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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고전명구]적적한 마음을 달래며

적적한 마음 시로 달래며

풍토병으로 파리한 몸 침상에 기대노라니
적막한 방 낡은 창엔 빗소리만 추적추적
잠들어 배고픔 잊는 방법은 새로운 기술이고
꿈속의 시 많이 완성하는 일은 오랜 버릇이네
발 너머 제비 오가니 사일(社日) 지났음 알겠고
처마 아래 꽃 피었다 지니 바삐 가는 봄 탄식하네
담가 놓은 새 술이 마침 익었는데
시장 술보다 맛 좋고 잔을 드니 더욱 향기롭네

 

漳疾淸羸寄一牀     장질청리기일상

壞窻虗寂雨聲長     괴창허적우성장

新工睡得忘飢法     신공수득망기법

舊癖詩多足夢章     구벽시다주몽장

簾鷰去來知社過     염연거래지사과

簷花開落歎春忙     첨화개락탄춘망

經營適値新醅熟     경영적치신배숙

味勝村沽挹更香     미승촌고읍갱향

 
조관빈(趙觀彬, 1691~1757), 『회헌집(悔軒集)』 권2 「즉흥시를 쓰다[書卽事]」
 
  이 시는 춘사일(春社日) 즈음에 쓴 시이다. 춘사일은 입춘 이후 다섯 번째 무일(戊日)을 말하는데 이때 곡식이 잘 자라기를 바라는 뜻으로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만물이 생장하는 계절, 제비와 꽃은 봄이 왔음을 알리지만 외딴 섬에 갇힌 시인은 봄을 온전히 만끽하지 못한다. 그러나 갑갑한 공간과 막막한 시간의 굴레 속에서도 자연을 감상하고 한가함을 즐길 줄 아는 의연한 기상이 돋보인다.
 
  지은이 조관빈은 신임옥사(辛壬獄事) 때 사사(賜死)된 조태채(趙泰采)의 아들이다. 조선의 당화(黨禍) 중에서도 참혹하기로 손꼽히는 신임옥사는, 연잉군(영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관철하려는 노론과 이를 저지하려는 소론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 배경이 된 사건이다.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많은 노론 인사들이 숙청되었는데,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 중 한 명이었던 조태채도 이때 사사되었고 그 자식들은 절도(絶島)로 유배되었다. 조관빈은 이때 흥양현(興陽縣) 나로도(羅老島)로 유배되었고, 1년 남짓 지난 35세 봄에 이 시를 지었다.
 
  부친은 사사되고 형제들은 뿔뿔이 유배되어 그야말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은 비극적 상황, 공교롭게도 당시 노론이 축출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 조태구는 당숙으로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다. 여성으로는 이례적으로 조관빈의 누이가 유배된 이유도 조태구를 저주한 죄목 때문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당시 조관빈 집안에서 이 사태에 얼마나 원한을 품었을지 유추해 볼 수 있다.




  가족도 잃고 친척도 잃고 전도양양하던 환로도 포기해야 하는 절망스런 처지를 생각한다면 이 시의 담담한 어조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굶주릴 땐 잠을 자고 적적한 마음은 시로 달래며 한 잔 술도 즐기는 여유. 배고프고 외로운 고충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분하다.
 
  이보다 몇 개월 앞서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기에 모종의 기대감이 시에도 반영되어, 회한과 자조의 감정에만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런 추측도 가능하다. 실제로 이해 3월 조관빈은 해배되고 연이어 요직에 두루 제수되었으며 아버지 조태채의 관작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담담함의 이유는 단지 복권에 대한 열망만은 아니었을 듯하다.
 
  조관빈이 정계에 복귀한 후, 정국의 부침으로 파직 등 불리한 상황을 겪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요직에 임명되는 등 관직 생활에 비교적 순탄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럼에도 조관빈은 오히려 영조의 탕평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다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사혐(私嫌)이 있는 정승에게 하직 인사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평안 감사에 부임하지 않아 파직되었다. 심지어 영조가 사친 숙빈 최씨를 육상궁으로 추숭하며 죽책문을 쓰라고 명하자 이를 거부하여 삼수부(三水府)에 유배되는 등 자신의 의리에 입각하여 임금에게조차 타협하지 않는 면모를 보인다.
 
  그의 행보가 당파적 이익을 대변하는 일에 치중되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안정적인 환로보다 자신의 잣대에 충실하였던 비타협적 면모를 고려할 때, 위 시의 담담함은 정세에 따른 태도 변화라기보다 자신의 원칙을 고수한 자만이 지닌 당당함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조관빈의 선택이 올바른 처사였는지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겠지만, 그 일생의 꼿꼿함을 오늘 내 삶의 판단에 투영해 보는 것은 누구든 가능한 일이다.
 
  조관빈은 40세 가을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화상자찬(畫像自贊)」을 지어 “슬퍼 보이는 것은 무슨 생각 때문인가? 근심스러워 보이는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若有所悲 悲者甚意 若有所憂 憂者甚事)”라는 회한 어린 말을 남겼다. 그의 꺽이지 않는 정치 신념을 생각한다면 다소 의아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삶의 굴곡을 함께 보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39세에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하고 이듬해 맞이한 두 번째 아내는 혼인한 지 23일 만에 사별했다. 부친을 비극적으로 여읜 지 몇 해 만에 두 번의 상처(喪妻), 아무리 굳은 심지를 가진 자라도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 괴로움이 그림에도 고스란히 담겼기에 조관빈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며 슬픈 감상에 잠긴 것이 아닐까.
 
  한 인간의 당당함과 쓸쓸함의 공존을 확인하며, 시련을 극복하는 인간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는 동시에 운명 앞에 작아지는 인간의 한계를 다시금 자각해 본다.
 

 글쓴이 김효동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