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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心에젖어

초봄에 관한 시 모음



초봄에 관한 시모음 3)


초봄의 짧은 생각     /신경림
-영해에서


바닷바람은 천리 만리
푸른 파도를 타고 넘어와
늙은 솔숲에서 갈갬질을 치며 놀고
나는 기껏 백 리 산길을 걸어와
하얀 모래밭에
작은 아름다움에 취해 누웠다
갈수록 세상은 알 길이 없고




초봄 오시네      /차영섭


오시고 계실까
잠드셨을까
오신다는 소식은 접했으나
아직 깜깜 무소식.


저 산 너머 남쪽 나라
땅속에서 파릇파릇
얼굴 내밀고 두리번거리실까
봄이여! 희망이여!


님 오시는 길 행여 거칠까 봐
구름이 마중 나가
안개로 물 뿌리시고
미끄러운 길 녹이나니,


산수유 진달래 앞장 세워
사뿐사뿐 꽃신 신고 오소서
오시어, 슬픈 사람에게 기쁨을,
막막한 사람에게 희망의 빛을 주소서!




초봄        /송길자


겨우내 헝클어진 산수유 울타리에
신행 온 햇살들이 입김들을 나누는 날
북성산 냉이 돌나물 봄을 살짝 엿본다


개나리 진달래꽃 신접 난 담장 아래
보라빛 목련 가지에 맑은 바람 걸어주고
작약순 흙을 비집고 빨간 촉수 내민다






초봄이 오다     /하종오


산수유 한 그루 캐어 집에 옮기려고
산에 가만가만 숨어들었다
나무는 뿌리를 밑으로 밑으로 내려놓았겠지
자그마한 산수유 찾아 삽날을 깊숙이 꽂았다
이제 한 삽 뜨면 산에게서 내게로 올 게다
겨울 내내 집 안은 텅 비고 날 찾아오는 이 없었어
이제 마당귀에 산수유 심어놓고
그 옆에서 꽃 피길 기다리면
이 산이라도 날 찾아오겠지
삽자루에 힘을 주어도 떠지지 않아서
뿌리 언저리 손으로 파헤쳐보았다
산수유는 뿌리를 옆으로 옆으로 벌려놓고 있었다
나는 삽날 눕혀 뿌리 밑을 돌아가며
둥그렇게 뜬 뒤 밑동 잡고 들어올렸다
한 그루 작은 산수유 실뿌리 뚜두두둑 뚜두두둑 끊기자
산에 있던 모든 산수유들 아픈지 파다닥파다닥
노란 꽃망울들 터뜨렸다




초봄의 귀밑머리      /김지향


방금 머리 내민 봄
햇빛을 만져본다
빛꼬리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
풀밭에 뒹군다
햇빛의 발이 콩.콩,콩,
자국을 찍는 풀잎마다
연두빛 얼굴이 된다
봄의 빛은 발이 간지럽다
(손으로 움켜잡으면
몸이 가루되어 먼지처럼 날리지만)
햇빛이 빗금을 그은 곳마다
아지랑이가 죽어버린다
아지랑이 뒤에 머리를 숨긴
풀이 쏘옥. 쏙 혀를 내민다
보들한 바람에
파란 혀를 날름대는 풀
초봄의 귀밑머리가 내 뺨에서
파르랗게 나팔댄다.


초봄      /반기룡


겨우내 동면하던
봄기운이 몰려나와
이 골목 저 골목
매파媒婆처럼 다니더니
어느새
푸른 물감을
온 들판에 풀어놨네




초봄 앞에서     /조남명


어김없는 봄기운은
숨은 얼음장을 녹이고
냉기를 온화하는데
꽃샘추위야 어찌
자연의 섭리를 당할 수 있으랴
암토暗土에서 솟아오르는
여린 몸짓들
그 활기찬 생명력
숲 속엔 꽃, 나무의
숨소리 거칠고
땅속 생명은 요동친다
눈 속 복수초는 핀지 오래고
개울물 소리에
버들강아지는 솜털 눈을 부릅뜨는데
봄은 이미 여인 치맛자락에 와 있었네.




이른 봄      /書娥 서현숙


꽃샘추위가
제아무리 기승부려도


추위 넌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할 거야


머지않아 나뭇가지에
꽃은 피어나
새는 앉아 노래 부르고


한강의 얼음물은
졸졸 흐르고


움츠린 어깨 펴고
봄을 찾아가리라.




첫봄의 향기     /박종영


누구나 처음의 경험은
세월이 흘러도 오래 기억되고
그것에 매달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그리움을 즐긴다


세상일이 그러려니 해도
어두운 일이거나 밝은 일도
지나고 보면 모두 흘러간 물결처럼 아득히 멀다


사람의 생각은 시간을 재며 분별하는 것이어서
그보다 더 나은 일이거나
그때보다 더 즐거운 일이었을 때
지나간 일은 신기루 인양 사라지는 망각의 순리를 갖는다


무릇 나무는 소중하게 피워내는 꽃을 기억하지 못해
꽃이 지더라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슬기롭고 경이로운 인내가 틀림없다


첫봄의 향기는 아무도 모르게 날아와
겨우내 삭막해진 대지 위에 환한 불을 지핀다


그 꽃불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
고요한 침묵을 깨우며 흔들리는 풍경으로 고운 날이 즐겁다.




이른 봄      /김정택


삭풍이
떠난 강가
갈대는 홀로 섰고


갯버들
옹알이에
햇살들 모여 앉아


잠자는
봄 처녀들을
깨우느라 바뿌다.




배달된 초봄 /정찬열


살갗에 부딪히는
쌀쌀한 바람이
따스한 햇볕을 등에 업고
봄기운을 집착하며 걷는 길
새싹의 운율이 들려온다.


가만히 느끼며 만지는 햇살
온화한 미소를 남겨 놓고
수줍은 듯 구름 속에
슬며시 몸을 낮춘다.


흔들리는 가지의
품은 흔들림의 미소에
한걸음 달려온 언덕
이마에 달라붙는 머리카락


일렁이는 바람이
어깃장을 놓을 무렵
배달하는 실바람의 봄소식은
감추어진 봄 햇살에 어기적거린다.




이른 봄      /이규리

그 분하고 같은 된장찌개에 숟갈을 넣었을 때

그렇게
아찔할 수가 없었다


냄비 안에서 숟갈이 부딪혔을 때
그렇게
아득할 수가 없었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딩딩 종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이것이 끝이라 해도 끝 아니라 해도
다시 된장찌개에 숟갈을 넣었을 때
하얗고 먼 길 하나 휘어져 있었다


같은 아픔을 보게 되리라 손가락이 다 해지리라
어떻게 되든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곳으로 한 순간이 다가와 연(緣)을 두었고
슬픔을 결심하게 하였으니
지금도 아련히 더듬어 가 보는 그 햇빛 속
수저 소리 흐릿하게 남아 있던 그 점심나절에
내 일 모르듯 벙글던 흰 꽃들 아래에




초봄         /정재학


나무에 죽은 새들이 피어 있었다


그때 아름다움이 없던 것은 아니나
‘아름다움’이라는 글자가 없었다


새들이 열매들을 뱉어 내었다
붉은 동그라미들이 떨어졌다


태양 몇 개가 튀어 올랐다




조춘(早春)      /들샘 정해각


햇볕제자리 찾아와
머물다 간 자리에
움트는 소리
얼었던 땅에 한기 걷히고
아지랑이 기지개 펴 일어선다.


양지바른 땅에
기죽은 듯이 움츠려 있던
생명체들이
깊은 겨울잠에서 깨여나
눈 비비며 얼굴을 살며시 내민다.


까치 한 쌍이 분주히 삭정이 나르고
새 보금자리 설계하며
시내물가 큰 버들강아지
솜털 곤두세우고
이른 봄날을 맞는다.




겨울과 봄의 교차로에서     /藝香 도지현


무슨 날씨가
청승맞게도 비가 이렇게 내릴까
그렇지 않아도
추위는 가시지 않고 음산한 날씨에


마음은 침잠해
심연에 갈아 앉아 떠오르지 않아
이대로 질식해서
어느 다른 세계로 갈 것 같은데


훈풍이 불어오다
동장군의 위세에 눌려 벽 뒤에 숨고
동장군은 따스한 바람으로
조금씩 조금씩 녹아가며 스러져 간다


가야 하는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가야만 하고
와야 하는 것은 끝내 오게 되는 것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기에……




초봄에 이변 정취     /정찬열


설한풍 부는 겨울
예측 못 한 비가 내리고
오십 년 만에
강추위 찾아들어
봄의 길목은 하얀 세상 되었다


오는 봄 화들짝
놀라서 달아나지만
절기에는
당하지 못하는지
내의를 벗어 버리고 나들이 가던 날


양지바른 연못에는
갓 태어난 어류 떼 물결에
지나가든 두루미의 염탐함에
애꿎은 키조개
길을 내는 나들이에
새봄을 갈구하는 미물이 희생된 초봄


세설(細雪)이
바람 따라 날리는 날에
매화꽃은
초라한 눈웃음으로
동백꽃을 따라 웃지만
아직은 설한풍(雪寒風)이 함께하잔다




산골짝의 이른 봄     /홍대복


주인 없는 외양간 기웃대며
산자락 넘나드는 바람 난 샛바람의 외출


덩달아 씨 강냉이
처마 밑에 매달려 한가롭게 그네 타고
곳간의 잡동사니 잠꼬대가 드높다


실눈 뜬 누렁이 일광욕이 여유롭고
가파른 자갈밭에 늙은 황소 쟁기질 버겁지만


산골짝에 찾아든 또 한 해의 이른 봄은
새소리, 워낭 소리, 부지런한 농부가가 정겹다




초춘初春      /나태주

대숲에 성근 싸락눈발은
먼 나라에 사시는 당신의 자취.

지층밖 구천에서부터
길 채비해 오시는 기별.

아, 이게 얼마만인가
댓잎마다마다에
달뜨고 영그는 생각,
생각들.

저만큼 엄동을 가르며
오다 말고 오다가 말고
차마차마 잦아드는
안타까운 이 소식아.

아직은 초봄이라
당신의 체취
이마에 시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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