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은 무한하지만 살 집은 부족하다.
江山無窮而居室不足
강산무궁이거실부족
유몽인(柳夢寅), 『어우집(於于集)』, 「행와기(行窩記)」
「행와기(行窩記)」는 최계훈이 만든 ‘행와’에 대해 쓴 글이다. ‘행와’는 ‘움직이는 집’이라는 뜻이다. 유몽인은 이 집을 이렇게 소개한다. 작지만 기둥, 서까래, 문, 지붕 등 있어야 할 것은 다 있다. 가까운 곳은 8명이 통째로 들어 옮기고, 먼 곳으로 갈 때에는 해체해서 말 3마리에 싣고 간다. 이게 가능한 것은 구조가 단순하여 해체와 조립이 쉽고, 무게가 가벼워 적은 힘으로도 들어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집의 좋은 점. 첫째 자기 집이다. 둘째 언제 어디로든 마음대로 옮길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것은 마음이 편치 못한 일이다. 유몽인과 최계훈이 살고 있던 서울 도성은 당시에도 인구 밀도가 높고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은 도시였다. 살 집을 구하는 것도 녹록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구매하기에는 너무 비쌌을 수도 있고, 집을 지을 빈 땅이 없거나 땅값이 모자랐을 수도 있다. 사는 것도 집을 짓는 것도 어렵다면 세를 내어 살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자기 집만큼 편하기는 어렵다.
여유가 되어 자기 집을 샀거나, 자기 집은 아니지만 마음이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 살다 보면 한곳에 붙박여 지내는 게 지겨워질 수 있다. 여름에 너무 덥거나 겨울에 너무 춥다고 느낄 수도 있다. 당시에는 혐오시설이나 서촌·북촌 투어를 하는 관광객들이 없었겠지만, 그밖에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을 만한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새로 정착하고자 하는 곳에 괜찮은 집이 있을지, 애초에 집이 있기는 할지 장담할 수 없다.
강산은 무한하지만 살 집은 부족하다고 유몽인은 말했다. 하지만 최계훈의 행와는 무한한 강산의 어느 곳이든 자신이 늘 마음 편히 살 곳으로 만들 수 있다. 풍경이 좋고 생활 환경이 쾌적한 곳으로 옮겨가 살다가 지겨워지면 또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그래서 유몽인은 이 집이 ‘상지(上智)’ 즉 최고의 지혜로 만들어낸 집이라고 극찬했다.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집은 무엇일까. 일단 행와와 같은 이동식 주택은 아닐 것이다. 부동산(不動産)이라기에는 애매하니까. 눈앞에 펼쳐지는 수려한 경관도 우선 순위는 아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이웃’으로 수렴되지 않을까. 하지만 같은 ‘이웃’이라도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첫 번째 사례. 어느 아파트의 입주민들이 바로 옆에 있는 임대 아파트 주민들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같은 동네, 비슷한 구조의 집에 살지만 임대와 매매는 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쁜 이웃’인 임대 아파트 주민들을 몰아내거나 아니면 ‘더 좋은 이웃’이 있는 곳으로 옮겨가고 싶을 것이다. 더 부유하고 더 교육 수준이 높고 좋은 학군을 형성해주는, 그리고 결국 처절한 경쟁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이웃.
두 번째 사례. 코하우징(Cohousing)이라고도 하는, 대안적인 주거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 공간은 그것대로 존중하되 공용 공간의 기능을 강화하여 이웃과의 활발한 소통과 교류를 만들어내는 공동 주거 구역. 이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단절된 채 그저 모여살고 있을 뿐인 거주민이 아니라, 연결을 통해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이웃이 되기를 꿈꿀 수 있다. 하나의 큰 집일 수도 있고, 하나의 작은 마을일 수도 있다. 아파트도 가능하다.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될 수만 있다면. 이곳은 어떤 이에게는 향수와 함께 추억되는 흘러간 풍경일 테지만, 어떤 이에게는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다.
유몽인이 이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떤 집을 보고 ‘상지’라고 할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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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최두헌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번역실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선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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