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시 모음
+ 11월 / 고은
낙엽을 연민하지 말아라
한자락 바람에
훨훨 날아가지 않느냐
그걸로 모자라거든
저쪽에서
새들도 날아가지 않느냐
보아라 그대 마음 저토록 눈부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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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노연화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
얼음이 가득하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
움츠린 어깨마다 수북한 근심
어둠은 더 빨리 얼굴을 들이민다
종종걸음으로 시간을 뒤쫓아도
늘 손은 비어있다
비어 있어도 아름다운 나무들
제자리 묵묵하게 삶을 다진다
비늘 떨군 담담함으로 12월을 기다린다
마지막이란 이름 붙은 것의 앞은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 거름이라서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것
낙엽을 떨구는 몸짓을 사람들도 한다
잠시 어깨 움츠렸다가
눈이 오면 곧 환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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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박용화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만 그루 잎이 살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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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배한봉
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
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놓은 정오
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 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
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
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누군가 주먹을 내지른 듯 아픈 명치에서 파랗게 하늘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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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서정우
배경의 쓸쓸함을 견딜 수 없어. 갈 곳 잃은 추위는 도시로 몰리고, 가로수가 내리는 몇 장 야윈 잎새의 흔들림. 떨어지는 것이 아닌 떨구는 소리가 자꾸 들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지난 계절 무모하게 푸른 노래야.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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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서정준
단풍! 좋지만
내 몸의 잎사귀
귀때기가 얇아지는 11월은 불안하다
어디서
죽은 풀무치 소리를 내면서
프로판가스가 자꾸만 새고 있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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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송정란
바싹 마른 입술로
나뭇잎 하나 애절하게
자작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곧 어디론가 떠날 듯한
몸짓으로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고개를 내젓고 있다
양재동에서 안양으로 가는 913번 좌석버스
차장 밖으로 이별을 기다리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해마다 잎을 갈아치우는
나뭇가지의 완강한 팔뚝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매달린 잎들이 모조리 소스라쳐 있다
더 이상 내줄 것 없는 막막함으로
온몸 바스라질 것 같은 눈빛으로
속이 다 삭아버린
사랑에 매달리고 있다
입을 앙다문
여윈 나뭇잎 같은 계집 하나,
바싹 마른 입술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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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오세영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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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유안진
무어라고 미처
이름 붙이기도 전에
종교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은 차라리
달디단 살과 즙의
가을 열매가 아니라
한 마디에 자지러지고 마는
단풍잎이었습니다
두 눈에는 강물이 길을 열고
영혼의 심지에도
촉수가 높아졌습니다
종교의 계절은 깊어만 갑니다
그대 나에게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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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이서린
낙엽처럼 불면이 쌓이는 날이 많아졌다
종종 새벽녘에 비가 흩뿌리는 날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는 느낌에
유서 같은 일기를 두서없이 쓰기도 한다
가끔 안주도 없이 술을 털어 넣듯 마시다
미친 듯이 밤길을 휘적휘적 걷다가
한 사람 안에 웃고 있는 또 한 사람을 생각하다
모든 걸 게워내듯 오래오래 울기도 하는
아침이면 퉁퉁 부은 눈으로
식구들의 밥을 차리고
빨개진 눈으로 배웅을 하고
꾸역꾸역 혼자 밥 먹는, 이 슬픈 식욕
그래도 검은 커피를 위로 삼아
마당에 빨래를 넌다
조금씩 말라가는 손목은 얇은 햇빛에 맡기고
흐르는 구름을 보다 눈을 감으면
툭, 떨어지는 감나무 잎
세상은 저렇게 떠나야 하는 것
조만간 가야 할 때를 살펴야 하는 것
길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지는 해는 왜 붉은가 생각하다가
흉터는 왜 붉은가를 생각해 보는
이대로 증발하고 싶은 저무는 하늘
아직 살아 있는 내가
찬물에 손을 담고 쌀을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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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이수희
내 그림자가
고집을 피우고
슬그머니 꼬리가 무딜까 봐
감나무 몇 잎이
가지를 놓지 못합니다
시간의 그늘을 저만치 두고
비릿한 눈물마저 마른
하늘 끝마저 멉니다
그가 내민
연서를 따라가다가
벌레먹은 낙엽이 되고
휑하게 길어진 돌담길
긴장한 상념도 움츠리며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걸립니다
땅 위를 걷는 모든 각진 마음들이 뒹굴어
제 가슴만 헐어내고
제 허무함만 세우고
그래도 그의 가슴마다 기슭마다
세상의 뿌리를 더 환하게
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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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이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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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이창숙
조용히 흔들림 없이, 손 내밀지 않고 두려움 없이,
어둠과 사유하기,
나무들이 11월의 집을 짓고 있다
허름하게 집 지을 짚 몇 단만 있으면 되지
다 읽지 못한 책은 그냥 덮어두고
쓰지 못한 시(詩)는 바람에게 들려주고
보고 싶음은 붉은 울음으로 떨궈내고
안쓰러움은 발 밑에 묻어 두지
한밤중에도 나무들은 사이사이 눈을 뜬다
흔적 지우기 긴 몸 소름 돋는 쓸쓸함 꼭꼭 쌓아두기
구석구석 빈자리 채워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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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이혜리
끝끝내 닿지 못할 막막함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달력 속의 날짜, 11월
산막처럼 텅 빈 글자의 행간으로 가을은
차츰 침묵의 심지를 낮춘다
거리에 나서면 바람이 끌다 버린 나뭇잎 우수수
목조 벤치 아래 굴러 다니고
아직 채 옷깃 여미지 못한 목덜미 속으로
방촌역 차단기 앞에 멈춰 선 저녁 안개 감겨온다
시간이여 계절이여
꿈꾸었던 것들과 제때에 닿는 일 드물고
모든 소원하는 것들은 뿔뿔 흩어지거나
뒤늦게 이루어졌다
홑이불처럼 가난한 마음 위에
누덕누덕 그리움만 차 오르고
빈 수레 가득 흰 이슬 날리며 바람떼는
어느 멀고 나지막한 마을로 떠나간다
바닥 드러낸 등잔처럼 희미한 내 그림자
막다른 골목처럼 서늘히 서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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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조용미
한밤
물 마시러 나왔다 달빛이
거실 마루에
수은처럼 뽀얗게 내려앉아
숨 쉬고 있는 걸
가만히 듣는다
창 밖으로 나뭇잎들이
물고기처럼
조용히 떠다니고 있다
더 깊은 곳으로
세상의 모든 굉음은
고요로 향하는 노선을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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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정군수
아내의 손을 잡고 밤거리를 간다
불빛 사이로 잎이 진다
겨울로 가고 있는 은행나무
아내는 말이 없다
그 손금에서도 잎이 지고 있다
문을 닫지 말아야지
겨울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찬바람이 이는 마음의 문을 열어 놓는다
벌거벗은 나무가
나이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사람들이 가고 있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이 밤
그들은 얼마나 긴 성을 쌓을까
구급차의 경적소리가 들린다
이 밤에 다 지렸는가
몇 잎 남은 은행잎이
바람에 실려가다
아내와 나의 발등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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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최갑수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앉아
오래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11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 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 속 같은 11월의 그 햇빛들이
머물렀던 자리 11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시 몇 편을 슬렁슬렁 읽어 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 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시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 한 11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얼굴을 내민 단풍잎 한 장이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처럼
낯설고 겸연쩍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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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 최정례
느닷없이 큰 곰이
천장까지 닿는 검은 그것이 나타나
우리 집 고양이를 아이들을 때려눕히고
나를 그러면?
함께 살자고 하면?
이 집 커튼을 찢고 들어와
돌이 된 내 심장을 두들기며
그러면 어떡하지?
창문의 불빛을 훔쳐보다가
느닷없이 현관문에 피아노에
차압딱지를 붙이는 집달리처럼
11월 어느 날
무심한 곰의 얼굴로 들이닥쳐서
TV에서 배 두들기며 웃는 코미디언들
얼굴 위에 재를 뿌리고
소파 위에 내 손바닥 위에
뜨거운 석탄을 올려놓으면
그러면?
이 집 사느라 진 빚
이자의 이자 때문에
넌 역전 앞에 가 신문지나 덮고 누워 있어라
그러는데도
기대고 싶고 조금은 은근히 살고 싶어지면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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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月 / 홍경임
추수 끝낸 들판
찬바람이 홰를 치고
바라보이는 먼 산들
채색옷 단장을 하고는
먼 데서 오는 손님을 기다린다
잎을 지운 나무 위에
까치집만 덩그마니
11月 가로수 은행나무
줄을 서서 몇 뼘 남은 햇살에
마냥 졸고 있다
채마밭 식구들 실한 몸매를 자랑하며
초대받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길 옆 목장 젖소들 등마루에
남은 가을이 잠시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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