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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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섭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들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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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 남호섭
시골 갔다 오던
버스가 갑자기 끼이익!
섰습니다.
할머니 자루에
담겨 있던
단감 세 알이
통, 통, 통
튀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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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 손동연
코스모스가
빨간 양산을 편 채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ㅡ 얘
심심하지?
들길이 양산을 받으며
함께 걸어가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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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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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 조병화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 거
가을은 구름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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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앗 / 허영자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 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웃음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망헤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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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꽃 /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
===============
+ 가을 밤 / 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하나 둘 꺼져가면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밤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들판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 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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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에 / 오세영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너와 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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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엔 1 / 추경희
시간이 가랑잎에 묻어와
조석으로 여물어 갈 때
앞 내 물소리
조약돌에 섞여
가을 소리로 흘러내리면
들릴 듯 말 듯
낯익은 벌레 소리
가승에서 머문다
하루가 달 속에서 들을 켜면
한 페이지 그림을 접 듯
요란했던 한 해가
정원 가득 하늘이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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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에게 /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구이 되고 싶었다
=============
+ 늦가을 / 김지하
늦가을 잎새 떠난 뒤
아무것도 남김 없고
내 마음 빈 하늘에
천둥소리만 은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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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날 / 노혜경
오늘 하루는 배가 고파서
저녁 들판에 나아가 길게 누웠다
왜 나는 개미가 되지 못했을까
내가 조금만 더 가난했다면
허리가 가늘고 먹을 것밖에는 기쁨이 없는
까맣고 반짝거리는 벌레였다면
하루 종일이 얼마나 행복할까 먹는 일 말고는
생각해야 할 아무런 슬픔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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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노래 / 이해인
하늘은 높아가고
마음은 깊어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이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 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 없이
강이 흐르게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 때마다
한 움큼의 시들을 쏟아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가고
가을은 깊어가네.
----------------------------
+ 가을바람 / 이해인
숲과 바다를 흔들다가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깨우는 바람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놓고
햇빛과 손잡은
눈부신 바람이 있어
가을을 사네
바람이 싣고 오는
쓸쓸함으로
나를 길들이면
가까운 이들과의
견뎌 낼 수 있으리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사랑과 기도의
아름다운 말
향기로운 모든 말
깊이 접어두고
침묵으로 침묵으로
나를 내려가게 하는
가을바람이여
하늘 길에 떠가는
한 조각구름처럼
아무 매인 곳 없이
내가 님을 뵈옵도록
끝까지
나를 밀어내는
바람이 있어
나는
홀로 가도
외롭지 않네
===============
+ 가을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의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 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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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에는 / 강인호
물소리 맑아지는 가을에는
달빛이 깊어지는 가을에는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에는
쑥부쟁이 꽃피는 가을에는
어인 일인지 부끄러워진다
딱히 죄지은 것도 없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가을에게
자꾸만 내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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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에는 / 박제형
가을에는 잠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 수선스러운 준비는 하지 말고
그리 가깝지도 그리 멀지도 않은 아무 데라도
가을은 스스로 높고 푸른 하늘
가을은 비움으로써 그윽한 산
가을은 침묵하여 깊은 바다
우리 모두의 마음도 그러하길
가을엔 혼자서 여행을 떠날 일이다
그리하여 찬찬히 가을을 들여다볼 일이다
-----------------------------
+ 가을 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
+ 가을 편지 / 김시현
사랑한다고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고
끝내 쓰지 못하고
가슴에 고여 출렁이는
그 여러 날 동안
내 마음속 숲 에고
단풍이 들어
우수수 우수수
떨어집니다
그렇게 당신의 뜰 안에
나뭇잎 가을 편지 하나
띄워 보냅니다
밤마다 밤마다
울먹이는 숲길을 건너
나뭇잎 가을 편지 하나
띄워 보냅니다
--------------------------
+ 가을 편지 / 유안진
들꽃이 핀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외친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
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
거치른 들녘에다
깊은 밤 어둠에다
혈서를 쓰고 싶다.
----------------------------
+ 가을 편지 / 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 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 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 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 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
+ 가을 편지 / 이지영
한 해를 매달려
가슴 앓이 하던 그대
빨갛게 물들어 가을을 탄다
휑한 보도 위 구겨진 낙엽같이
두서없는 편지를 쓴다
한 해에 한 번 이 가을에
못다 부른 노래
주고 싶었던 정, 빚진 모든 것들
봇물 터지듯
한 통에 쏟아붓는다
누구도 그대가 되어
그대의 편지를 받아 보라
치친 해거름의 침몰에
남루의 옷으로 서성이는 자신
그대 편지는 자신을 비추어 보는
맑고 깊은 옹달샘
거기엔 그대와 내가 보이고,
가을은 끝없는 편지를 쓴다
수채화 같은 사연을 담아
그대를 보내고 있다.
===============
+ 가을 편지 / 홍경애
아득한 갈색 추억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면
찬란한 여명이
산자락에서 단풍 되어
저 높이 날으는 철새처럼
자유가 그리워 둥지를 틀고
청명한 이 가을 하늘을
노래하는 채색의 그리움
오늘도 호숫가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한 폭의 수채화를
투명하고 아름답게 그려 가려나
--------------------------
+ 가을편지 1 / 이해인
하늘 향한 그리움에
눈이 맑아지고
사람 향한 그리움에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
순하고도 단호한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용서하며
산길을 걷다 보면
톡, 하고 떨어지는
조그만 도토리 하나
내 안에 조심스레 익어가는
참회의 기도를 닮았네.
-----------------------------
+ 가을 편지 2 / 이해인
도토리만 한 꿈 한 알
밤 한 톨만 한 기도 한 알
가슴에 품고
길을 가면
황금빛 벼 이삭은
바다로 출렁이고
단풍 숲은 불타며
온 천지에 일어서고
하늘에선 흰 구름이
큰 잔치를 준비하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살아 있음의 축복
가을이여, 사랑이여
----------------------------
+ 가을 하늘 / 오보영
가슴엔
가득
당신을 품어 안고
두 눈은
항상
당신을 향해 봅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채워주니까요
당신은 늘
내게
행복을 안겨주니까요
===============
+ 가을 하늘 / 윤이현
토옥
튀겨 보고 싶은,
주옥
그어 보고 싶은,
와아
외쳐 보고 싶은,
푸웅덩
뛰어들고 싶은,
그러나
머언, 먼 가을 하늘.
----------------------------
+ 가을 햇볕 / 안도현
가을 햇볕 한마당 고추 말리는 마을 지나면
가슴이 뛴다
아가야
저렇듯 맵게 살아야 한다
호호 눈물 빠지면 밥 비벼 먹는
고추장도 되고
그럴 때 속을 달래는 찬물의 빛나는
사랑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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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햇살 / 오광수
등 뒤에서 살짝
안는 이 누구신가요?
설레는 마음에
뒤돌아보니
산모퉁이 돌아온
가을 햇살이
아슴아슴 남아있는
그 사람 되어
단풍 조막손 내밀며
걷자 합니다
-----------------------------
+ 슬픈 가을 / 이영춘
쨍그렁 깨질 듯한 이가을 하늘
눈물겹다
무거움의 존재로 땅 끝에서 발붙인 짐승
부끄럽다
멀리 구름은 유유히 흘러가고
가을 잠자리들 원 그리며 무리 짓는다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이 가을 햇살 아래
아, 아프구나! 가볍지 못한 존재의 무게가
제 무게 이기지 못하여 모두 털고 일어서는
이 가을날에 나는
무엇이 이토록 무겁게 허리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
+ 가을 그림자 / 김재진
가을은 깨어질까 두려운 유리창
흘러 운 시간들 말갛게 비치는
갠 날의 연못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찾으러
집 나서는 황혼은
물 빠진 감피에 근심 들이네
가을날 수상한 나를 엿보는
그림자는 순간접착제
빛 속으로 나선 여윈 추억 들춰내는
가을은 여름이 버린 구겨진 시간표
-----------------------------
+ 가을 아침에 / 윤동주
어둑한 퍼스렷한 하늘 아래서
회색의 지붕들은 번쩍거리며,
성깃한 섭 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 말락 하는 메시 골에서는
안개가 스러히 흘러 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 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쌓여 오는 모든 기억은
피 흘린 상처조차 아직 새로운
가주난 아기같이 울며 서두는
내 영을 에워싸고 속살거려라.
그대의 가슴속이 가볍던 날
그리운 그 한때는 언제였었노!
아아 어루만지는 고운 그 소리
쓰라린 가슴에서 속살거리는,
미움도 부끄럼도 잊은 소리에,
끝없이 하염없이 나는 울어라
-----------------------------
+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리며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이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
+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
+ 가을의 향기 / 김현승
남쪽에선 과수원에 능금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
+ 가을이 오면 / 홍수희
나무야
너처럼 가벼워지면
나무야
너처럼 헐벗겨지면
덕지덕지 자라난
슬픔의 비늘
쓰디쓰게
온통 떨구고 나면
이 세상
넓은 캔버스 위에
단풍 빛으로 붉게
물감을 개어
내 님 얼굴 고스란히
그려보겠네
나무야
너처럼만 투명해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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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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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가을이다 / 이승훈
피는 불이 되고
불은 연기가 된다
이제 나는 연기다
나는 풀풀 풀 날린다
시간이 딸꾹질하는 뇌에는
연기만 가득하다
또 가을이다
=================
+ 오래된 가을 /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
+ 이 가을에는 / 김남주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랑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 옥일까 대전 옥일까 아니면 대구 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리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면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 내려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아이들의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갓 그들과 함께 나도 일하고 놀고 싶다
허리 이 손목에서 오라 풀고 사슬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 한번 나도 걷고 싶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논둑길 밭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고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주지를 않는다
내를 끼고 강을 건너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에 돈다
저 건너 마을에서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을 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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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을 지나오다 / 김수영
참나무와 졸참나무의 숲입니다
나뭇진이 흐르던 자리
(상처 없는 영혼도 있을까요)
가을이 오면 그 나무의 단풍이 많겠지요
오솔진 숲으로 흐르는 여름 해의 눈부신 역광
발효한 빛의 향기가 헤매이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꿀에 취해
더러운 흙에서 나서 죽을 때까지
쓸쓸하여 허기지는 것들
가을까지라면 더욱 무겁겠지요
푸른 채 떨어진 나뭇잎과 굳어가는 나무줄기
잘 구워진 깊은 우물 같은 마음의 맨 밑바닥에서
벗겨낸 한 두름의 그늘은
그 그늘이 된 자리에서
더 낮은 곳으로 쟁쟁이 울립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있을까요
살면서 오래 아파함도 기쁨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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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어가는 가을 / 이해인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 없는
고요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
+ 가을이 나를 보고 / 나태주
고발할 것이 있으면 고백하라 한다.
죄진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빚진 것이 있으면 부채 명세서를 공개하라 한다.
고백할 것이 있으면서 고백하지 않고
죄진 것이 있으면서 공개하지 않으면
청진기를 들이대겠다고
사뭇 으름장이다.
가을은 돋보기 안경알 너머
나를 관찰하는 누군가의 눈,
껌벅이지 않는 눈,
너무나 맑고 비정적이고
이지적이다.
가을 앞에서 나는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한 마리 곤충
가을아,
잠깐만 너의 눈을 감아 주지 않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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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아, 어쩌라고 / 임영준
그렇게 갑자기
아침저녁으로
매몰차게 뿌리치면
우린 어쩌라고
툭 건드리면 터져버릴 듯
울먹 기리면서
구석구석 후벼대면
난 어쩌라고
새파랗게
뭣도 모르는 것처럼
다 내려놓고 떠나버리라고
자꾸만 홀겨대면
다들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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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창문을 열면 / 이외수
어디쯤 오고 있을까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도
깊어지는 사람 하나
단풍나무 불붙어
몸살 나는 그리움으로
사태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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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 내게 말하네 / 나상국
가을이 내게 말하네
"가을은 사랑하기 좋은 계절인데
뭘 하느냐고"
가을은 또 말하네
"누군가 사랑하려면
마냥 찾아오길 기다리지 말고
무작정 길을 나서서
사랑을 찾아보라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단풍이 왜 저렇게 붉은 줄
너는 아느냐고"
그 뜻을 잘 새겨 보라네
난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
왜 단풍이 저렇게 화려한 색의
옷으로 갈아입을까?
단풍이 곱게 물드는 이유는
나무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라네
가을이 내게 하고자 하는 말은
사랑은 스스로 찾아서
스스로 지키고 가꾸라는
말인 듯하네
====================
+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 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 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네 보담 더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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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 이해인
1
하늘이 맑으니
바람도 맑고
내 마음도 맑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으로 잘 익은
그대의 목소리가
노래로 펼쳐지고
들꽃으로 피어나는 가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물들어
덜어질 때마다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한 잎 두 잎
익어서 떨어집니다
2
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어서 조용히
웃으며 걸어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우리, 사랑의 첫 마음을
향기롭게 피워 올려요
쓴맛도 달게 변한
오랜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함께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불안해도
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 없이 서늘한 가을바람
가을 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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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김준엽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에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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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비 내리는 길을 걸으면 / 용혜원
가을에 축축하게 내릴 때마다
나무들은 알몸이 되고 싶은지
단풍 든 잎새들을 떨궈냈다
비 내리는 길 바라보고 있으면
고독 속에 신열을 앓던
외로움 덩어리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거리에 떨어진 낙엽들이
흥건히 빗물에 젖고
한산해지는 저녁 무렵
가을 길을 걷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몰랐다
가을은 왜 우리 가슴에
짙게 머물다 가는가
세월 가듯 구름 가듯
모두가 떠나가야 하는
삶의 의미를 알려준다
가을비가 내리면
단풍으로 물든 이야기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가을 빗속을 걸어 들어가며
사랑하는 이와 다정하게
팔짱 끼고 걸으면
아픈 자국을 남겨놓고 떠나는
가을도 쓸쓸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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