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열차에 관한 시모음
마지막 열차를 타면 /(宵火)고은영
깊은 밤 거리
취기 오른 연인들의 흩어진 몸짓
불빛에 작은 포자로 흔들리는 점자들
"사랑하고 있어"
언제나 변함없이 오른손을 번쩍 들면
연인들 앞으로 경쾌하게 미끄러지는 택시
" 어디로 갈까요?"
"사랑의 숲"
끈적이는 그리움이 맴돌아도
존재하지 않고 갈 곳이 없는
내 그리움은 부재
이 늦은 밤
영등포역이나 서울 역쯤 가서
경적의 긴 나래를 풀고
칙칙폭폭 다가오는 마지막 열차를 타고
어느 이름 모를 간이역쯤 다다라서
계절 깊은 벌판 촉촉이 속눈썹 젖고
바람에 헐어버린 수수 대궁에
뻐근한 그리움이 한참 기다릴
나의 종착지는 어디쯤일까
고향 열차 /송목/이성구
산 넘고 바다 건너
끝없이 펼쳐지는 세상
행복과 기쁨 가득싣고
철길을 달린다
하염없이 차 창밖을 바라보는
젊은 여인 떠나버린 뒷모습 보며
잊지 못할 그리움에 젖네
만남과 아쉬움에 이별의 정거장
덜컹덜컹 달려간다
기적소리 멀어져 가네
기차를 타요 /이해인
우리 함께
기차를 타요
도시락 대신
사랑 하나 싸들고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서 길어지는
또 하나의 기차가 되어
먼 길을 가요.
기차는 떠나고 /김상미
기차는 떠나고
기차는 떠나고
강처럼 흐르는 레일 위로
꿈 같은 기차는 떠나고
꽃피는 걸 보려고
꽃밭에 앉아
거리, 저 멀리서 들려오는
혼잡한 발 소리
그리운 듯 막연한
사람들의 체취에
조금씩 더 쓸쓸해 오는 오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기차는 떠나고
기차는 떠나고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최서림
드디어 귀향 한다고
해방된 듯이 그대는 수다스럽고,
나는 부러워하면서도 왠지
쓸쓸하게 손을 흔들어 떠나보내네.
빈손으로 귀촌 한다고
쫓기듯 서울에서 빠져나간다고
낮달같이 희미하게 웃는 그대를 보내고
낙엽 진 거리의 플라타너스처럼 우두커니 서있네.
어딜 가나 인간 세상 안쪽인데,
무한경쟁의 갈퀴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틈으로 숨어들기를!
낙엽처럼 떨어진 희망 쪼가리를 밟으며
나는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리.
이곳에 있어도 영원히 이곳에 속하지 않는 망명자,
자본의 심장부에다 '말'폭탄을 던지는 시인은
이 시대 마지막 레지스탕스라네.
이 밤 돌아오지 못할 카테리니로 떠나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나일세.
내 심장이 버티는 한
내 유일한 무기 볼펜과 노트를 가지고서
희망 없는 이 땅에 살아남아 있으리.
절망 한가운데로 실뿌리를 뻗어 보리.
열차 2015년호 /김덕성
2015년호 열차
발차 신호와 함께 출발합니다
돌아보면 2014년
그새 정들었는지 모르지만
아픔과 슬픔 속에
우여곡절이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가까이 가려하면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세월과 함께
그래도 솜털 같은
포근한 정이 있었는지
그 은혜로 잘 마무리를 합니다
주님! 2014년호
무사히 종착역에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새 열차 2015년호에 갈아타고
출발합니다.
주님과 함께
2015년호 열차
발차!
열차 /정연복
열차를 타고
황금물결을 지나간다
창가에 연달아 스치는
누렇게 익은 벼.
내가 올라타 있는 인생 열차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나의 생 나의 영혼도
나름 잘 익어가고 있을까.
올해도 벌써 한 잎 두 잎
낙엽은 지고
나그네 여행의 종착역
날로 가까워 오는데.
철길의 유령 /강인한
이리(裡里)에서 오산(五山)까지 3.4 킬로미터
나도 걸을 만한 거리였다.
자갈 많은 신작로엔 미루나무들이 그림붓처럼 서있었다.
밤에도 걸을 수 있는
이리에서 오산까지 철길이 좋았다.
콜타르 칠한 침목은 또박또박 내 걸음에 응답해 주고
6학년의 밤길에 레일은 내 동무였다.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고 때리며
조개탄 같은 자갈들이 침목과 침목 사이에서 비죽거릴 때
문득 뒤돌아본 내 눈앞에
시커먼 미카!
눈보라 속을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그때 나는 열두 살,
지금의 나는
예순 해도 전 그 겨울밤 철길을 걷는 유령인지 모른다.
열차처럼 강 길을 걸으며 /남시호
열차처럼 강 길을 걸으며
강에나 빠진 출렁이는 산을 본다
강에나 빠진 물고기처럼 젖은 새를 본다
강에나 빠진 나를 바라다 본다
강에나 빠진 나의 마음을 더욱 깊이 들여다 본다
차츰 차츰 취기 어린 황홀에 빠진다
이렇게
꽁 꽁 어언 겨울에서 화들짝 풀린
강에나 빠진 하늘을 내려다 보노라니
열차처럼 지나간
나의 야릇한 추억의 조각들이 환생을 하네
아 ! 이렇게 홀연히
어디에 빠진다는 것은
다스릴 수 없는 황홀한 고백
열차처럼 강길 걷기는
그야말로 취하고 취하는 낭만여행
하얀열차는 아프다 /오문경
빗길, 아슬아슬 용지행 마지막 전철에 오른다
무수한 중독의 하얀 꼬리표를 달고
지워지지 않을 상처만 끌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 죽었다간 다시 깨어나는
텅 빈 열차의 머리통 지끈거려온다
죽어가는 뇌세포를 다그친다. 알코올이, 페북이
떠오르지 않는 기억 속에 갇혀
어느덧, 노란 정지선 앞에 서 있는 중독열차
투명창 넘어로 엊그제 먹다 쏟은 머얼건 탕국 같은
빗물, 줄기줄기 쏟아져 내린다
몇 정거장째 타는 승객이라곤 하나 없는
열차 문은 열렸다 닫혔다 냉기만 더하고
이윽고, 키 큰 중년 여인이 탄다. 잠시 휘청거리나 싶더니
건너편 빈 모퉁이로 다가가 철퍼덕 주저앉는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에서 괸 다리로
시퍼런 중독이 흘러내린다
아니, 지독한 감옥에 갇혀있다
알코올일까,
도박, 게임, 핸드폰일까
그래, 주객을 바꿔 차버린 황금중독
중독은 중독을 불러 세우고
잠간이라도 그놈의 중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뻐걱거리는 열차
하얀열차는 아프다
진창에 빠진 채,
덜컹거리는 열차의 기침소리 무거운 밤
서두만 긁적이다 덮어버린
어쭙잖은 내 시작노트마냥 난, 조용히 눈을 감는다
대전행 새마을호 열차 /나상국
곤한 잠에서 깨어난 새벽
덜 깬 눈으로
길을 나선다
이슬 맞은 새벽 찬 바람
앞을 가로막지만
가야 할 길
눈 지그시 감는다
미처 예약하지 못 해
새마을호에
몸을 싣지만
마음만은 케티엑스보다도
빠르게 달려간다
추억의
대전역 막국수
어서오라 손짓하고
낯설지 않은 길
설레발 치며간다
태백선에서 /정재영(小石)
태백선을 넘는
야간 열차 칸에서
들과 산의 명암이
먹칠로 구별되지 않는
창 밖을 보노라면
내 나이만큼이나
찌그러진 달은
구름에 막혀
질척거리며
가는 흐름을 버거워하는데
잠시 있다 떠나는
이름 모를 역의
야간 역무원 손에 들린
손전등의 흔들림은
헤어집의 아픔보다
약속의 따스함으로
기차를 보낸다
인생 열차 /은파 오애숙
실비가 들판에 시나브로 내리더니
밤사이 갈맷빛 물감을 뿌려놓았다
애오라지 숨결로 숨죽여 들었던 필드가
생글생글 웃음꽃 피워 아침에 무지개길 열 때
눈이 햇살에 눈부신 초록빛바다를 집어내었다
맑은 날씨인데 피죽바람이 불더니 여우비가 내린다
비가 걷힌 후 정오 지나 오롯이 들판을 거닐 때
반사작용이 가파르게 비탈진 가풀막앞에서 앙당그린다
조요히 희로애락이 갈바람에 스미진 곳에서 회 돌아 서니
해 그림자 밑에서 ‘네 박자’*가 오롯이 가슴에 스며든다
*네 박자: 가수 송 대 관 씨가 부른 노래 제목.
당고개행 열차 /草岩 나상국
밤 열두시
시인 정호승 님의
열차는 이제는 가지 않는다.
새벽 한 시
당고개행 전동 열차는
이제는 오지 않는다.
수락산 산꼭대기
녹지 않은 눈 속에
별은 반짝반짝 빛나는데
상 하행 모든 열차는
이제 오도 가지도 않는데
창동역 담벼락을 타고 기어오르는
허기진 곱창 내음
정호승 님의 동전 몇 잎 헤아리던
중년의 맹인
열차를 끌고 단란주점 을지나
당고갯길을 혼자 오르던 맹인
오늘도
인수봉에 떠오른 보름달을 헤아릴까?
열차도 집에가서 잠을 자야 한다는데
열차는 오도 가도 않고
수락산 산꼭대기
녹지 않은 눈 속에
여기가 네 집이라고
어서 오라 별은 빛나는데
불암산을 비추던 달도
하품을 하는데
당고개행 열차는 이제 오지않고
허기진 곱창 냄새 속에 낙지가
발버둥 친다.
어서가 잠을 자자고
옆에있던 게블이
마누라도 없는데
일찍 가서 뭐하냐고
한잔 하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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