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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心에젖어

늦가을에 관한 詩 모음

늦가을에 관한 詩 모음 


늦가을의 연가      /정심 김덕성


흘러가는 계절
변화에 순응할 수밖에 없던 여름
폭염도 물러간 자리에
알알이 익은 사랑의 열매


깊어가는 가을
곱게 물들인 황금빛 잎새
불어오는 갈바람 한 잎 두 잎
사랑이 익어 떠나가고


세월이 스쳐간 가슴엔
벌써 빨갛게 사랑이 익어 가는데
굵어진 나이테에 그 마음에는
그녀의 그리움만 더하고


오색찬란한 늦가을
그리움으로 오는 따뜻한 붉은 사랑
내 마음에 불타는 붉은 빛으로
그녀를 애타게 그려보는데




도시의 늦가을       /박인걸


저녁노을이 빌딩 벽면에 길게 드리우고
국적 불명의 나뭇잎들이 이국땅에 눕는다.
곧 찾아올 어둠을 의식하며
내 발자국은 버석대는 낙엽을 밟으며 빨리 걷는다.
예리한 눈동자들이 살피며 간 거리에는
뛰어내린 고독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도시가 뱉어내는 허영은 길거리에 어지럽다.
마스크로 틀어막은 두려움은
바람에 쓸린 낙엽처럼 쌓여만 가고
두려움이 빼앗아간 두 번의 붉은 가을이
줄에 묶인 채 나를 따라온다.
이미 어두움은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쫓기고
누가 스위츠를 올렸는지 가로등이 핀다.
목도리를 겹겹이 두른 후두(喉頭)에
찬 바람이 달려와 몸을 숨기고
아무 그리움도 없이 나는 늦가을을 생각한다.
내 의식 속에는 낭만도 감수성도 사라졌다.
박명(薄明)의 빛을 밟으며 총총히 걸어
새들처럼 안식처를 찾는 일이다.
그곳이 비록 멀리 떨어진 벽경(僻境)이라도
겨울이 오기 전에 밝혀내야 한다.




늦은 가을의 시        /홍수희


잎맥만 앙상한
마르디 마른 나뭇잎이
툭, 발등에 떨어진다면
비로소 가을이라는 얘기
슬픈 일을 보아도 슬프지 않고
기쁜 일을 보아도 웃음이 나지 않던
무디고 무뎌 버린 마음이
툭, 떨어지는 갈잎 한 장에
문득 꿈틀거린다면
늦은 가을이라는 얘기
이제 손전등 하나 들고
살아온 날들을
살펴볼 때라는
얘기




늦가을 서정 2       /최영복


행여 편지는 한통 오려나
기다립니다
올해 유난히 아름다운
가을 이잖아요


어딜 가나 지난 이야기가
추억을 풀어놓으니 그리움이
그리움을 덧입고 다시
내 가슴속으로 들어옵니다


세월이 무심히 흘러 흘러 외로운
마음속 사연도 함께 무뎌지고
덮고 그렇게 등 떠밀리듯 가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어디 세상 위치가 그렇게만
되던가요
낙엽 한 잎 손에 주어들고 보니
무슨 일이 있을 것처럼 마음이
설레던걸요


그 때문인지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허전하더니
어느새 내 가슴을 반쯤 덜어내어
가을이 가져갔습니다




늦가을 조문       /채재순


떨어지는 자작나무 잎사귀에게 술 한 잔
사라지는 구절초 꽃잎에게 술 한 잔
방금 흩어진 구름 한 점에게 흰 국화 한 송이
인적 드문 솔숲에 누워있는 참새 주검에게 국화 한 송이
더 이상 꿈을 피우지 않는 청춘에게 향 한 촉
가끔씩 시들해지는 내 하루에게도 향 한 촉
늦가을, 어딘가 조문을 한 번 다녀오는 것이다
다음날 쓰다달다 말없이 고봉밥을 먹었다
그 다음날 미루었던 답신을 오래오래 쓴다




늦은 가을의 시      /이순화


가을이 돌아오는 늦은 저녁


들창 활짝 열어젖히고
천년 밤하늘에 등불 높이 내걸어라, 절그렁절그렁
그들이 돌아온다


떡갈나무 숲을 지나 적막을 가르는 수백발의 화포, 잿빛 화약 연기 속에서 무장무장 붉은 총구 겨눌 때, 탕, 탕, 탕, 국경 한 귀퉁이 무너져 내리고 철그렁철그렁 그들이 온다, 마른 대지에 축제의 술 가득 부어라, 서리 찬 은하에 저릿저릿 젖줄이 돋아라, 혁명가를 부르며 역전의 용사들이 돌아온다


뒤꼍 소슬한 바람결에도
쿵, 쿵, 쿵
지축을 흔드는 저 소리


붉은 전사의 부족들이 돌아오고 있다




늦가을        /신순말

포도송이를 따낸 밭은 어쩐지 고요하다

왕성했던 덤불과 잎
한로 상강에 무서리 된서리 고루 맞더니
시름해진다

남편이 거름을 뿌린다
한 해 동안 애썼을 나무에게
월동에 들기 전 주는 비료다

농사일지 머리에 씌여있는 말
'감사비료(感謝肥料)'

문득, 가을이 물씬 깊다





늦가을 풍경       /임재화


가로수 잎사귀도 모두 떨어진
늦가을 휴일의 오후
또다시 일터로 돌아오는 길에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린다.


중부 고속도로 진입하려고
내달리는 도로 옆으로
가을걷이 모두 끝난 텅 빈 들판에
스산한 바람과 빗줄기가 뒤섞여
그냥 가슴이 허전해진다.


희뿌연 늦가을 안개
점점 짙어 가고
도로 위에 쓸쓸히 나뒹구는 낙엽
차창밖에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늦가을       /조창규


사과나무는 선크림을 바르지 않아 새빨갛게 탔다
곶감처럼 건조한 늦가을
찬물에 서서히 집어넣는 맨발
가을과의 듀스 끝에 어드밴티지를 얻은 겨울
나뭇가지마다 바삭한 캐나다 국기가 달린다
신간이 나올 때까지 과월호에 낙엽을 끼워놓고
숲과 함께 번성한다*를 종이 냅킨에 쓴다


*벨리즈 국기에 적혀 있는 ‘SUB UMBRA FLOREO’ 문장




때늦은 가을비       /오길원


오색단풍에 흠뻑 물든 가을이
가슴에서 활활 불타면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 빗물은
한 잎 두 잎 쌓인 낙엽위에
추억을 남기나니


삼천궁녀의 낙화처럼
한 서린 슬픔과 안타까움에
후회라도 하듯 때늦은 가을비는
한번쯤 다시 보고 싶은 얼굴로
가슴에 하얀 발자국을 남긴다
첫눈이 서둘러 새벽을 열고
나를 깨우던 그 때 처럼




늦가을에       /신순임


석양 뒷배경으로
황혼 속살
고스란히 내비추우고
멧새들에게 성찬 차린
홍시


반백인 나도
황혼 되면
전신 공양할 수 있을까?




늦가을과 겨울 사이      /己貞 옥윤정


도시가 너무 조용합니다
초겨울로 접어드는 시기라
싸아한 기분이 듭니다


나만 느낀 것일까
마음이 한 겨울에 와 버린 것일까
이겨 내야 하는 사연이 많아서 일까
너도나도 숨겨놓은 사연들을
가슴에 안고 살아서 일까


느슨한 발걸음이
종종걸음으로 넘어가기 직전
너무 차갑지 않은 겨울을 생각하며
먼 산의 마지막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하는 아쉬움
마음이 먼저 그리움을 만들어 놓습니다


지워지지 못할 그리움은
없으면 좋으련만
인생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은
나의 눈물이겠지요




늦가을       /안상학 


그만하고 가자고
그만 가자고
내 마음 달래고 이끌며
여기까지 왔나 했는데

문득
그 꽃을 생각하니
아직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내가 보이네





늦가을 비       /김상미


나는 오늘 부당해고 당했다. 늦가을 오후 7시. 이곳이 견고한 그물처럼 잘 짜인 인맥사회라는
걸 깜박 잊고, 사장 조카의 비리를 눈감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내게 찍어놓은 당장해고라는
화인을 넋 놓고 바라보다, 눈앞이 캄캄해져 추적추적 내리는 늦가을 빗속을 우산도 없이 걷고 또
걷는다. 벌써 몇 번째인가. 비정규직에 대한 횡포. 어둡고, 깊고, 스산한 비, 늦가을 비는 쓸쓸하
고, 차갑고, 끈적끈적한 혈류처럼 온갖 죽음의 냄새, 껍질의 냄새를 피우다 지상보다 더 캄캄한
심연으로 구슬프게 나를 몰아붙인다. 한꺼번에 온몸으로 스며드는 한기. 오늘은 날씨조차 나를
비껴가는구나. 약속도 없이 나는 불 켜진 허름한 주점으로 들어선다. 잘 익은 열매는 모두 다 떨
어뜨리고 마지막 잎새들만 남겨놓은 퀭한 나무들 같은, 서울 홍제동 어느 허름한 주점. 나는 육
체 없는 그림자처럼 서글픈 내 마음에 연거푸 술잔을 들이붓는다. 막막한 빗소리처럼 자꾸만 목
이 멘다. 이제 또 무엇을 해서 나를 먹여 살리나? 늦가을 빗속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나. 그 위로
하염없이 내리는 비. 늦가을 비명 같은 비.




어느 늦가을 저녁     /이시영

비가 내린다
말이 운다
공치는 날엔 막 뒤에서 섰다를 벌여 주막으로 가자
속은 쓰리고 가슴은 비었는데
마을로 가서 노랭이를 깨울까
날이 흐리면 또 한 막이 끝나는 것
포장을 열고 산천을 둘러보면
삶은 또 한해처럼 저물어가는 것
어깨를 털고 기운을 돋구어 난쟁이,
마지막 한판을 멋지게 놀자
울고 웃는 것이 우리들의 일
슬픔 사람들끼리 슬픔으로 웃는 것이 우리들의 일
웃다가 우리 모두 궂은비 맞아
기적 속에 으스스히 잠든다 해도




늦가을 아침     /임재화


이른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세상은 온통
희뿌연 한 안개의 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
저 멀리서 덜커덩거리며
철마(鐵馬)가 달려온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스멀스멀 밀려오는
늦가을의 하얀 안개는


곧, 겨울이 다가온다고
조그만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듯 얘기를 한다.


은행나무 가로수 길에
간밤에 찬 바람이 몰아쳤는지
수북하게 쌓여있는 은행잎


온통 하얗게 내려앉는
가을 안개와 함께
만추(晩秋)의 아침을 노래한다.




늦가을을 걷다       /오길원


오색은 가을에 물들고
산허리를 감싸두른 자드락길엔
고즈넉한 낭만이 흐른다


긴 여행 끝의
꿀맛 같은 안도의 한숨처럼
숲은 겉으론 평온해 보여도


화려한 저녁만찬 후에
애틋한 석별의 정을 나누듯
늦가을 숲은 이별을 준비 한다


다람쥐는 낙엽으로 도토리를
숨기느라 바쁘고
핏기 잃은 햇살이 안쓰러운
산 그림자는 하산을 서두른다


지는 낙엽에 떠나간 세월,
백발이 된 억새의 처연한 몸짓,
인기척 없는 빈 집의 공허,
동병상련의 바람이 숲에서 분다


매정한 찬 서리에 가슴 아파도
숲은 사람이 그립고
사람은 늦가을 숲길을 걸으며
숲의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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