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 / 이시영
봄면댁 울고
떠난 외로운 집터에
올해도 복사꽃
무더기로 피어
난분분
난분분
아랫도랑에
자욱히 떠 흘러가겠네.
- 이시영,『아르갈의 향기』(시와시학사, 2005)
복사꽃 핑계 / 복효근
구룡계곡 복사꽃 피는 날엔
출근하기 싫어서
어찌할 도리 없어
말짱한 배라도 아프고 싶었다
- 복효근,『꽃 아닌 것 없다』(천년의시작, 2017)
복사꽃 / 송기원
갓난애에게 젖을 물리다 말고
사립문을 뛰쳐나온 갓 스물 새댁,
아직도 뚝뚝 젖이 돋는 젖무덤을
말기에 넣을 새도 없이
뒤란 복사꽃 그늘로 스며드네.
차마 첫정을 못 잊어 시집까지 찾아온
떠꺼머리 휘파람이 이제야 그치네.
- 송기원,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랜덤하우스중앙, 2006)
복사꽃 / 이산하
전쟁에 패한 장수가 낙향해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마지막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꽃
복사밭 건너
논에 물이 들어가고 있었다.
- 이산하,『악의 평범성』(창비, 2021)
복사꽃 필 때 / 박기섭
그대 울려거든
봄 하루를 울려거든
비슬산 남녘 기슭 복사꽃 밭으로 가라
가서는 그냥 한 그루 복사나무로 서 있어라
그러면 될 일이다
까짓 울음 같은 것
분홍이든 다홍이든 치댈 만큼 치대서는
무참히 그냥 무참히 꽃 피우면 될 일이다
- 박기섭,『오동꽃을 보며』(도서출판 황금알, 2020)
복사꽃 / 송찬호
옛말에 꽃싸움에서는 이길 자 없다 했으니
그런 눈부신 꽃을 만나면 멀리 피해 가라 했다
언덕 너머 복숭아밭께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울긋불긋 복면을 한
나무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바람이 한 번 불자
나뭇가지에서 후드득 후드득,
꽃의 무사들이 뛰어내려 나를 에워쌌다
나는 저 앞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
사정했으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땐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데
나는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
- 송찬호,『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복숭아꽃 아래서 / 복효근
부풀은 처녀의 젖꽃판 같은
복숭아 꽃잎을 따서
갓 우려낸 작설 찻물에다 띄워놓고
한 손으론 잔을 받치고
지그시 기울이면
무릉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도색桃色도 이쯤이면 속되지는 않아서
이렇게 복사꽃 붉은 날엔
애먼 그리움 하난 있어도 좋겠다
차마 꽃잎을 따지는 못하고
눈으로만
벌써 녹빛이 물들도록 차를 마시는데
그것을 알고 복숭아
저도 뜨거워지는지 꽃잎을
그 젖꽃판 같은 꽃잎을 뿌려주네
- 복효근,『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달아실출판사, 2017)
복사꽃 아래 천년 / 배한봉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 아이가 걸어 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 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손가락으로 울컥거리는 목을 누르며,
나는 한 우주가 가만가만 숨 쉬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장 아름다이 자기를 버려 시간과 공간을 얻는 꽃들의 길.
차마 벗어둔 신발 신을 수 없었다.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가 되고 싶었다.
- 배한봉 외,『복사꽃 아래 천년』(문학사상사, 2011)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 김왕노
유모차에 유머처럼 늙은 개를 모시고
할머니가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간다.
바람이 불자 백 년을 기념해 팡파르를 울리듯
공중에 솟구쳤다가 분분이 휘날리는 복사꽃잎, 꽃잎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가는 할머니의 미소가
신라의 수막새에 그려진 천년 미소라
유모차에 유머처럼 앉은 늙은 개의 미소도 천년 미소라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 천년 미소가 복사꽃처럼 피어나간다.
그리운 쪽으로 한 발 두 발 천년이 간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 앞에
지퍼가 열리듯이 봄 길 환히 열리고 있다.
- 김왕노,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천년의시작, 2019)
도원 / 김명인
초록이 간격을 좁히자 듬성듬성
뽀얀 주먹들 둥글게 내미는
그쪽이 고리인 줄 알고
허둥허둥 초여름 햇살들이 잡아당긴다
복숭아 나무 키 낮은 우듬지 위로 새 그림자 난다
복숭아 잎들은 너무 무성해
열매의 손바닥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저 문고리 당기고 누가 방 안으로 들어간 것일까
한때 수밀도 같았던 봄밤에 취해
난만한 복숭아꽃 빛으로 쓰던 부끄럼 깨나 있었겠다
도화도화 다 사위면 누군가의 우기로 이어지는 것
녹슨 테두리 닫고 구름 헤집던
낮달이 지환을 꼈다 벗었다 한다
마음의 문고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 매달려 있다
어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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