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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천리장성 축조와 백성들의 피해

천리장성은 고려 시대 중요한 국방 시설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거대한 성벽입니다.

그러나 그 건설 과정에서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천리장성의 배경

천리장성은 고려 현종 때부터 덕종, 정종에 이르기까지 약 1044년부터 1048년에 걸쳐 축조되었습니다.

그 길이는 약 1,000리(약 400km)에 이르며, 압록강에서 여수까지 국경을 따라 건설되었습니다.

 

백성들의 피해

천리장성의 건설은 대규모 노역과 자원을 동원해야 하는 방대한 사업이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농민이 이 공사에 동원되었고, 이로 인해 농사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농경지를 떠나 장성을 건축하는 일이 그들의 생계를 심각하게 위협했으며,

장기간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역사적 기록]

고려사와 같은 역사적 문헌은 천리장성 축조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공사 기간 동안 농업 생산이 줄어들고,

이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천리장성의 영향

천리장성의 축조를 통해 고려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력을 높였지만,

그 대가는 백성들의 희생이었음이 명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 덕분에 고려는 비교적 안정된 국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11세기 초 고려의 북쪽 변계(邊界)에 쌓은 것으로, 여진족과 국경을 이루었던 성이다.

총길이 1천여 리의 석성(石城)이며, 높이와 두께는 각각 25척(尺)이다.

역사적 배경

당시 고려의 경계는 서북방면에서는 압록강이 자연경계를 이루어왔고,

동북방면은 궁예(弓裔)의 관할관도였던 패강13진(浿江十三鎭)의 동북한계인 정평(定平)까지였다.

그러나 압록강구와 정평을 잇는 중간 내륙지역은 미한정경계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에 성책을 축조함으로써 국경선이 됨과 동시에 두 지역의 분리기능을 취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장성의 축조가 가능했던 것은 변계에 살고 있는 여진족들이

아직 정치적으로 미숙해 마을단위로 산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천리장성에 대한 고려의 인식은 국경선으로서의 의미 외에,

여진족 및 거란족에 대해 고려는 문화적·혈통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우위에 놓임으로써 이들과 혼효(混淆)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화적 구분선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내용

천리장성의 축조는 1033년(덕종 2) 8월 왕이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해

북쪽 변계에 관방(關防)을 처음으로 쌓게 한 데서 비롯된다.

위치와 범위는 서쪽으로 서해안에 있는 옛 국내성(國內城 : 義州)

경계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동쪽으로는 지금의 의주(義州) 지역인 위원(威遠)·흥화(興化)·정주(靜州)·영해(寧海)·영덕(寧德)·

영삭(寧朔)·정융(定戎)·영원(寧遠) 및 그 부근의 평로(平虜)·맹주(孟州 : 지금의 평안북도 맹산),

그리고 삭주(朔州)·운주(雲州 : 지금의 평안북도 운산)·안수(安水 :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

청새(淸塞 : 지금의 평안북도 희천) 등의 13성(『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절요』는 14성이라 함)을 거쳐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永興) 지역인 요덕(耀德)·정변(靜邊)·화주(和州) 등의 3성에 연결되어 동쪽으로 바다에 이어진다.

천리장성의 고유명칭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속칭 만리장성이라 했다는 것이고,

현재는 흔히 고려장성 또는 고려의 천리장성이라 불리고 있다.

축조목적은 동북방면의 여진족, 서북방면의 거란족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국초 이래로 고려는 이들 방면의 방비를 위해 각 요새지에 성책을 쌓아온 터였다.

특히, 1014년(현종 5)에서 1030년 사이에는 동서북 양면의 요새지에 부분적으로 성책을 쌓아왔다.

즉, 서북방면 변계에는 용주(龍州)·철주(鐵州 :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안의진(安義鎭 : 지금의 龜城)·

청새진(淸塞鎭 : 지금의 희천), 그리고 지금의 의주인 위원진(威遠鎭)·인주(麟州)·영덕진(寧德鎭) 등의 성과,

동북방면 변계에는 의주(宜州 :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군 德源)·영평진(永平鎭 : 지금의 永興으로 추정됨.)·

요덕진(耀德鎭 : 지금의 永興)·상음현(霜陰縣 : 지금의 安邊)·현덕진(縣德鎭 : 지금의 永興)

·용진진(龍津鎭 : 지금의 文川) 등의 성을 보축(補築) 또는 신축하였다.

따라서, 천리장성의 축조는 이미 현종 때 쌓은 북변의 성진(城鎭)에 대해

1033년에 비로소 관방을 설치하는 연결작업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서북방면의 14개성과 동북방면의 3개성은 고려 변계의 요새지로서 군사상의 기능 뿐 아니라,

관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들 관성(關城)이 매우 중요한 축조물이었다는 사실은 다음의 대응으로써 더욱 분명해진다.

즉, 유소가 관방을 축조할 때 거란은 우호를 위한 대로(大路)를 봉쇄하는 행위이며,

목채(木寨)를 세워 기병을 방비하려는 행위로 힐책하였다.

실제로 관방을 쌓을 때 거란병의 방해가 있기도 하였다.

이에 반해 덕종은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관성을 개척한 수고를 위로해 유소에게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고 한 데서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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