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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心에젖어

목필균 詩모음

<1>-12월의 기도/목필균-
 


마지막 달력을 벽에 겁니다.
얼굴에 잔주름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마음도 많이 낡아져가며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세상살이
일 초의 건너뜀도 용서치 않고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
여기다 풀어놓습니다.


제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으로 가는 마지막 한 달은
숨이 찹니다.


겨울 바람 앞에도
붉은 입술 감추지 못하는 장미처럼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 주는 굵은 나무들에게
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추종하는 신은 누구라고 이름짓지 않아도
어둠 타고 오는 아득한 별빛 같이
날마다 몸을 바꾸는 달빛 같이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기도로 12월을 벽에 겁니다.


<2>-1월에는/목필균-
 


첫차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설레고,
어둠 털어 내려는 조급한 소망으로
벅찬 가슴일 거예요


일기장 펼쳐들고
새롭게 시작할 내 안의 약속,
맞이할 날짜마다 동그라미 치며
할 일 놓치지 않고 살아갈 것을
다짐하기도 하고요
 

각오만 해 놓고 시간만 흘려 보낸다고
걱정하지 말아요
올해도 작심 삼일, 벌써 끝이 보인다고
실망하지 말아요
 

1월에는
열 한 달이나 남은 긴 여유가 있다는 것
누구나 약속과 다짐을 하고도
다 지키지 못하고 산다는 것
알고 나면
초조하고 실망스러웠던 시간들이
다 보통의 삶이란 것 찾게 될 거예요


<3>-9월/목필균-

 

 

태풍이 쓸고 간 산야에
무너지게 신열이 오른다


모래알로 씹히는 바람을 맞으며
쓴 알약 같은 햇살을 삼킨다


그래, 이래야 계절이 바뀌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한 계절이 가는데
온몸 열꽃 피는 몸살기가 없을까


날마다
짧아지는 해 따라
바삭바삭 하루가 말라간다


<4>-4월에는/목필균-

 

 

축축해진 내 마음에
아주 작은 씨앗 하나
떨구렵니다
새벽마다 출렁대는
그리움 하나
연둣빛 새잎으로
돋아나라고
여린 보라 꽃으로
피어나라고
양지쪽으로 가슴을 열어
떡잎 하나 곱게 가꾸렵니다


<5>-잘 지내고 있어요/목필균-
                                      


그리움은 문득문득
잘 지내고 있어요?
안부를 묻게 한다.


물음표를 붙이며
안부를 묻는 말
메아리 없는 그리움이다.


사랑은 어둠 속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안부를 전하게 한다.


온점을 찍으며
안부를 전하는 말
주소 없는 사랑이다.


안부가 궁금한 것인지
안부를 전하고 싶은지


문득문득
잘 지내고 있어요?
묻고 싶다가


잘 지내고 있어요.
전하고 싶다.


<6>-엄마와 어머니 사이/목필균-

 

 

스물네 살 딸 시집보내고
친정어머니 되고
서른세 살 아들 장가보내고
시어머니 되었다


엄마와 어머니 사이
비탈진 품안으로
조금은 멀게 자리 잡은
자식들


진액 모두 빠져나간
텅 빈 거실에서
리모컨으로 들려오는
세상이야기


어머니 시절보다
엄마 시절이
더 힘이 있고


엄마 시절보다
어머니 시절이
더 둥글더라고


<7>-10월의 시/목필균-

 

 

깊은 밤
별빛에 안테나를 대어놓고
편지를 씁니다
지금,바람결에 날아드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느냐고
온종일 마음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 모를 서글픔이
서성거리던 하루가 너무 길었다고
회색 도시를 맴돌며
스스로 묶인 발목을 어쩌지 못해
마른 바람 속에서 서 있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지 아느냐고
알아주지 않을 엄살 섞어가며
한 줄, 한 줄 편지를 씁니다
보내는 사람도 받을 사람도
누구라도 반가울 시월을 위해
내가 먼저 안부를 전합니다


<8>-송년회/목필균-
 


후미진 골목 두 번 꺾어들면
허름한 돈암곱창집
지글대며 볶아지던 곱창에
넌 소주잔 기울이고  난 웃어주고
가끔 그렇게 안부를 묻던 우리


올해 기억 속에 너와 만남이 있었는지
말로는 잊지 않았다 하면서도
우린 잊고 있었나 보다
나리님도 어렵다는 살림살이
너무 힘겨워 잊었나 보다


12월 허리에 서서
무심했던 내가 무심했던 너를
손짓하며 부른다


둘이서
지폐 한 장이면 족한 그집에서
일년치 만남을 단번에 하자고


<9>-7월/목필균-

 

 

한 해의 허리가 접힌 채
돌아선 반환점에
무리 지어 핀 개망초


한 해의 궤도를 순환하는
레일에 깔린 절반의 날들
시간의 음소까지 조각난 눈물
장대비로 내린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폭염 속으로 무성하게
피어난 잎새도 기울면
중년의 머리카락처럼
단풍 들겠지.


무성한 잎새로도
견딜 수 없는 햇살
굵게 접힌 마음 한 자락
폭우 속으로 쓸려간다...


<10>-겨울나무로 서서/목필균-

 

 

나 이젠 서슴없이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갈까 해
고단한 허울 다 벗어놓고
홀가분한 가슴이 되는 거야


영하로 내려갈 수록
바람이 뼈대를 세우고
한 계절 온전히 견딜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부산한 세상 바람
단단히 걸어 잠그고
침묵의 동안거로 들어서는 내겐
겨울은 가장 평화로운 나라이다.


<11>-시월/목필균-

 

 

파랗게 날 선 하늘에
삶아빨은 이부자리 홑청
하앟게 펼처 널면
허물많은 내 어깨
밤마다 덮어주던 온기가
눈 부시다
다 비워진 저 넓은 가슴에
얼룩진 마음도
거울처럼 닦아 보는
시월


<12>-겨울 일기-함박눈/목필균-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은빛 속에 있습니다


깃털로 내려앉은 하얀 세상
먼 하늘 전설을 물고
하염없이 눈이 내립니다


오늘 같은 날에는
같은 기억을 간직한 사람과
따끈한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다면
예쁜 추억 다 꺼내질 것 같습니다


하얀 눈 속에 돋아난 기억 위로
다시 수북히 눈 쌓이면
다시 길을 내며 나눌 이야기들


오늘 같은 날에는
가슴으로 녹아드는 눈 맞으며
보고싶은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13>-7월, 담쟁이/목필균-

 

 

누구냐
내 마음의 벽을 잡고 올라서는 너는
7월 태풍, 모진 비바람 속에도
허공을 잡고 올라서는 집착의 뿌리
아득히 떠내려간 내 젊음의 강물
쉼 없이 쌓여진 바람벽을 기어오르는
무성한 그리움의 잎새
어느새 시퍼렇게 물든 흔들림으로
마음을 점령해가는 네 따뜻한 손길


<14>-가을비 속으로/목필균-

 

 

체온을 낮추고 있다
창문 가득 기웃거리는 빗방울


스치는 찬기로 오소소 돋는 소름
동공속으로 잠기는 우수


온기없이 견디는 밤에
신열이 오른다


따뜻한 목소리
서늘한 눈빛이
포근한 가슴이
만지고 싶다


출렁거리던 그리움
싸늘한 커피잔에 넘친다


추적거리는 비가
선명하게 그려낸 얼굴


맥박이 낮아지고
체온이 떨어지며
넘치는 그리움 속으로
온몸이 내려앉는다


<15>-낡은 기억 속으로 /목필균-
 


빵집


충무로 뒷골목 허름한 빵집
커다란 가마솥에 쪄낸 찐빵


유난히 예뻤던 언니를 쫓아다니는
남학생 여드름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손바닥만한 뜨거운 찐빵
한 입 베어먹었을 때 그 달콤한 맛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눈치 없이
쫓아다녔던 초등학생인 날 보고
언니는 엄마에게 비밀이라 했다


이젠 다 가버렸다
초로의 언니도 가고
까까머리 남학생 얼굴도 잊었지만
초겨을 찬바람 속에 서면
가마솥 찐빵 달콤한 팥 냄새
폴폴 눈앞에 어린다


출산


뒷골목 후미진 조산소에서
옆집 아줌마 허리 틀어잡고
어렵게 낳은 아들


전봇대마다 진통 삼키며
걸어서 찾아든 조산소
사우디에 가 있는 애 아범
원망할 새 없이
한 몸에서 두 몸 되는
탯줄 가르는 의식


말띠가 말띠를 낳아서
망아지가 된 그 아들이
어느 새
스물아홉 개 구슬을 꿰었다
시어머님 끓여주신
푸짐한 미역국 먹으며
기쁨으로 바라보던 그 아들이


여기저기 발 담그는 고단한
내 팔자 고스란히 닮으며
쉴 새 없이 쫓아오고 있다


검은 촌지


초임시절, 지도 보고 찾아가던 임지는
탄광촌 사북읍 고한리 고한초등학교
스물두 살 도시 출신 병아리 교사는
갑조, 을조, 병조, 삼교대로 일하는
막장 광부의 새까만 얼굴이 두려울 뿐이었다


탄광사고로 아버지 잃은 아이가 많았던 그곳
힘겨운 삶에 도태되어 마지막 재기의 불씨를
탄광에서 살리던 누더기 진 그들의 삶 속에도
선생님께 드렸던 촌지가 있었다
눈물겨워 거절할 수도 없었던 그 촌지는
명함만한 표에 적힌 ‘연탄 100장’


이제 무너질 대로 무너진 교권 앞에서
아득한 추억이 된 세상에서 가장 무거웠던 촌지 앞에
저절로 고개 숙여지는 뜨거운 정성이었다


회초리
 

동생과 싸우다 혼나던 날
난 앉아서 매 맞고
동생은 집밖으로 도망가서
엄마 기운을 다 빼고


일년에 한 두 번 맞았던
호된 매가 아파서 울면서도
'바보, 이따가 어떻게 들어오려고.'
도망간 녀석 걱정했는데


미련한 것은 바로 나였다고
화가 났을 때 그대로 맞고 앉은
내가 안쓰러워 더 미웠다던
엄마 맘 나중에야 알았으니
참 지금이나 그때나 난 바보다


산동네


십구공탄 연탄 두 장 양손에 들고
비탈진 산동네 기어오르던 겨울
 

동네 가운데 공동 수돗가는
매일매일 추위에 떠는 물통이 줄을 이었지
 

공동화장실 앞에서 발 구르며
학교 갈 시간에 쫓겨 울상짓던 그 시절
 

베트남 산 쌀 배급소에는
앞 다투다 지친 어머니가 앉아 있었지 


<16>-된장찌개를 끓이며/목필균-
 


멸치국물에 된장을 풀고
바지락 몇 마리
표고버섯 두 개
두부 몇 조각
간 맞추어 끓인다


바글바글 끓는 찌개로
밥 한 그릇이 행복한 것을


일찍 시집 간 딸이나
늦게 장가 간 아들이나
새끼들 낳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지지고 볶으며 사는
세상살이가 어디 만만하기만 할까


뚜껑을 열면 찌개 냄비 속같이
두부도, 바지락도, 표고버섯도
된장에 섞여서 하나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렇게
바글거리다 세상과 둥글게 어우러져서
혼자가 아닌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17>-갈대/목필균-

 

 

목숨의 길이로 내려온
기다림의 끝에서
한 줄기 바람에도
흔들렸다 나는.


하늘은 파랗게 날이 선
비수의 눈빛.
그 빛을 받으면
비명도 없이 쓰러지는 허리.


쓰러져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나를 향해
수없이 나부끼는
항변의 깃발들.


목숨의 길이로 내려온
그리움의 끝에서
한 줄기 눈물에도
흔들렸다 나는. 


<18>-가을 엽서/목필균-
 


입추를 넘어선 바람이
벚나무를 붉게 물들이네요
어느새
은행잎도 노랗게 물들어가고


내리막길처럼
가파르게 단풍드는 이즈음
몸살기는 없는지요


독감예방주사로 겨울을 준비하고
바바리코트를 꺼내듭니다


가을 들녘을 바라볼 여유는
사치였던 그 시절
커피 한 잔의 대화로 만족했는데


이제 주름진 세월 사이로
빠져나간 사랑의 느낌표들이
시린 손끝에 잡히네요


잘 지내고 있지요


<19>-여치 카페/목필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아홉 마디 구절리 길


정선 구절역엔
여치가 한창 열애 중이다


봄에도 겨울에도
벌건 대낮에도 깊은 밤에도
포란을 위한 황홀한 침실


신음소리 없이
끊어진 철로 옆에
부활을 위한 더듬이가 춤추고
힘살 박힌 뒷다리가
포개진 날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이별과 만남의 종착역
구절리역은 사라졌어도


거대한 여치 품속으로
타향 냄새 들여보내며
부활의 꿈을 판다


<20>-참스승/목필균-
 


꽃 이름만
배우지 마라


꽃 그림자만
뒤쫓지 마라


꽃이 부르는
나비의 긴 입술


꽃의 갈래를 열어
천지(天地)를 분별하라


몸으로
보여주는 이

 

<21>-봄비는 가슴에 내리고/목필균
 

그대가 보낸 편지로
겨우내 마른 가슴이 젖어든다.

봉긋이 피어오르던 꽃눈 속에
눈물이 스며들어, 아픈 사랑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겨울 일기장 덮으며,
흥건하게 적신 목련나무
환하게 꽃등 켜라고
온종일 봄비가 내린다.

<22>-연일 내리는 봄비가 차다/목필균


 
성급히 떠나보낸 한 시절이 젊음이었다고, 잃어버릴 것 다
잃고 난 빈터에 바람만 휘돈다. 닳고닳은 조약돌이 물빛으로
반짝일 때, 물살 급했던 지난 날 아픔쯤이야 행복인 것을. 민
들레 뿌리로 겨울을 나던 시절을 노랗게 피워내던 봄 향기도
홀씨되어 날아가 버리고. 종암동 제 1지구 재개발 아파트 건
축 현장엔 뼈대만 세운 방마다 어둠이 박혀있다. 깊은 밤,
찬비가 사선으로 기어드는 을씨년스러운 날들. 어둠은 그림
자 속에 제 그림자로 발 묶은 채 서성이고, 소리 없이 지는
꽃잎들. 빛 잃은 세상 속에 빗소리만 분분하다.

 

<23>-가을사냥/목필균-


멀미나는 도시.
아황산 가스에 시달린 가로수는
계절의 미각을 잃은채
제멋대로 나뒹군다.

이왕이면 싱싱한 가을을 잡자
이 찬란한 가을을 차지하기 위해
가을 사냥을 떠나는 거야
10월의 끝자락이 다가온다.

아름다운 경춘가도는
마지막 자기연출에 몰두한
산야가 감줄기에 발을 담근 채
수채화 붙 끝에 문혀질
최고의 속 색깔을 길어 올린다.

바겐세일이 필요없는 귀한 세상
두껍게 각질 된 일상의 껍데기 속에는
잊혀진 사랑이 새살로 돋아
코스모스로 피어난다.

만추의 가운데로 떨어지는
한 줄기 칼날같은 폭포를 맞으며
두 손 가득 너를 잡는다. 

 

 

 

 

<24>-법주사 풍경소리/목필균-

 

 

어깨 누르는 짐을 메고

법주사로 들어서는 길

 

뎅그렁뎅그렁

대웅보전 풍경소리 마중 나오고

청동미륵불님 내려다보신다

 

절에 자주 오지 못함을

죄스럽게 말하지 마라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문은 늘 열려있느니라

 

이승에 얼룩진 손과

불국의 문고리 잡으려는 손이

합장으로 마주 한다

 

비우려 해서 비워지면

버리려 해서 버려지면

속세를 등질 일이 무엇이랴

 

수만 개의 망상이

소멸되기를 바란다면

그도 욕심이라

 

무릎 끓어 올리는 절마다

비워지는 가슴앓이들

잠시 세상이 평화롭다

 

<25>-사랑을 정리하며-편지함/목필균-


이제쯤
엇갈리기만 하는 너를 정리해야겠다고
편지함을 연다

받은 편지함을 휘저어 보며
과장된 말들을 골라내고

보낸 편지함을 뒤져보며
이별의 예감들을 솎아낸다

이미 한 번 지워진 사연들이
줄줄이 잡혀와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는 지운 편지함

"선택된 메시지를 영구적으로 삭제시키겠습니까?"
예(Y), 아니오(N)

잠시 머뭇거리다
예(Y)를 누른다
다시 한번 가위질 당하는
나만의 이야기들

이제 영원히 놓쳐버린 것을
빈 눈으로 서성거려 보지만
가슴엔 미련이 선명하게 찍힌다


<26>-해월정*에서/목필균-


달이 먼저 말 걸었을까
파도 타고 출렁거리고 싶다고

바다가 먼저 말 걸었을까
오늘은 너를 품고 싶다고

하현달 누워 가는 밤에
소리 없이 오르는 달맞이 길

내려다보이는 바다에
속살거리는 은근한 달빛

내가 먼저 말 걸었다
그 달빛 품고
파도처럼 살고 싶다고

*해월정 - 부산 달맞이 길 위에 있는 바다가 보이는 정자

<27>-꽃 진 자리/목필균-


눈물짓지 말아요
하늘 향해 고고히 올려보던 눈빛도
지고 보니 별 것 아니었다고

눈부신 목련 잎새가
혼 나간 여인의 치마처럼
얼룩져 내릴 때

아름답다는 말이 얼마나
허무한 거짓이었는지

꽃 진 자리에 서서 바라보면
사랑도 눈물도 같은 말인 걸

 

<28>-강/목필균-

 

 

기울어진 만큼 내달리다가도

분에 넘치면 넘쳐지고,

메말라지면 목마른 대로

나누며 보태며 가는 길

언제나 네게는 끝이 없었다.

질러가지 못할 길은 돌아설 줄 알고

굽이치는 곳에선 핑그르르 여울지며

제 몸 깎아 자리 내어 준 산자락

허옇게 뿌리 보이면 그 상처

깊게 네 몸에 묻었다.

기울면 기운만큼 내달리며

넘치고, 목마른 사랑 다 품어 안고,

굽이치면 제 몸 부수어 모래톱으로

길을 열어

한세월 쉼 없이 흐를 수 있는

너처럼, 너처럼 살고 싶다

 

<29>-6월의 달력/목필균-



한 해 허리가 접힌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중년의 반도 접힌다
마음도 굵게 접힌다

동행 길에도 접히는 마음이 있는 걸
헤어짐의 길목마다 피어나던 하얀 꽃
따가운 햇살이 등에 꽂힌다

 

<30>-내 마음의 풍경소리/목필균-


오늘은 잠들기 전에
내 마음 속 풍경소리를 들어본다
지천명이 되도록 뜬눈으로 지켜보았을 나를

남루한 유년의 뜰에 패여진 상처에도
입술이 까맣게 타도록 혼자 일어서야했던
학창시절의 빈주머니에도
단 한번의 궤도 이탈도 허용치 많고
외길만을 고집하며 살아왔다

어린 나이에 시집가서 고된 삶의 고삐를 잡고
말띠 여자 팔자대로 살면서
남에게 눈물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은 소리없이 울고만다

허탈한 마음의 처마끝에서
그 적막한 하늘을 바라보았을
풍경의 맑은 소리에 물고를 튼다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은 맑은 소리가 오히려 서러운 오늘

잠들기 전마다 수없이 되뇌이던
불경 한 줄, 가슴에 선혈도 박혀있는데
우울한 물길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른다


 <31>-풀숲에 주저앉은 그/목필균-


기울어진 사찰 한 귀퉁이
풀숲에 주저앉아 수십 년
켜켜로 쌓인 채 세월을 익힌다

언제였는지
그도 하늘을 가리며
가슴에 불심을 새겼으리라

자비의 빛은 떠돌고
바람만 웅크리고 앉은 채
뼈마디에 이끼만 시퍼렇다

핏줄도 삭아진 채
벗겨져 버린 속내 끌어안고
풀려나간 시간을 갈무리하며
천수경이 구성졌을 그에게
바람 따라 곁에 있어 준
풍경소리가 눈물겹다

노숙의 헛기침 소리
부질없는 호흡만 이어가며
잡초만 무성하게 키우고 있다

 

<32>-비빔국수를 먹으며/목필균-


동대문 시장
옷가게와 꽃가게 사이
비좁은 분식집에서
비빔국수를 먹는다

혼자 먹는 것이 쑥스러워
비빔국수만 쳐다보고 먹는데
푸른빛 상추, 채질된 당근
시큼한 김치와 고추장에 버물려진
국수가 맛갈스럽다

버스, 자가용,
퀵서비스 오토바이가 뒤엉킨 거리
옷감 파는 사람과 박음질 하는 사람
단추, 고무줄, 장식품을 파는
크고작은 상점이 빼곡한 곳
가난과 부유가 버물려져 사는
동대문 시장

가족과 동료, 시댁과 친정
세월의 수례바퀴 속에
나와 버물려져 사는 사람들

새콤하고 달콤하고 맵고
눈물 나고 웃음 나고
화나고 삐지고 아프고
그렇게 버물려진 시간들
울컥 목구멍에 걸린다

 

<33>-물치항에서/목필균-


어둠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집어등 켠 오징어 배가
별빛처럼 반짝이는 물치항

산다는 것이
저리도 적극적이고
진지한 것을

어둠을 밝히며
파도 위에서 목숨을 낚는 것을

내게 다가온 사랑은
파도 속 헤매다가
난파되어 버렸는데

가끔은 아주 가끔은
다 놓쳐버린 빈 그물 속
아득한 기억으로
찌르르 다가온다

내일이면 다시 돌아갈 집처럼
밤이 지나면
물치항으로 돌아올 배처럼

떠났던 기억 속에서
다시 돌아오는 부메랑 같은
너의 흔적들

시월의 끝자락
바다는 속울음으로 뒤척이고
지워진 수평선 속으로
가을이 기울어간다

 

<34>-내가 꽃이라 하네/목필균-


눈부신 햇살이 나라고 하네
미움의 그늘도 지울 수 있고
힘겨운 땀도 거두어 줄 수 있는
금빛 눈부심이라 하네

라일락 향기도 나이고
보도블럭 틈새로
노란 꽃등 켠 민들레도
나라고 하네

천상천하 유아독존
세상을 찾아온 발걸음
금빛 햇살이며
꽃이 나라고 하네

채우고 채우고도 모자란 세상에
스스로 꽃이 되고
스스로 빛이 되라는
큰 스님 법문

내가 꽃이라 하네

 

<35>-석탑/목필균-


청빈한 그는
한번 걸친 옷 그대로
노숙한 세월이 얼마인지

욕심이 없어서
가진 것이 없었는지
가진 것이 없어서
욕심이 없었는지

홀홀단신 노숙의 바람
청태로 끌어안고

아이디도 없고
비밀번호도 없는
단단한 가슴
안으로 잠근 채

풍화된 사랑도
지우지 못할 정이었는지
한번 올라선 계단
침묵 그대로이다

 

<36>-동백꽃 그녀/목필균-


베란다로 들어선 겨울 햇살 하나 붙잡고,
겹동백이 곱게도 피었다.
꼭 다문 꽃봉오리,
참으로 여러 날 설레게 하더니
서서히 벙그러지는 붉은 입술,
그간 숨겨두었던 속 향기가 아른아른 보인다.

그녀의 동백꽃도 피었다.
가슴에 심어졌던
동백나무 자라서 담을 넘어서니
삐꺽 잠금쇠 여는 소리가 들렸다.
어긋난 사랑으로 아팠던 시간들이
자라서 붉은 꽃봉오리로 맺혔다.
그 꽃잎 하나하나 펴 보일 때마다
그녀는 눈부신 햇살을 잡고 일어서고 있다.
이젠 알 것 같다.
시들지 않고도 툭툭 떨어졌던 그 결별의 모진 몸짓을.

 

<37>-봄 편지/목필균-


가슴에 청진기 대고
네 심장소리 듣고 싶다

안개 같은 그리움
전해져 있는지

수없이 수신확인 하며
오늘도 금빛 햇살로
편지를 쓴다

진달래가 능선을 타고
달려오는 것처럼
너도 그렇게 왔으면..

 

<38>-3월/목필균-


햇살 한 짐 지어다가
고향 밭에 콩이라도 심어 볼까
죽어도 팔지 말라는 아버지 목소리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매지구름 한 조각 끌어다가
고운 채로 쳐서 비 내림 할까
황토밭 뿌리번진 냉이꽃
저 혼자 피다 질텐데

늘어지는 한나절
고향에 머물다 돌아가는
어느 날 연둣빛 꿈

<39>-난 지금 입덧 중-입춘/목필균-


하얀 겨울,
치마끈 풀어내고 살그머니
가슴에 작은 꽃씨 하나 품었다.

설 넘긴 해가 슬금슬금 담을 넘자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
토해도 토해도 앙금으로 내려앉는 금빛 햇살

매운 바람 속에 꼼지락거리던
꽃눈 하나 눈 비비고 있다.

<40>-낙엽/목필균-


묻지도 않았는데
몸으로 대답하네

때가 되면
무성했던 시절도 덧없더라고

새순으로 쑥쑥
올라오던 사랑 노래가
황토 장마에 쓸려갔는지

가지마다 품어안던
무성한 기억들이
뚝뚝 떨어져 간다고

지폐보다 더 소중했던
눈빛, 목소리, 미소가
바람따라 주름지는 날에

마지막 뒷모습이
아름답다고
아름다워서 눈물이라고
눈물이라서
가슴이 비워진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몸으로 대답하네

 

<41>-시월 담쟁이/목필균-


담장을 오르는 거미 손
여린 발끝이 뭉그러져도 오직
네 안으로 들어서는 길
옆으로 기어가는 게발로도
불쑥불쑥 올라서는 까치발로도
어려워 푸른 혀를 내밀며 간다
입 모양만으로도 알 수 있는
힘줄 솟는 무성한 안간힘
담장에 피는 푸른곰팡이도
햇살을 잡으면 눈이 부신데
한 여름 견디어낸 채찍의 상처로도
들어설 수 없는 너를 향해
우르르 쏟아 놓은 속울음
시월이 붉게 물든다

<42>-들국화를 만나면/목필균-



너를 바라보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아득히 사라졌던 기억들이
해마다 찾아와서
그림자 밟기를 하고

마음은 보내지 못하면서
보라색 손수건 흔들며
배웅하는 네 눈물 속에

올해도
가을은 소리 없이 깊어간다

 

<43>-함박눈 기다리며/목필균-


기왕이면 함박눈이 오라고
온 천지에 하얗게 눈발 흩날리면
그 고요를 지켜내기 위해
모두들 침묵할 거라고

시끄러운 세상에 두텁게 눈 덮이면
살면서 힘겨웠던 몸
가만히 누워 볼 거라고

깊은 속사정 몰라도
여기저기 멍든 자국 가려지는 날

그렇게 허물 감추고
다시 기운 내어 살아보자고

함박눈 기다리며
서성거리는 이즈음에는
나무들도 하늘을 쳐다본다고

 

<44>-바다에 간다기에/목필균-


바다에 간다기에
밤새 몰아쳐줄 파도를 생각했지.
내가 부딪치다 지친 세상 때문에
거대한 바위섬과 부딪쳐 나자빠지는
그 거센 파도의 도전을 그리워했지.

바다에 간다기에
하늘 가득 펼쳐질 갈매기의 노래를 생각했지.
내가 못다 부른 노래를 마음껏 불러주다
가고 싶은 곳으로 미련없이 날아갈 갈매기
그 자유로움을 위해 박수를 보내려 했지.

바다에 간다기에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을 거니는 연인을 생각했지.
내가 못 다한 사랑의 몸짓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바닷가의 낭만
그 사랑을 위해 편지를 띄우려 했지.

바다에 간다기에
파도에 실려온 예쁜 조개껍질을 생각했지.
내가 못 다한 수많은 이야기를
조개껍데기에 담을 수 있는 바다의 꿈
그 꿈을 위해 빈 주머니를 가져가려 했지

 

 

<<목필균 시인 약력>>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1995년 《문학21》신인상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원.
*시집『거울 보기』(우이동사람들, 1998년), 『꽃의 결별』(오감도, 2003년),

        『내가 꽃이라 하네』(2012),『엄마와 어머니 사이』(2015).
*수필집『짧은 노래에 실린 행복』(오감도, 2008년)

*서울숭인초등학교 교감

출처: 시 동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