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명구

너는 선물처럼 나에게 왔다

너는 선물처럼 나에게 왔다

  

 

어둑한 비 먼저 해를 재촉하는데
산 깊어도 종소리는 울려 퍼진다
꽃향기 연이어 은은히 스며오고
버들 그림자 겹겹이 드리웠구나
오리는 물을 만나 기뻐 노닐고
제비는 진흙 물고 게을리 난다
봄구름은 또한 일이 많기도 해라
누굴 위해 검고 희게 단장하는가

 

雨暗先催日 우암선최일
山深不礙鍾 산심불애종
花香連淡淡 화향연담담
柳影羃重重 류영멱중중
得水鳧兒喜 득수부아희
含泥燕子慵 함니연자용
春雲亦多事 춘운역다사
黑白爲誰容 흑백위수용

 

- 서거정 (徐居正, 1420~1488), 『사가시집(四佳詩集)』 권31 「또 전운을 사용하여[又用前韻]」

  
해설

   지금 시인은 산길이나 들길이 이어진 언덕 어디쯤에 있습니다. 서서히 비구름이 밀려들며 일몰을 재촉하는 황혼 무렵입니다. 순간 정적을 깨고 울리는 산사의 종소리, 그 만종의 여운이 오래오래 산중에 메아리칩니다. 햇빛을 머금고 피어난 꽃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맑은 향기를 보내오고, 버들은 실가지들을 그늘로 드리우며 아름다운 봄의 풍경으로 서 있습니다. 그때 모두가 기다리던 단비가 선물처럼 내립니다. 덕택에 오리는 불어난 물 위에서 마냥 기뻐 춤추고 제비는 물기 머금은 진흙을 물고 가서 가족을 위해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햇빛과 비의 축복을 동시에 존재자들이 받을 수 있는 건, 검고 흰 옷으로 바꿔 입으며 단장하는 구름 때문입니다.

 

   이렇듯 시인은 하늘과 대지 사이에 햇빛과 비의 축복으로 생동하는 존재자들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생명에 대한 외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느낀 자연은 오늘날처럼 지배의 대상이나 에너지원으로 보는 자연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죽는 ‘생활세계’로서의 자연입니다. 또한 이곳은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귀기울여야 자신을 살짝 ‘열어 보이며 다가오는’ 존재자들이 공존하는 경이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경이의 세계를 하이데거(Heidegger)는 단지 속의 포도주를 예로 들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포도 속에는 햇빛의 따사로움과 하늘의 비나 이슬을 받아들인 대지의 자양분과 그 그늘이 깃들어 있고, 그것을 돌보고 거둔 이의 땀방울과 수없이 오고 갔을 들길의 발걸음이 배어 있으며, 시간의 숙성과 바람의 숨결이 스며 있습니다. 또한 단지는 그 모든 존재를 품은 포도를 다시 제 가슴에 품고 무수한 계절의 무게를 감내하였을 터이므로, 포도주를 잔에 따를 때 사실 우리는 단지에 있는 포도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에 깃든 하늘과 대지를 선물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이로움을 아는 이는 ‘단지에 담긴 포도주를 따른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가 포도주를 선사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이데거는, 우리가 포도주를 마실 때 가져야 할 태도는 바로 존재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정보화시대를 숨가쁘게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은 어떻습니까? ‘들길에서 떡갈나무와 인사’하다가 ‘나뭇가지에 숨은 새를 발견하고서 그 자태를 감상하느라 시간이 멈추고 생각이 멎던 특별했던 교감’은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요즘은 함께 산책을 나가도 ‘경이의 근본기분’으로 자연을 만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들을 이름과 분류와 효용으로 파악하며 그들에 대한 지식정보를 건조한 ‘잡담’과 ‘호기심’으로 소비할 뿐입니다. 지식정보는 많을수록 자랑이 되고 없으면 위기감이 느껴지는 세상입니다. 그래선지 갈수록 우리는, 여기에 적응 못하면 폐기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밤낮으로 모니터와 스마트폰과 TV의 불을 밝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럴수록 부품화되어 가는 존재로서의 공허와 진정한 내 존재가치의 상실이라는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질곡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하이데거는 ‘매순간 존재자들이 고지해오는 존재자체의 소리에 귀기울여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면 존재자들이 어느 순간 말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존재의 속살을 기쁨과 경이로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진리’의 깨달음을 류시화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이름 없이 여뀌의 존재에 다가가는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여뀌와 나 자신이 같은 존재라는 것을. 여뀌도 나와 똑같이 물을 필요로 하고, 바람에 흔들리고, 서리에 몸을 움츠린다는 것을. 인간과 식물이라는 구분을 버리면 우리 모두가 같은 생명이 흐르는 하나의 통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매순간 모두에게 축복의 ‘선물을 받고 있는 존재’이며 나도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행복감 속에 영혼의 ‘충만’과 ‘풍요’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글쓴이이기찬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고전◈명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뭐 먹고살지?  (0) 2020.03.04
아버지의 마음  (0) 2020.02.15
새해 다짐  (0) 2020.01.29
우리의 노래  (0) 2020.01.22
비와 세월의 이야기  (0) 2020.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