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주명희
어둡고 긴 터널 같은 겨울이 끝나고
기지개를 펴고
웅크렸던 몸을 쭉욱 뻗는다
길가에 온갖 풀과
산에 산에 꽃들이
서로 다투며 피어나고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려도
사방팔방 가득한 꽃무더기들
웃고 있었다
꽃들이 웃고 있었다
4월은 마치 스무살 봄처녀같다
한잎 두잎 떨어지는 꽃잎에
가슴 설레이고
따사로운 봄볕에
눈이 부신
세삼 살아있음에 감사한
계절이다.
봄이 운다 /황경숙
4월 곰배령에 폭설이 내린다
수줍고 담담한 신부들 같다
무거운 배낭에 털 신발을 신고
마음속 진동을 옮겨 놓은 눈의 두터운 갈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흰 계단을 밟아 오르며
엉거주춤 봄이라고 우기는데 바람이 마른 풀을 스친다
마침내 거대한 백색 바리케이드가 사라지면
흩어지는 입김 사이로 희미한 연둣빛 비린내에
누구라도 눈물 날 텐데
당신은 환절기 알레르기처럼 자주 잊으며 운다
山은 오르고 嶺은 넘어야 하는 것을
어쩌다 마음의 발목마저 삐었는지
오르지 않고 겨우 넘어서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그 누구의 슬픔도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놓아버린 것들을
자신에게 물어보았듯 내게도 물어본 적이 있다
누구에게나 봄이면 울던 곰배령은 있다
4월 /엄원태
밭모퉁이 빈터에 달포 전부터 베로니카 은하가 떴다.
봄까치꽃이라고도 한다. 베로니카 은하에서
연보랏빛 통신이 방금 도착했다. 워낙 미약하여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인근 광대나물 은하까지는
기껏 몇 십 미터이지만, 꽃들에겐 우주만큼이나
아득한 거리일 터.
산자락 외진 무덤은 잔등에 쏟아부어놓은 듯
토종 민들레를 뒤집어썼다. 노란 산개성단들은
산길 옆 양지꽃 은하수에도 가득하다. 무덤가 잔디밭엔
제비꽃 플레이아데스 성단이 떴다. 좀생이별이라고도
한다.
오늘은 탱자나무 울타리에 희고 둥근 꽃송이들이
가장자리를 환하게 밝히며, 게자리 프레세페 성단처럼
떴다. 이 외진 곳은 복사꽃이나 배꽃처럼 전폭적인
초거대 별무리들로 부터 수만 광년 쯤 떨어져 있어,
꿀벌 전령들도 어쩌다 힘겹게 들르는 곳이다
어느 봄날엔가, 당신이 까닭 없이 서러워서 홀로
들길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때, 저 외진 지상의
별무리들에 그렁그렁 눈물어린 눈길을 주었던가.
그래선지 오늘 내가 거기서 왠지 서러운 빛깔의
메시지를 전해 받는다. 슬픔도 저리 환하다.
사월의 엽서 /김경숙
어떤 꽃이든 영원함은 없다
자연에 순응하며 피고 지는 것을
꽃이 시든다고 서러워하지 말고
꽃잎이 전하는 사연에
마음 열어 둘 일이다
봄비에 꽃잎 젖고
춘풍에 꽃잎 날려도
사월의 봄볕아래
씨방은 튼실히 여물어 갈 테니
꽃이 시든다고 서러워하지 말고
꽃씨가 전하는 사연
마음에 고이 묻어 둘 일이다
사월 향기에 대한 기억 /강민경
봄, 여름으로의
완성을 재촉해대는
*소회(素?)는 맑은 햇빛 톡 쏘는
눈부신 사월의 향기입니다
묵은해 밀어내는
바람에 떨어져 쌓이는
하얀 배꽃
뒤돌아볼 새 없이 부푸는 몸,
꽃 시절 돌아보는
저 웅크림이
왜, 나를 돌아보게 하는지!
봄꽃 후다닥 피고지고
여름 푸른 숲의 무성함
가을 나뭇잎 갈아입은 때때옷
겨울 하얗게 쌓인 눈발 녹여낸 봄
계절에 익숙해야 할 순환이
어제오늘 일만은 아닌데
낯설다
아쉽다 하는 말 말
풍문으로 듣는
가뭇한
사월 기억의 향기 새록새록 피웁니다
*소회: 품고 있던 생각
4월의 사랑 /이종승
노란 개나리
황사에 고개 숙이고
졸고 있는 한때
나도 둘이서 어디론가 날고 싶다
커튼 사이로 찾아드는
빛을 죽이고 싶다
나를 떠난 빛을
약속 시간 지나감을
기다려보지 않은 사람은
내일을 모른다
가자 부서지기 위해 태어나는
아름다움을 위하여
4월의 은빛 햇살
그림이 되고 시가 되고
그리움이 되기 때문이다
4월 어느 맑은 날에 100퍼센트의 남자를 만나고* /안명옥
당신들이 나의 붉은 심장을 보여 달라고 자꾸 조르면
나는 나의 남자를 고백하고 싶어져
만나는 동안 다툰 적이 기억나지 않아
이승의 내 마지막 남자가 되길 원했어
고독이 고향이라는 내 남자는 말이 없어
나이를 먹지 않는 내 남자에게도 흠이 있어
그는 몸이 찬 게 흠이야
하지만 아침에 흥분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내 생각대로 내 생각을 살아주지
지루한 삶인데도 슬픔 없는 표정이야
그런 날이면
배꼽에 공기를 더 많이 흡입해주곤 해
완벽한 그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
톱스타네 집에 책 한권이 없다던 인터뷰처럼
바람을 넣어주니 다시 살아나는 내 남자
그런 내 남자와 헤어지는 건
그는 내 아기를 만들어 줄 수 없어
속세에 살면 자식 낳고 사는 방식이 옳은 것
온전한 것이 없는 건 문 안이나 문 밖이나
그가 오고난 후나 오기 전이나
실수를 해도 바로 잡는 법은 여전히 모르고
공기를 빼버리면 없는 남자와 마지막 사랑을 나누고
*하루키의『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의 제목을 변형함.
**하루키의 장편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빌려옴.
4월 /오세영
언제 우레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사월-바람이 분다 /석청 신형식
그 선배가 보고싶다
고상함은 독서에서 시작된다며
매일매일 책장을 넘기던 그의 바다
지나가는 소리가
쓸쓸함이 아니라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었는지
뒤늦게 알아버린 내일쯤
동백 둥둥 띄운
제주바다가 배달될거고
4월을 관통하는
그 공감각적인 봄바람의 모습과 함께
비워야 비로소 행복해지는 것이 있다면
미련, 집착, 그리고
스쳐가는 것들,
스쳐간 것들
미저 몰랐었던
그 쓸쓸할 것들을 다시 만난다면
시작과 끝은 같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야기 해주고 싶어서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찰싹대는 바다, 그 제주바다의 독서
책장 한장 넘기는대도
이렇게 바람이 분다
4월의 사랑노래 /정연복
긴긴 겨울의 끄트머리에
봄의 환한 얼굴 있듯
오랜 그리움 끝에
기어코 사랑꽃 피어나네
그리움 먹고 자란
사랑꽃 한 송이 피어나네.
4월이 되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면
나의 가슴도
연분홍 사랑으로 물드네.
걷잡을 수 없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진달래같이
오랜 시간 쌓이고 쌓인
사랑의 봇물 터지네.
4월의 밤 이야기 /박정대
나는 [목련통신]을 만들며
4월을 다 보냈네, 그리운 꽃잎들은
창문 밖까지 왔다 간 한 척의 낮달
두 폭의 바람과 함께 멀어져 갔네
4월에는 이야기가 있었네
그러나 가슴 아픈 이야기는 말하지 않으려네
4월에도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음을
알았네, 그
틈서리에 깃들어 사는 새들의 어둠
그러나 새들도 어둠 속
침묵의 주인은 아니라네
어둠만이 어둠을 알아보는
어둠만이 간절히 별빛을 꿈꾸는
누군가 자신의 상처를
기타처럼 연주하던
어둠 속 침묵의 노래,
오래된 4월의 밤 이야기
사월의 거리 /조순자
꽃피는 사월이 오면
나는 해맑은 꽃봉오리 붓을 들고
꽃바람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대애게 긴 편지를 썼다오.
미안하다고 멋쩍은 웃음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꼭 돌아올 것 같아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듯
아픈 자를 위해 기도하듯
그렇게 애태우며 그대를 기다렸다오
오
목련화 아름답게 핀 사월의 거리
벚꽃 빛나는 가로수 꽃길을 지나
개나리 노란 꽃길을 따라
말없이 떠났던 그대가 돌아오네요
희망의 태양이 빛나는 사월의 거리
새들은 공중에서 노래하고
꽃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빛나고
그대와 나의 뜨거운 사랑은 아픔을 묻어두고
사월의 거리에서 빛나네요
사월 /권경업
내 마른 품안
버석이는 된비알
짝 찾는 메꿩소리
어린 날 연서(戀書) 같은
몽글몽글 벙그는
연둣빛 장당골
4월 햇살 /김덕성
아주 맑고 깨끗한 미소
간지럼 피며 내려와
살짝 볼에 입맞춤하는 아침햇살
정의롭게 살라고
활기를 북돋워 주며
안아 주듯이 포근하게 감싸주는
사랑의 손길
꽃도 잎사귀도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4월 햇살
내 임의 품안 같아라
4월을 보내며 /향초 허정인
바람이
꽃잎 물고 다니더니
밤새 꽃비로 내렸구나
산길에서 밟히던
꽃잎들이
들길에서도 밟히네
사월아!
꽃으로 곱던
사랑
꽃잎 쏟아 낸
네 이별도
연둣빛으로 참 곱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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