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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心에젖어

나그네에 관한 시 모음

 

나그네 / 문인수

저도 모른다.

나그네는 걷다가 왜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는지

모르고 길에서 쉰다.

모르고 올려다보는 저

정처(定處).

- 문인수, 『그립다는 말의 긴 팔』(서정시학, 2012)

나그네 / 안도현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는 힘이 되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

- 안도현,​『그대에게 가고 싶다』(도서출판 푸른숲, 1991)

나그네 2 / 김형영

죽음아,

내 너한테 가마.

세상을 걷다가 떨어진 신발

이젠 아주 벗어던지고

맨발로 맨발로

너한테 가마.

- 김형영,​『다른 하늘이 열릴 때』(문학과지성사, 1987)

나그네 / 노영희

한가닥 증오도 없이

원망도 없이 여기 홀로 선다

헤매어도 헤매어도 벼랑 위에

서는 나그네 같이

이제 새삼 눈물 흘리지도 않는다

아프다고 소리지르지도 않는다

길이 생기면 길 따라 가고

노래 있으면 노래 부르리라

망아지같이 마당을 헛돌며

흙으로만 밑바닥에 뒹굴리라

- 노영희,『한 사람』(푸른숲, 1991)

나그네 / 김남조

내가 성냥 그어

낙엽더미에 불 붙였더니

꿈속의 모닥불 같았다

나그네 한 사람이 다가와서

입고 온 추위를 옷 벗고 앉으니

두 배로 밝고 따뜻하다

할 말 없고

손잡을 일도 없고

아까운 불길

눈 녹듯이 사윈다 해도

도리 없는 일이다

내가 불 피웠고

나그네 한 사람이 와서

삭풍의 추위를 벗고 옆에 앉으니

내 마음 충만하고

영광스럽기까지 했다

이대로 한 평생이어도

좋을 일이었다

- 김남조,『충만한 사랑』(열화당, 2017)

나그네 / 김남주

조상 대대로 토지 없는 농사꾼이었다가

꼴머슴에서 상머슴까지

열 살 스무 살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였다가

한때는 또 뜬세상 구름이었다가

에헤라 바다에서 또 십 년 배 없는 뱃놈이었다가

도시의 굴뚝 청소부였다가

공장의 시다였다가 현장의 인부였다가

이제는 돌아와 고향에

황토산 그늘에 쉬어 앉은 나그네여

나는 안다 그대 젊은 시절의 꿈을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으니

보습 대일 서너 마지기 논배미였다

어기여차 노 저어 바다의 고기 낚으러 가자

통통배 한 척이었고

풍만한 가슴에 푸짐한 엉덩판

싸리울 너머 이웃집 처녀의 넉넉한 웃음이었다

그것으로 그대는 족했다

그것으로 그대는 행복했다

십 년만에 고향에 돌아와서도

선뜻 강 건너 마을로 들어서지 못하고

바위산 그늘에 쉬어 앉은 나그네여

- 김남주,『사상의 거처』(창작과비평사, 1991)

바람 나그네 / 문현미

바람결에 언뜻,

눈물 없는 소리 울음을 들은 적 있는가

흩어졌다 다시 몰려 쌓이는

수천 겹 바람의 지층

얼마나 가파른 어둠의 협곡을 넘어왔을까

쏴아쏴아 아우성치며 온몸으로 휘몰아 가는

선천성 유목의 날개 아래

사무치게 날카로운 시간이 스쳐 지나간다

있는 듯 없는 듯 허공의 벼랑을 오르내리며

투명의 눈동자를 수직으로 지향하는

무한 공중의 거대한 자유여, 힘이여

무게가 무게로 느껴지지 않는 속도로

화엄 산맥을 넘나드는

천의 얼굴을 지닌

무소유

- 문현미,『아버지의 만물상 트럭』(시와시학, 2012)

겨울나그네 / 오규원

지난겨울도 나의 발은

발가락 사이 그 차가운 겨울을

딛고 있었다.

아무 데서나

심장을 놓고

기웃둥, 기웃둥 소멸을

딛고 있었다.

그 곁에서

계절은 귀로를 덮고 있었다.

모음을 분분히 싸고도는

인식의 나무들이

그냥

서서 하루를 이고 있었다.

지난겨울도 이번 겨울과

동일했다.

겨울을 밟고 선 내 곁에서

동일했다.

마음할 수 없는 사랑이며, 사랑……

내외들의 사랑을 울고 있는 비둘기

따스한 날을 쪼고 있는 곁에서

동일했다.

모든 나는 왜 이유를 모를까.

어디서나 기웃둥, 기웃둥 하며

나는 획득을 딛고

발은 소멸을 딛고 있었다.

끝없는 축복.

떨어진 것은 恨대로 다 떨어지고

그 밑에서 무게를 받는 일월이여.

모두 떨어져 덤숙히 쌓인 위에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발자국이 하나씩 남는다

- 오규원,『분명한 사건』(민음사, 2014)

출처:느티나무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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