를 읽는 분이었다 어쩌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뼈를 맞춰주거나 응혈을
풀어주기도 하고 몇몇 종자를 구해와서는
절기에 따른 파종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분명한 것은 선생은 해마다 돌배를 타고
혹독한 겨울 바다를 건너와 천기를 살피며
근심하다 봄빛이 완연해지면 떠나간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해인가 난리가 났을 때는
탄식 끝에 배를 바다 밑에 끌어 묻고 꽃을 뿌려
손수 펼친 陳法 속에 한동안 은거하기도 했다
내가 가던 날, 아직 배는 문밖에 매어 있으되
오랫동안 선생의 기척은 없었다 드디어 조바심을
참지 못한 성미 못된 내 마음속 원숭이들이
가슴을 긁으며 가르릉거렸다 선생은 어디 계시는지
이제 정말 봄빛이 완연하다 나는 한동안 서성이다
인근 사람들이 일러준 대로 우선 눈에 띄는
소똥 묻은 돌멩이에 다가가 여쭸다
안에 동백 선생 계십니까?
※ 붉은 동백 / 문태준
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마음 이리 설레 환속했다는데
나도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 이고 싶더라
쩌렁쩌렁 해빙하는 저수지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어도
봄밤에는 숨죽이듯 갇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한 사람을 공양하는
무정한 불목하니로 살아도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 뺨이고 싶더라
※ 동백 / 문정희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
※ 뿌리 / 복효근
동백나무 심으려 마당 한 귀퉁이를 파니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감나무 뿌리가 여기까지 뻗쳐있다
그 곁에 동백을 묻는다
이 동백 뿌리도 저 감나무 곁까지 다가가려나
서로 엉켜서
물을 나누고 양분을 나누며
때론 아웅다웅 다투기도 할 것이다
싸우다가 정든다고
바람이 동백을 넘어뜨리려 하면
감나무 뿌리가 손을 꼭 잡아주기도 하겠지
동백이 꽃 피면
감꽃 저도 꽃이라고 애써 꽃 피우겠지
그렇다고 감나무에 동백이 피진 않아
동백나무에 감이 열리지도 않아
그 사이 동박새는 그네들을 오가며
새들의 뿌리는 먼 구름까지 뻗어있다고 자랑질도 하며
뿌리 얕은 집주인 흉도 보며
※ 동백꽃 / 유치환
그 대 위하여
목 놓아 울던 청춘이 이 꽃 되어
천년 푸른 하늘 아래
소리없이 피었나니
그날
한 장 종이로 꾸겨진 나의 젊은 죽음은
젊음으로 말미암은
마땅히 받을 罰이었기에
원통함이 설령 하늘만 하기로
그대 위하여선
다시도 다시도 아까울 리 없는
아아 나의 청춘의 이 피꽃
※ 동백 / 강은교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 혼자 피는 동백꽃 / 이생진
꽃 시장에서 꽃을 보는 일은
야전병원에서 전사자를 보는 일이야
꽃이 동백꽃이
왜 저런 절벽에서 피는지 알아?
그것도 모르면서 꽃을 좋아했다면
그건 꽃을 무시한 짓이지 좋아한 것이 아냐
꽃은 외로워야 피지
외롭다는 말을 꽃으로 한 거야
몸에 꽃이 필 정도의 외로움
이슬은 하늘의 꽃이고 외로움이지
눈물은 사람의 꽃이며 외로움이고
울어보지 않고는 꽃을 피울 수 없어
꽃한테 축하 받으려 하지 마
꽃을 달래줘야 해
외로움을 피하려다 보니 이런 절벽에까지 왔어
※ 선운사 동구 / 서정주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 동백 피다 / 허영숙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에는 내가 즐겨듣는 노래가 있지 노래가 나오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해마다 바람이 그려놓은 악보들이 마당에 두껍게 쌓여 있지 바랭이, 개망초의 전주곡이 끝난 자리에 이름 모를 풀꽃들이 스스로 지닌 음계를 타고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피었다 지고 도돌이표를 따라 한 무리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며 합창을 들려주기도 하지
나만 아는 그 집에는 오래 전 당신이 부르던 노래가 있었지 노래가 흘러나오던 입술을 열고 들어서면 잡풀만 무성한 마당, 저음 또는 고음이 가진 당신과 나의 불안한 옥타브를 베어버린 킬링필드, 그 들판에 우리의 노래는 이미 죽고 남은 몇 음절의 노래가 미완으로 남아 있지 달빛만 조명처럼 출렁이었다 사라지는 빈 무대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당신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던 겨울 날
집과 집의 경계를 깔고 앉아 당신의 지문이 묻은 악보를 뒤적이는데 성성 날리는 눈발이 피날레를 예고하더니 담벼락 밑에 서 있던 늙은 가수 하나가 목울대를 세우고 붉은 노래를 낭창낭창 부르기 시작했지 그 틈을 타고 오래 가두어둔 한 음절을 기침이 쏟아지도록 따라 불렀지 눈발 속에 당신이 붉게붉게 피고 있었지
※ 선운사 / 송창식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떠나실 거에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 곳 말이에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떠나실 거에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 곳 말이에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 곳 말이에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 곳 말이에요
※ 모란동백 / 이제하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덧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랫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나를 잊지 말아요
※ 동백꽃 / 이생진
남쪽 섬, 여서도에 와
초로의 여인에게 물었다
- 아주머니, 왜 루주 안 발라요?
"루주가 뭔데?"
- 있잖아요, 입술을 빨갛게 칠하는 거
"그걸 왜 발라, 동백꽃이 웃게"
동백꽃이 웃는다는 소리
섬에 와서 처음 들었다
※ 동백꽃 / 정 숙
젖몽오리 속에 수줍음 그리 태우더니 열병의
꽃나무가 드디어 타오르네. 얼어터지면서도
쩔쩔 끓어오르는 가슴 주체를 못해
칼날 삼키며, 녹이며 끌어안은 겨울바람
지즈로 서답 빛이 붉게 타오르네.
처절하게, 처절하게 그 빛깔로 봄 오는 거 알고
온몸띠 화끈하게 한번 달아오르려는가.
게살이 뚝뚝 흐르는 저 바람, 이내 옆눈질
힐끔힐꿈하는 거는 삶의 속임수지만
이미 열어버린 앞섶인지라
참 괴오심의
아픔 더디게 동백가지에 걸려
햇살 눈 저리게 반짝이네.
※ 동백 피는 날 / 도종환
허공에 진눈깨비 치는 날에도
동백꽃 붉게 피어 아름답구나
눈비 오는 저 하늘에 길이 없어도
길을 내어 돌아오는 새들 있으리니
살아 생전 뜻한 일 못다 이루고
그대 앞길 눈보라 가득하여도
동백 한 송이는 가슴에 품어 가시라
다시 올 꽃 한 송이 품어 가시라
※ 선운사 동백꽃 / 오순택
선운사 동백꽃은
누나 입술같이 곱더라
고운 입술에 봄빛 듬뿍 물고
배시시 웃고 있더라
지난 겨울 싸락눈 먹고 자란
초록잎사귀가 저렇게
붉은 꽃 피웠겠지
꽃이 지면 어쩌지
붉은 동백꽃 똑똑 따며
봄이 가버리면 어쩌지
어디서 날아왔는지
꽁지 몽땅한 새 한 마리
떨어진 꽃잎을 쪼아먹고 있더라
※ 선운사 동백꽃 / 이산하
나비도 없고 벌도 없고 동박새뿐
그 동박새에게 마지막 씨를 남기고
흰 눈 위에 떨어진 한 치 흐트러짐 없이
통째로 툭 떨어진 선운사 붉은 동백꽃
떨어지지 않은 꽃보다 더 붉구나
※ 선운사 동백꽃 / 박남준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습니다
대웅전 뒷산 동백꽃 당당 멀었다
여겼는데요
도솔암 너머 마애불 앞 남으로 내린
한 동백 가지 선홍빛 수줍은 연지곤지
새색시로 피었습니다
휜 눈 밭에 울컥 각혈을 하듯
가슴도 철렁 떨어졌습니다그려
※ 선운사 동백꽃 / 유안진
무너지고 싶습니다.
녹아지고 싶습니다라고
여우바람으로 자맥질치는 불길
미친 이 불길 잡아 달라고
눈비를 맞아봅니다만
밤마다 고개 드는
죄를 죽입니다만
눈서리가 매울수록
오히려 뜨거워만집니다
마침내는 왈칵
각혈 쏟고 말았습니다.
부처님.
※ 외길 / 천양희
가마우지 새는 벼랑에서만 살고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삽니다.
유리새는 고여 있는 물은 먹지 않고
무소새는 둥지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새들은 날아오릅니다.
새들은 고소 공포증도 폐쇄 공포증도 없습니다.
공중이 저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놓아두시지요.
외길이 나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요.
※ 선운사 동백꽃 /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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