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사랑/평보
은행잎에 시화를 적던
청춘이 있었습니다
가을은 훈훈한 아랫목
같았지요
참새들이 억세 사이로
바쁘게 날며 사랑을
이야기 하던 그때 였습니다
귀뚜라미 수놈이 구애로
찌르르 찌르르
애원의 소리를 지르던
그때였습니다
노란 떡갈나무 단풍속에서
다람쥐부부가 사랑의 새끼에게
먹이를 주려고 바쁘게 움직이던
그때 였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촛불 밑에서 편지를 썼습니다
낙엽이 타는데 따듯한 내 아랫목
으로 들어오라고
가을 /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추일미음 / 서정주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계는 붉은 물이 들었지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안해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박은 뜰 밖에 작은 주먹처럼 놓였다만
내 주먹은 어디다가 놓았으면 좋을꼬
가을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가을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꽃씨 / 문병란
가을날
빈 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 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가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녙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녁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가을단상 / 이제민
고추 말리는 아낙네의 손
가을걷이하는 농부의 얼굴
가을 햇살은 따사롭기만 하다.
긴긴 기다림으로
간절함으로
한 해의 풍요를 기도하던 일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가을은 무르익어 가고
이른 새벽부터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가을은 깊어만 가고
하늘 높이 나는 고추잠자리
가을은 높아만 가네.
가을 그림자
길게 늘어지면
한 해의 내 그림자도
편히 쉬겠지.
저 가을 속으로 / 박정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부신 꽃잎만 던져놓고 돌아서는
들끓는 마음 속 벙어리같이.
나는 오늘도
담 너머 먼 발치로 꽃을 던지며
가랑잎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내사 짓밟히고 묻히기로
어차피 작정하고 떠나온 사람.
외기러기 눈썹줄에 길을 놓아
평생 실낱같은 울음을 이어 갈 것을
사랑의 높은 뜻은 비록 몰라도
어둠 속 눈썰미로 길을 짚어서
지나가는 길섶마다
한 방울 청옥같은 눈물을 놓고 갈 것을.
머나먼 서역만리
저 눈부신 실크로드의
가을이 기우뚱 기우는 저 어둠속으로.
가을 / 류원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파아란 가을하늘
싱그럽게 웃어주지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두둥실 가을구름
느릿느릿 지나가지요
고개를 돌려 옆 논을 보면
황금빛 벼이삭
출렁출렁 춤추며 웃지요
고개를 돌려 과수원 보면
풍성한 가을 과일
고개 들고 웃어주지요
고개를 저만치 돌리면
가을이 지나가며
가을을 이야기 해 주지요
가을바람 / 김혜영
가을하늘 파란도화지에
구름 색연필로
그림을 그립니다.
구름으로 그리는 엄마 얼굴
구름으로 그리는 아빠얼굴
가을바람 살랑 와서
구름엄마 구름아빠 데려가도
괜찮아요
또 그리면 되잖아요.
가을 / 이상희
바다보다 더 깊고
푸른 가을하늘
누가 도화지에 색칠해 놨나?
파란색으로 물든 가을하늘
하얀색 물감이 번졌다.
가을이 되면
한껏 멋 부리는 가을나무
어떤 손님이 찾아 오길래
알록달록
색동옷으로 갈아입는 걸까?
잠자리 손님 맞으려고
예쁘게 치장하는 걸까?
가을이 되면
예뻐지는 나무와 하늘
가을산 / 송영오
가을산은 아기가 물감을 가지고
장난을 한 것 같아요.
물감 가지고 노닐다
마음대로 뿌려 놓은 것 같아요.
알록달록 단풍잎!
울긋불긋 단풍잎!
예쁜 아가 손 같아요.
가을바람 아가씨가
알려주고 갔데요.
곧 겨울 왕자님이 올 테니
어서어서 곱게곱게
단장 하라 고요.
가을산은 아가가 물감으로
장난을 쳐도
알록달록
울긋불긋
단장하기 바쁘데요.
가을 아이 / 강윤제
코스모스는
아이들 손 되어
바람을 흔들다가
코스모스는
아이들 얼굴로
바람을 웃다가
코스모스는
아이들 되어
바람을 보여 준다.
가을 아이로
서 있는
코스모스.
도토리 / 송영오
떽떼굴 도토리 하나
엄마 몰래
세상 구경 왔대요.
바람 불고 추운 겨울이 올까봐
머리엔 깍지모자 눌러 쓰고
세상구경 나왔대요.
비가 오면 젖을까봐
단단한 깍지 외투
입고 나왔 대요
지금도 바람 불어 추운 겨울 날엔
도토리 나무는 토리찾아
토리야! 토리야!
외치고 있대요.
가을하늘 / 신세미
혹시 혹시
단풍잎이 가을하늘을 데워서
가을하늘에 빨개지면 어쩌지?
그럼 가을하늘이
단풍이랑 싸울거야.
아냐 아냐
노란 은행잎이
가을하늘에 부채질 해서
가을하늘에 파도가 치면 어쩌지?
그럼 가을 하늘이
은행잎이랑 싸울거야
도깨비 바늘 / 남진원
풀밭에서
나와 보니
바지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도깨비 바늘
엄마에게 달라붙다가
안 통하니
내게 달라붙던 동생
똑 같다
똑 같다
가을 / 김기은
가을이 왔어요.
소리도 없이
산마다 빨간 손
들마다 노란 손
울긋불긋 아름다운
가을이 왔어요.
다람 다람 다람쥐 /박목월
다람 다람 다람쥐
알밤 줍는 다람쥐
보름 보름 달밤에
알밤 줍는 다람쥐
알밤인가 하고
조약돌도 줍고
알밤인가 하고
솔방울도 줍고
단풍잎 행진 /정혜진
가을 햇살 접어 보낸
초대장 받고
설레인 마음 담아
옷 갈아입은 단풍잎.
찬 서리 내려보낸
차표 받아 들고
앞다투어 우수수
뛰어내린 단풍잎.
가을 바람 열차 타고
나무숲
공원 길
모두 덮고
놀이터까지 늘어선
단풍잎 행진
귀뚜라미 소리 /방정환
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님도 추워서 파랗습니다.
울 밑에 과꽃이 네 밤만 자면,
눈 오는 겨울이 찾아온다고,
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밤에 오동잎이 떨어집니다.
가을은 바람둥이에요 /김희정
가을은 흔들흔들
가을벌판에 가서
흔들흔들 벼들과
같이 춤추고,
살랑살랑
단풍잎 은행잎과
함께 뛰어 놀지요.
그리고 한들한들
코스모스 아가씨와
몰래몰래
사랑나누는
가을은 바람둥이에요.
손님 / 최혜린
가을이 찾아 온대요!
가을을 맞이하려고
나뭇잎을 알록달록
노란색 빨간색
이 물감도 찍고
저 물감도 찍고
가을이 찾아왔대요.
알록달록 예쁜나무
너무나 좋대요.
가을 / 남동희
가을은 참 바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오니까
농부아저씨들도
주렁주렁 달린
과일과 벼를 바쁘게
수확하니까
강남가는 제비도
퍼덕퍼덕 고운
날개를 휘저으며
바쁘게 지나가니까
동물들도 겨울잠
자려고 굴파느라
바쁘니까
울긋불긋 온 산에
핀 예쁜 단풍잎도
보름쯤 지나면
벌써 땅에 자리 잡는다.
가을아, 가을아,
기다려라. 같이 가자.
우리 모두 다 함께
천천히 가자.
이별의 노래 / 박목월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詩心에젖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월의 시 (0) | 2023.10.06 |
---|---|
가을에 관한 詩 모음 (0) | 2023.09.25 |
기차, 열차에 관한 시 모음 (0) | 2023.09.03 |
어우렁 더우렁 / 만해 한용운 (0) | 2023.08.29 |
8월의 시 모음 (0) | 2023.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