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 박영희
꼴 베는 낫으로
연필을 깎아주었던 낭규머슴
밥태기꽃 피어나고
자운영 풀꽃들 숲을 이루면
도지는 병처럼 낭규머슴 생각난다
아버지 술 취한 날이면
부러진 연필 숙제장 챙겨
소죽 쑤고 있는 머슴방으로
숨어들었던,
낭규머슴 낫 들고 연필 깎으면
나는 아궁이에다 고춧대도 밀어넣고
깻대도 밀어넣고
침 잔뜩 발라 서툴게 풍년초 말아주면
낭규머슴 좋아라 육자배기 불러대고
그 어떤 씨앗 잡풀 한포기도
내치지 않는
저 들녘 초록으로 물들면
연필 깎아 편지 한통 쓰고 싶어진다
- 박영희,『팽이는 서고 싶다』(창작과비평사, 2001)
미술연필 / 박철
을왕리 가을 바다에 와서
갑자기 미술연필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꽉 찬 자유를,
흔들리며 유혹하는 쓸쓸함을 보면 누구나
엉뚱한 생각을 한번쯤은 할 것이다
고등학교 때 화실에 다니며 곱게 곱게 심을 세웠던
일제 투모로우나 독일제 홀바인 미술연필은
모두 가짜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선을 그렸다
깊어만 가는 가을 바다가
누가 밤새 파놓은 인공호수라 해도
나는 이렇게
구름 가는 대로 노을 물드는 대로 나를 만들고
내가 그려진 벽에는 바다가 있다
- 박철,『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 2009)
연필 지팡이 / 이원규
- 일생 단 한 편의 시 3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
일생 마늘밭 시금치밭 매던 할머니
행여나 길 잃을까 고쟁이 속에 부적처럼
딸내미 주소 전화번호를 품고 살았다
뭐라쿠네, 내는 안 갈끼다!
삼동보건소에서 난생처음 한글 배우더니
꼬부랑 할머니 백일장에 나오셨다
선상님이 단디 개차주니
종이 쪼가리에 글씨를 다 써보고
지팡이 대신 고물 유모차 밀고 댕기다
턱하니 연필 지팡이를 짚고 보이
허이구메, 놀래 자빠지것다!
병원 간판 부산 가는 버스도 이래 다 보이고
온 시상이 확 달라졌다 아이가?
제목 '연필 지팡이'를 보는 순간
내 인생의 붓이며 볼펜 만년필은 숨이 턱 막히고
삼만 리 걸으며 애써 다듬은
마지막 족필足筆마저 오금이 저렸다
- 이원규,『달빛을 깨물다』(천년의시작, 2019)
연필 깎기 / 도종환
연필을 깎는다 고요 속에서
사각사각 아침 시간이 깎여 나간다
미미한 향나무 냄새
이 냄새로 시의 첫 줄을 쓰고자 했다
삼십 년을 연필로 시를 썼다
그러나 지나온 내 생에 향나무 냄새 나는 날 많지 않았다
아침에 한 다짐을 오후까지 지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문을 나설 때 단정하게 가다듬은 지조의 옷도
돌아올 땐 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연필을 깎는다 끝이 닳아 뭉툭해진
신념의 심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깎는다
지키지 못할 말들을 많이 했다
중언부언한 슬픔 실제보다 더 포장된 외로움 엄살이 많았다
연필을 깎는다 정직하지 못하였다는 걸 안다
내가 내 삶을 신뢰하지 못하면서
내 마음을 믿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람이 그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모순어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시각 얇게 깎여져나간
시선의 껍질들을 바라보며 연필을 깎는다
기도가 되지 않는 날은 연필을 깎는다
가지런한 몇 개의 연필 앞에서
아주 고요해진 한 순간을 만나고자
연필 깎는 소리만이 가득 찬 공간 안에서
제 뼈를 깎는 소리와 같이 있고자
- 도종환,『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2006)
연필로 생을 쓴다 / 박노해
밤중에 홀로 앉아 연필을 깎으면
숲의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다
사박사박 연필로 글을 써 내려가면
수억 년 어둠 속에 묻힌 나무의 숨결이
흰 종이 검은 글자에 자욱이 어린다
연필로 쓰는 글씨야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지만
내 인생의 발자국은 다시는 고쳐 쓸 수 없어라
그래도 쓰고 지우고 다시 고쳐 쓰는 건
오늘 아침만은 곧은 걸음으로 걷고 싶기 때문
검푸른 나무향기 가득한 이 밤에
-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2010)
빨강 연필을 사려고 보면
노랑 연필이 더 예쁜 것 같고
노랑 연필을 사려고 보면
파랑 연필이 더 예쁜 것 같다
빨강 연필, 노랑 연필, 파랑 연필
다 사고 싶지만
돈이 없어 그냥 노랑 연필만 샀다
필통을 열어 보니
조그만 아기 연필이
따뜻한 엄마 품에
가만히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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