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 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625 사변시 유엔군으로 참전국이였던 국가들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미국, 캐나다
필리핀, 타이(태국),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콜롬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터키,
6.25 사변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된 전쟁이었다.
전쟁기간 동안 양측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이나 넘나들고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하였다.
6.25 전쟁은 민족전쟁인 동시에 '침략전쟁'이며 '이념전쟁'의 성격을 내포한 사변이었다.
이 사변은 북한정권이 남북한 내부의 민족갈등 속에서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려고
구상한데서 비롯되고 또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한국정부를 타도하고
대신 통일된 공산주의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여 개시된 전쟁이었다.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내 냉전은 더욱 고조되었고,
북한 정권이 무력으로 남침함으로써 냉전이 열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침략 준비과정에서 김일성 등 북한지도부는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과 긴밀하게 협의하였고
장비와 인력지원은 물론 전쟁개시 동의까지 받아내었다.
북한은 남침 직후 평양방송을 통해 남침사실을 은폐하면서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북한군의 남침은 조국강토를 순식간에 피로 물들게 하였고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한 한국군은 각 지구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의 남침이 개시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최초 전황을 보고 받고 곧 긴급명령을 하달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였다.
한국정부는 주한 미국대사 무초를 통해 시급히 필요한 탄약을 지원해 주도록 요청하고,
주미대사 장면을 통해 유엔에 지원을 호소하였다.
북한군은 최초 속전속결로 남한을 공산통일 한다는 침략목표를 수립하였으나,
유엔군의 참전으로 상대적인 전력의 우위를 상실하였다.
이 시기 북한은 남한 점령지에 인민위원회를 두어
소위 '민주개혁'을 강제하고 주민들을 전시 동원 체제 하에 편입시켰다.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9월말, 사변발발 97일 만에 실지를 되찾고 전전(戰前) 현상을 회복하였다.
이어 맥아더 장군은 국경선부근에서는 한국군만을 운용해야 한다는 제한 사항마저 제거하고
모든 부대로 하여금 압록강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이 혜산진을 점령한 상황에서
중공군이 대거 개입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 번 크게 바뀌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3차 전역 이후 한계점이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미국 역시 내부적으로 정전 압박을 받아 다른 해결책을 강구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밀리게 되자
1950년 말경부터 내부적으로 정전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유엔군과 '조 · 중연합군'은 1951년 6월 한반도문제를
더 이상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협상에 의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군사적인 승패가 아닌 정치적 타협으로 원인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하고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에 들어갔다.
그러나 최소 6주 정도면 타결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였고 매 의제마다 장기간 설전을 벌였다.
1953년 1월에 이르러 미국의 아이젠하워 신임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확전주장을 일축하고 공산군에
정치 · 군사적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휴전에 임하도록 압박하였다.
이 즈음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이 발표되면서 휴전회담은 급진전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심각한 정치적 대립을 겪었고
'이승만 제거계획'이라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휴전협정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 · 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 · 경제원조,
그리고 한국군 증강 등의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와 같이 6.25 발발 중에 진행되었던 휴전회담은 사변이 발발된 지 3년 1개월 만에,
회담이 개시된 지 24개월 17일 만에 마침내 북한군, 중공군
그리고 유엔군의 미군 대표가 각각 휴전협정을 서명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출처] 6.25 전쟁 원인과 기간 및 참전국은?|작성자 여가싶행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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