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문신 학봉(鶴峯) 김성일이 1579년(선조12)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史)로 갔다가 그해 겨울 명천(明川)의 객관에 묵으면서 지은 시이다. 학봉이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1514~1547)의 유산시(遊山詩)를 읽은 것이 이 시를 지은 직접적인 동기이다. 금호의 유산시는 전하지 않지만, 그가 지은 유산기(遊山記)를 통해 칠보산을 보고 느낀 감흥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금호는 1539년 회령 판관(會寧判官)에 제수되어, 임기가 끝나는 1542년(중종47) 3월 귀경 도중에 칠보산을 유람하고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를 지었다. 칠보산은 함경북도 명천군 상고면에 있는데, 백두산 화산대가 마천령산맥과 함께 달려 동해안에서 산지로 솟아나온 것이다. 금호의 칠보산 유산과 그 유산기는 후대에 전개되는 칠보산 유람풍조의 서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뒤를 이어 칠보산을 유람한 문인들은 대부분 금호와 함께 칠보산을 거론하였으며, 더욱이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칠보산도(七寶山圖)’가 꾸준히 제작된 것 역시 금호의 유산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결국 칠보산의 기괴한 바위와 봉우리, 동굴, 골짝 등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칠보산의 승경을 온 나라에 알리고자 한 그의 의도가 어느 정도는 이루어진 셈이다. 학봉 역시 명천 객관에서 금호의 유산시와 더불어 유산기를 읽었을 것이다. 먼저 지금 자기가 있는 이 지방에 칠보산이 있음을 환기시켰고, 칠보산의 웅장하고도 신령스러운 형세와 더불어 금호를 드러내고 그가 행했던 유산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홀로 품은 그윽한 기약을 실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담았다. 문집과 연보를 살펴보면, 추위와 어사의 공무 때문에 칠보산을 직접 유람하지는 못한 듯하지만, 금호의 시문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위안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학봉이 말한 그윽한 기약은 지금에 와서 더욱 절실하다. 금호는 유산기에서, 향후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리산에 심심함을 느끼고 금강산에 물릴 대로 물려서 칠보산으로 발길을 돌릴 것이라고 기대 섞인 예언을 하였다. 한창 진행되고 있는 남북교류, 북미협상이 결실을 맺는다면 개성공단-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으랴. 내 두 발로 금강산을 넘고 칠보산, 개마고원, 백두산을 밟고 싶은 것이 나의 첫 번째 그윽한 기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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