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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心에젖어

가을 시 모음

가을하늘을 보며/박재삼

일년 중 제일로

찬란하게 내리는

이 햇빛을 송두리째 받고

지금 곡식이 팽팽하게

여물이 다 든

이 빛나는 경치를 보게.

거기다 바람까지

살랑살랑 어느새

찬바람을 거느리고

잎새 둘레에 왔네.

이런 가을을

그 많은 세월 중

4분의 1이나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

물 맑고 공기 좋은

여기를 피하고

도회지로 몰린 사람들아.

사람이 살기 편한

이 절실한 가을을

몸에 붙이지 않고

살이 어떻게 찔꼬.

섭섭하게

아주 섭섭하게

가을하늘만 드높이 개었네.

 

가을의 기도/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 볕/나태주

 

누님, 너무 곱소

가을볕에 새빨가이 익은

고추들 나란히 누워

비린 창자 속 말리고 있는

남장을 등에 지고서

골목길 가득 고여 출렁대는

햇살의 물결을 발부리로

찰랑찰랑 걷어차면서

이리로 오시는 누님의 한복 차림이

너무 고와서 눈물겹소

글쎄 나는 누님이 입고 있는

한복이 더 어여쁜지

누님의 웃음 머금은 얼굴의 초승달

두 개의 눈썹이 더 고운지 가늠이 안 가

한동안 망설였지 뭐유

누님, 너무 곱소

 

 

가을사랑/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떄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가을엽서/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습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오메, 단풍 들것네/김영랑

오메,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닢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메,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메, 단풍 들것네.

 

가을바람 / 이해인

숲과 바다를 흔들다가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깨우는 바람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놓고
햇빛과 손잡은
눈부신 바람이 있어
가을을 사네

바람이 싣고 오는
쓸쓸함으로
나를 길들이면
가까운 이들과의
눈물겨운 이별도
견뎌 낼 수 있으리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사랑과 기도의
아름다운 말
향기로운 모든 말
깊이 접어두고
침묵으로 침묵으로
나를 내려가게 하는
가을바람이여

하늘 길에 떠가는
한 조각구름처럼
아무 매인 곳 없이
내가 님을 뵈옵도록
끝까지
나를 밀어내는
바람이 있어

나는
홀로 가도
외롭지 않네.

 

+ 晩秋 / 이용악

노오란 은행잎 하나
호리호리 돌아 호수에 떨어져
소리 없이 湖面을 미끄러진다
또 하나 ㅡ

조이삭을 줍던 시름은
요즈음 낙엽 모으기에 더욱더
해마알개졌고

하늘
하늘을 쳐다보는 늙은이 뇌리에는
얼어죽은 친지 그 그리운 모습이
또렷하게 피어오른다고
길다란 담뱃대의 뽕잎 연기를
하소에 돌린다

돌개바람이 멀지 않아
어린 것들이
털 고운 토끼 껍질을 벗겨
귀걸개를 준비할 때

기름진 밭고랑을 가져 못 본
부락민 사이엔
지난해처럼 또 또 그 전해처럼
소름 끼친 대화가 오도도오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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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맛 / 송정숙

바람에 낙엽 떨어지니 쓸쓸하더니
연시감 하나에
가을 맛이 달달하니 좋다

내 이름

영롱한 이슬 내리고
찬서리 맞는 나를 국화라고하지
나는 그들에게
마지막 길, 벗도 된다

시월이 간다

저기 가는 이 누구이길래
저리 고운 이를 외면하고 가는가
귀한 사랑은 간직하는 것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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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밤 / 임영준

맑은 밤
하늘을 보니
여린 별들이
사분거리고
밤이슬에
포만한 잎새들은
흔들리는 마음을
부추긴다
소슬바람에
헝클어진 날들은
맥없이 헤매다니고
영역을 넘나드는
벌레소리만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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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비 / 목필균

한나절 비에 젖은 나무들이
빗방울로 단풍든 속빛을 풀어냈다

접혀진 기억의 조각들이
따뜻한 눈빛이 오가던 날이
​삶의 비늘을 떨어낸다

초로의 혈압이 오르고
여행이 사치가 되어버린 이즈음
생각만으로도 젖어드는 사람들

마흔 일곱에 돌아가신 어머니
자식 잃은 외할머니의 눈물
​묵묵히 제 할일에 빠져있던 나

지금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지
불혹의 언덕에 서 있는 딸은
대를 이은 핏줄이 아름다운지

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옷깃 여민 우산 속 사람들

유난히 붉은 단풍잎 한 장
축축한 주머니 속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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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비 / 성백군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집니다

가을 하늘의 주문입니다

더 맑아 사라지기 전에
너무 높아 멀어지기 전에
미리 찍어놓은
그리움의 낙관이지요

파란 하늘의 눈물에
울긋불긋
가을 단풍이 멍드네요

떠나가는 하늘과
떨어지는 낙엽, 사이에서
누구의 슬픔인지 알 수 없다고
바람이 지나가면서 흐느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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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국화 / 천상병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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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가을 / 김용택

산 아래
동네가 참 좋습니다
벼 익은 논에 해 지는 모습도 그렇고
강가에 풀색도 참 곱습니다
나는 지금 해가 지는 초가을
소슬바람 부는 산 아래 서 있답니다
산 아래에서 산 보며
두 손 편하게 내려놓으니
맘이 이리 소슬하네요
초가을에는 지는 햇살들이 발광하는 서쪽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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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나무 / 정용진

태양빛이 얇아지고
지나는 바람결이 소슬해지면
시냇가에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듯
나뭇잎들을 하나 둘 떨구면서
가을 나무가 하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너무 뜨겁던 날 괴로웠다.
폭풍우가 쏟아지던 밤이 힘들었다.
성숙한 과일들이
지체에서 떨어져가던 날
마음이 몹시 아팠다.
찬 서리가 내리치던 초겨울
끝내 뜨겁고 붉은 눈물을 흘렸다.

가을 나무는 벗은 채
신 앞에 홀로서는
단독자의 자세로
지난 삶을 심판 받는다.
내면 깊숙이 고뇌의 흔적으로
가슴 속에 둘려지는 연륜(年輪).

가을 나무는
알몸으로 서서 흰 눈을 기다리며
가지마다 볼록볼록
생명의 꽃봉오리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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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바람 / 목필균

어느 새 여름이 흘러갔다

형벌처럼 견디기 힘들던 열대야도
구멍 난 여름을 둘둘 몽치고 갔다

튼실한 결실을 받들고
누렇게 사그라진 풀밭에 이는 바람 사이로

초로의 나를 블로그에서 찾아보고
다복한 가족사진 속에 안부를 그렸다는
카톡카톡 소식이 들어왔다

아 ~ 그 사람​
아득히 묻어둔 속이야기 꿈틀거리며
고개 내미는 계절 품으려고
어제 독감 에방주사를 맞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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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산행 / 박인혜

하늘 위로 단풍잎 열리어 있네
잎 속에
지나간 시간들 화려하게 피어나고
살아낸 날들이
말없이 떨어지며
나그네 발자국에
다정한 속삭임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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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에게 / 고은영

나는 삶의 내적 균형을 잃은 지 오래고
당신의 모습도 균열의 전철을 밟고 있다
밤마다 잠들지 못하는 쓸쓸한 강변에
당신은 바람의 갈기로 서 있는가
아니면 굳은 가슴 두드리는 당신은
희망을 위해 떠남을 준비하는가

청춘의 앳된 기억을 떠올리는 당신도
맨 가슴을 드러내고 돌아오지 않는
소멸의 어느 궤도를 헤매고 있는 것인가
그곳은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마당
떠남을 위한 떠남인가 만남을 위한 떠남인가

당신은 후미진 이방으로 추락하는
비로소 서글픈 실존이다
당신은 왜 이리 긴 애증으로
시간이 갈수록 쓸쓸함을 가중시키고
불면의 그리움을 증폭시키는가

오늘 밤 세속에 잊힌 섬으로 오로지 시공을 떠돌다가
영혼의 그루를 후비던 삶의 상처를 위해
이제야말로 당신을 바라보는 삶의 더께에
나는 눈물나는 기도를 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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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연가 / 김용호

잎이 유달리 큰 오동잎 사이로 북쪽에서
가을 바람이 불어오듯 쓸쓸한 내게
조금은 쓸쓸한 인연이 되어 준 그대

이 가을에 나뭇잎이 퇴색해 가려 합니다.
내가 행복 할 수 있다면 가을 바람처럼
쓸쓸하게 찾아가 그대의 푸른 꿈을
울긋불긋 퇴색시켜도 되겠습니까?

늦가을에 떨어진 낙엽들이 뒹구는
빈 공간에 아픈 추억을 묻어 두고 다시
환생 할 내 푸른 꿈을 그대 가슴에
얼어붙지 않도록 미리 심어 두어도 됩니까?

그대는 외로운 이 가을에 내 외로운
마음을 감싸 줄 수 있는 열매를
무룩 익게 하는 가을 햇살 일 수도 있고
내 고리타분한 사연을 함께 해줄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내 별 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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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예언 / 백원기

가슴을 열고 안아주는 가을
울긋불긋 기쁨 건넬 때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언자네

가을 풍치에 젖어 들지라도
먼 곳을 바라보며
얼어붙는 하얀 겨울 그려보라 하네

가을은 잎새 하나하나에
빨강 노랑 갈색 물 들여놓고
마른 대지 위로 뛰어내리게 한다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
일깨워주는 가을
말없이 화사한 모습 보여주다
흐린 날이면 찬 바람 불어
이파리 하나씩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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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시 / 곽재구

오후 내내
나룻배를 타고
강기슭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당신이 너무 좋아하는 칡꽃 송이들이
푸른 강기슭을 따라 한없이 피어 있었습니다
하늘이 젖은 꿈처럼 수면 위에 잠기고
수면 위에 내려온 칡꽃들이
수심 한가운데서
부끄러운 옷을 벗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어가고
지천으로 흩날리는 꽃향기 속에서
내 작은 나룻배는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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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시 / 김현승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들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汽笛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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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이별 / 오보영

화려하게
떠나간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겨울 향해 가는 건 마찬가진 걸

빛바랜 채
떨어진들

무에 그리 대수리요

낙엽 되어 구르는 건 마찬가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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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저녁 / 김현승

긴 돌담 밑에
땅거미 지는 아스팔트 위에
그림자로 그리는 무거운 가을 저녁
짙은 크레파스의 가을 저녁

기적은 서울의 가장자리에서
멀리 기러기같이 울고
겹친 공휴일을 반기며
먼 곳 고향들을 찾아 가는
오랜 풍속의 가을 저녁

사는 것은 곧 즐거움인 가을 저녁
눈들은 보름달을 보듯 맑아 가고
말들은 꽃잎보다 무거운 열매를 다는
호올로 포키트에 손을 넣고 걸어가도
외로움조차 속내의처럼 따뜻해 오는
가을 저녁

술에 절반
무등차에 절반
취하여 달을 안고
돌아가는 가을 저녁 ㅡ
흔들리는 뻐스 안에서

그러나 가을은 여름보다 무겁다!
시간의 잎새들이 떨어지는
내 어깨의 제목 위에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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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저녁 / 이동순

오늘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길에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우수수 몰려다녔습니다
그대에게 전화를 걸어도
신호만 갑니다
이런 날 저녁에
그대는 어디서 무얼하고 계신지요
혹시 자신을 잃고
바람찬 길거리를 터벅터벅
지향없이 걸어가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이 며칠 사이
유난히 수척해진
그대가 걱정스럽습니다
스산한 가을저녁이 아무리 쓸쓸해도
이런 스산함 쯤이야
아랑곳하지 않는
그대를 믿습니다
그대의 꿋꿋함을
나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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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지붕 / 권태응

사다리를 타고서 한층 두층
언니 따라 지붕에 올라갑니다
박덩이 뒹굴대는 한옆에다
빨강 고추 흰 박고지 널어 놓아요

집집마다 지붕에도 울긋불긋
여기저기 그림같이 아름다워요
내려갈 줄 모르고 나는 자꾸만
멀리 멀리 사방 경치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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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편지 / 고정희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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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하늘 / 박인걸

명경(明鏡)이 가을 하늘에
호수처럼 떠 있고
우러러 볼 때마다 양심(良心)이
그 속에 어른거린다.

투명한 가을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가슴으로 쏟아지고
마음을 샅샅이 투영(透映)하니
고개를 들기가 짐스럽다.

가을 하늘을 우러러
떳떳한 사람 어디 있을까
구름 맴도는 하늘이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곱게 익어가는 단풍잎만
맑은 하늘아래 당당(堂堂)하다.
지은 죄가 하나도 없으니
무엇이 무서 우리요.

햇살 쏟아지는 언덕에서
마음을 다시 추스른다.
가을 하늘을 맘껏 쳐다보며
무안하지 않은 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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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하늘 / 유종인

하늘이 더 깊어진 것이 아니다
눈앞을 많이 치운 탓이다

밥그릇처럼 뒤집어도
다 쏟아지지 않는 저 짙푸른 늪같이
떨어지는 곳이 모두 바닥은 아니다

열린
바닥이 끝없이 새떼들을 솟아오르게 한다

티 없다는 말, 해맑다는 말!
가을엔 어쩔 수 없다는 말, 끝 모를 바닥이라는 말!

바닥을 친다는 것 고통을 저렇게 높이 올려놓고
바닥을 친다는 것
그래서 살찌고 자란다는 것!

당신이 내게 올 수도 있다는 것
변명은 더 이상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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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하늘 / 정도원

오늘처럼
눈부시도록 하늘이 맑은 가을날이면
빠알간 사과들이 뉘긋뉘긋 익어 가는
황해도 사리원 과수원길 어드메쯤이나
영변 박천 아니면
함경도 신포 같은 작은 시골읍 어느 곳
서러운 내 누이의 눈물방울처럼 투명한
북위 사십 도의 찬 하늘을 머리에 이고
코스모스 한들거리며 떼지어 핀 학교길을
어느 여인이 걸어가고 있을 것 같다
인민학교 하급반을 맡고 있는 여선생이거나
협동농장의 여맹간부일지도 모를 어느 여인이
검정 치마 흰 저고리에 가슴을 여미고
신발은 검은 하이힐이 오히려 더 어울리는
갸름한 얼굴에 서글한 눈매를 하고
기왕이면 고웁게 빗어올린 쪽머리에
무우싱 같은 푸른 젊음이 버젓이 남아 있는
30대 중반의 조용한 여인이라면 더욱 좋겠지
그렁그렁한 눈 가득 조선의 슬픔을 담은
내 마음 속 누이 같은 모습을 한 여인이
필시 북녘 땅에 지금도 있을 것 같다
오래 전부터 내 여인이여!
이 땅 내가 사랑해야 할 몫의 여인이여!
한번쯤 그 여인과 사랑을 하고 싶다
이곳 남녘에도 그대의 서늘한 눈망울처럼
우수수 가을이 왔다고 편지라도 쓰고 싶다
쳐다보면 자꾸만 눈물이 나는
저 코스모스 위 북녘의 가을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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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햇볕 / 고은기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오래 흘러온 강물을 깊게 만들다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여고 2학년 저 종종걸음 치는 발걸음을
붉게 만들다, 묽그스레 달아오른 얼굴은
생살 같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다
그리하여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멀어지려 해도 멀어질 수 없는 우리들의 손을 붙잡게 하고
끝내 사랑한다 한마디로
옹송그린 세월의 어느 밑바닥을 걷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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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가을 / 도종환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은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가을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너도 잘 견디고 있는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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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가을엔 / 윤인환

생각하는것도 어쩜 사치인지도 모른다
인고의 세월 지탱한 결실에 대하여
죽어져 가는 것들에 대한
깊은 경외도 표하지 못한채
홀로 운다는것 또한 사치인지도 모른다
조용히 하늘을 우러러
맑은 바람소리를 가슴에 담을 일이다
낙엽의 춤사위를 한없이 바라볼 일이다
허공을 가르는
새들의 날개짓을 바라볼 일이다

그저,
행복한 마음으로 정제된 침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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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수채화 / 백원기

새파란 하늘에
흰 구름 두둥실
이따금
시원한 바람 불어오면
한 옥타브 올리는 매미 울음
뛰놀던 어린 시절 생각이 나네

장마가 물러간
이달 팔월
내일모레 글피면
칠석 지나 입추
가을 수채화 그려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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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앞에서 / 김덕성

여름이 간데
벌써?
벌써가 뭐야 내일이 입추인데...

오늘 아침
등나무 밑에서 할머니들의 이야기

내일은
가을에 접어든다는 입추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으로
날씨는 여전한데

그래도 이치에 어김없는 자연은
가을이 온다
높고 푸른 청명한 하늘
바람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가을소리를 듣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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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문턱 / 문재학

애처로운 매미소리 잦아지고
허공에 맴돌던 산들바람
창문을 넘나드니
아 가을인가

청명한 하늘을 향해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에
가을빛이 묻어 왔는가.

들판가득 흘러넘치는
구수한 가을향기는
가을 문턱을 녹여 내리고

푸른 달빛이 쏟아지는 밤이면
잠 못 이루는 귀뚜라미 소리에
옛 추억의 그림자들이
깊은 상념의 늪으로 빠져드니
정녕 가을인가.

세월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또 한해의 여름이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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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소원 / 이시영

내 나이 마흔 일곱
나 앞으로 무슨 큰 일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진즉 그것을 알았어야지!)
틈나면 (실업자라면 더욱 좋고)
남원에서 곡성 거쳐 구례 가는 섬진강 길을
머리 위의 굵은 밀잠자리떼 동무 삼아 터덜터덜 걷다가
거기 압록 지나 강변횟집에 들러 아직도 곰의 손발을 지닌
곰금주의 두툼한 어깨를 툭 치며
디 맑은 공기 속에서 소처럼 한번 씨익 웃어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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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의 향언 / 김덕성

하늘빛 내리는 가을
울긋불긋 물들이던 대자연
이제 환상적인 빨간 잔치는 끝인가

빨간 옷을 입은 채
따듯한 가지에 매달려
하느작거리던 단풍
붉은 꽃빛으로 마음껏 뽐내다 가는
저 걸음 아름답다

그림같이 그려진 가을
지상에 벌어진
총 천연의 화려한 꿈의 향연

후회 없이 차분하게
팔랑거리며 떠나가는 단풍
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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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한 조각 / 임영준

우리 함께 흐드러지던
몇 굽이 메밀꽃밭

늘 그대에게 먼저
달려와 안기던
절정의 단풍

이제 내 곁을 지키는 것은
앙상한 가을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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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겨진 가을 / 이재무

움켜진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 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이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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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속의 가을 / 최영미 

바람이 불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엽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이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는 시멘트 바람에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오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그림자 밟아가며,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
알미늄 샷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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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함된 가을 / 조정권

먼 곳에서 하늘이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어느 두 손으로 묵묵히 용납합니다

가을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나를 짝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사과나무가 되어
밤늦도록 책상 앞에 사과나무 잎사귀를 펼쳐 놓고
시를 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사과나무가 되어
무수히 열린 사과열매를 등불로 삼아
시를 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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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가을 / 문정희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이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들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별, 꽃, 잎,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가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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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오는 소리 / 김오룡

저 만큼서 가을 오는 소리가 들린다
무더운 여름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시원한 가을 바람이 불어 온다
가을 오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 잎 물들어 가는 소리,
살포시 한잎 두잎 어느새 노랑 파랑 빨강으로 옷입고
이 가을에 여인들은 사랑을 노래한다
가을 오는 소리가 들린다
수확하는 농부들의 아름다운 땀방울 소리다
잃어버린 지평선 넘어 평화로움의 소리, 자연의 아름다운 소리,
이 가을에 그대의 마음에 머물고 싶다
가을 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 맑은 가을에 아름다운 숨결들이 여기저기 나부낀다
이 가을에 그 분과 함께 너와 나
감동의 물결, 희망의 물결, 사랑의 물결들로 가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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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은 눈(眼)의 계절 / 김현승

이맘때가 되면
당신의 눈은 나의 마음
아니, 생각하는 나의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신의 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낙엽들은 떨어져 뿌리에 돌아가고
당신의 눈은 세상에로 순수한 언어로 변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가을 하늘 만큼이나 멀리멀리 당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서 생각하고
그눈을 나의 영혼 안에 간직하여 두는 것입니다

낙엽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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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선 굽는 가을 / 최동호

썰렁한 그림자 등에 지고
어스럼 가을 저녁 생선 굽는 냄새 뽀얗게 새어나오는
낡은 집들 사이의 골목길을 지나면서
삐걱거리는 문 안의

정겨운 말소리들 고향집 불빛 그리워 되돌아보면
낡아가는 문틀에
뼈 바른 생선의 눈알같이 빠꼼히 박힌
녹슨 못자국

흐린 못물 자국 같은 생의 멍울이 간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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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상(哀想)의 가을비 / 김덕성

가을비는 구슬프다
나처럼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흘리는
소녀의 눈물인양

내 마음에 물안개가 피어나면서
밀려오는 애절함
울적한 마음에 떠오르는 어머니
비에 젖는다

그리움도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나
믿음으로 살아가거라
내게 믿음을 남겨 놓으신 어머니
그 발자국을 포개며
살아 온 나

오늘도 그 발자국위에
내 발자국으로 하나하나 포개며
가을비에 젖으면서
가야 할 나의 길을 간다
믿음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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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가을에 나는 / 김남주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다른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구옥일까 아니면 대전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아이들이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저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나도 그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오라 풀고 사슬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 한번 나도 걷고 싶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논둑길 밭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무를 뽑아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주지를 않는다
내를 끼고 강을 건너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을 돈다
저 건너 마을에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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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은 아름답다 / 주요한

빗소리 그쳤다 잇는
가을은 아름답다
빛 맑은 국화송이에
맺힌 이슬 빛나고
꿩 우는 소리에 해 저무는
가을은 아름답다

곡식 익어 거두기에 바쁘고
은하수에 흰 돛대 한가할 때
절 아래 높은 나무에
까마귀 소리치고
피묻은 단풍잎 바람에 날리는
가을은 아름답다

물없는 물레방아 돌지 않고
무너진 섬돌 틈에서
달 그리운 귀뚜라미 우지짖는
멀리 있는 님생각 간절한
한 많은 철이여!

아름다운 가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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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의 가을 추억 / 윤갑수

들녘엔 가을바람 속 절임에
통통 잘 여문 벼들이 황금물결
춤을 추니
한가로운 고추잠자리 떼 창공을
날며 지는 가을을 아쉬워한다

어릴 적 고향의 가을은
잔별 반짝이는 밤 싸릿대 엮은
게 발을 큰 냇물에 쳐놓고
새벽녘 한 양동이 가득 참게를
잡아오시던 아버지의 미소가
그리운 계절

엄마가 게장국도 끓여주시던
가을은 매 돌아오건만
머물지 않은 동심은 멀어져가고
햇살고운 가을 녘에 파고드는
지난 그리움이 오늘도 눈빛에
아롱져 눈물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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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석양빛에 / 오애숙

해거름의 들녘에서 하늘 시리게
가을이 그리워 요동치는 심연에
풍성한 날갯짓으로 가슴 벅차게
외기러기로 남겨진 까닭이런가

그 옛날 그대와 갈대밭 사이로
석양빛에 첫사랑의 고백 피어
오늘따라 오롯이 그리움 속에
석양 낙조 물결로 일렁인 마음

빛바랜 커튼 사이 세월 지나도
고여든 잔잔한 호숫물 모양새로
연한 파문 만들어 깊어가는 이밤
그대 얼굴 가을 되어 아른거린다

가을 길섶에 피는 들국화 향그럼
어느 사이 내 가슴에 그대의 향기
한 송이 시어가 심연에서 날개 쳐
갈 하늘의 시린 가슴에 피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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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로 오는 가을 / 유재영

달빛이나 담아둘까 새로 바른 한지창에
누구의 그림에서 빠져나온 행렬인가
기러기 머언 그림자 무단으로 날아들고

따라 놓은 찻잔 위에 손님같이 담긴 구름
펴든 책장 사이로 마른 열매 떨어지는
조용한 세상의 한 때, 이 가을의 은유여

개미취 피고 지는 절로 굽은 길을 가다
밑둥 굵은 나무 아래 멈추어 기대서면
지는 잎, 쌓이는 소리 작은 귀가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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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일몰을 위하여 / 배한봉

아름답구나 일몰
노동 끝낸 농부의 휴식 물들이며
산과 들
강물 속으로 깃드는
한 풍경이여 눈물겹게 아름답구나
고단함조차 이런 때는
담배불 당기는 마음 아래 집 지어
어떤 생각의 무거움이 토하는 기침마저 씻어버리고
탱탱하게 차오르는 바람도
서걱서걱 뼈아픈 시절 곁에 눕지 않겠느냐
홀로 깊어진 시간의 층계에서
기우뚱 몸 굽히는 일몰
아름답구나 저기 농부 어깨 위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물무늬로 일렁이는
터엉 비어 가득 찬
무욕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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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도 가을이었네 / 박얼서

이 가을날에
책갈피를 뛰쳐나온 샛노란 은행잎 한 장
어떤 그리움
그 소녀였었네

그때도 이 무렵이었을 걸
비린내를 굽던 옴팡집 주모의
노련한 사랑담 곁에 앉아
취기와 시름하던 그날도
꼭 오늘 같은 날이었네

이 가을엔
낙엽 길에 스쳐가는 바람마저도
그리움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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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이 그린 가을 경치 / 윤의섭

가을에 뜨는 해
찬이슬을 데려오고
색칠할 물감통은 달님이 마련하여

산마루의 하얀색은
별들이 뿌리고
산등의 붉은 물은 구름이 칠을 한다

높은 산의 붉은색은
큰 새들이 먼저 보고

얕은 산의 오색은 작은 새가 나눠 보며
제각기 색의 소리 단풍산에 보탠다.

바위틈의 산짐승들
계류의 물소리를 옥색이라 부르고

물길 쫓는 잉어의 굽이 도는 푸른 물결
강물에 금줄 그어 가을을 그린다

한 발 늦은 화공들 화필에 물감 들고
여백을 찾아보나
빈틈없는 조화에 안타가워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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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음이 타는가을 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앉아 있는 마음일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 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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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에 부치는 노래 / 노천명

가을 바람이 우수수 불어옵니다
신이 몰아오는 비인 마차 소리가 들립니다
웬일입니까
내 가슴이 써-늘하게 샅샅이 얼어 듭니다

"인생은 짧다"고 실없이 옮겨 본 노릇이
오늘 아침 이 말은 내 가슴에다
화살처럼 와서 박혔습니다
나는 아파서 몸을 추설 수가 없습니다

황혼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섭니다
하루하루가 금싸라기 같은 날들입니다
어쩌면 청춘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었습니까
연인들이여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은 듯이 지나 버리는 생의 언덕에서
아름다운 꽃밭을 그대 만나거든
마음대로 앉아 노니다 가시오
남이야 뭐라든 상관할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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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책갈피에서 / 신형건

무심코 펼쳐본 책갈피에서 팔랑
노랑나비처럼 은행잎 하나가 날아왔습니다
그대였지요, 언젠가 그 날
곱게 물든 이 은행잎을 건네준 이는
그대 눈에 비쳤던 그 빛깔 그대로
고이 간직하려고
내 마음의 갈피에 살며시 끼워두었는데
그 순간뿐, 금새 까맣게 잊고 말았지요
이처럼, 아름다운 것들은
처음 본 순간 쉽게 토해냈던 감탄사만큼이나
또 그렇게 너무도 쉬이 잊혀지나 봅니다
은행잎은 고치 속의 누에보다
더 깊은 어둠 속에서
참 오래오래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보는 밝은 빛이 너무 눈부셔
숨을 죽인채 내 손바닥에 가만히 누워 있습니다
아, 어느새 한 마리의 노랑나비로 살아나
내 마음 속으로 날아듭니다
그 빛깔 그대로
이제 다시 내 마음의 갈피에 소중히 간직하렵니다
그러나 맨 처음의 그 약속처럼
영영 잊지 않으리라는 다짐은
섣불리 하지 않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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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 홍수희

잊어줄 것은 잊어주자
나무도 한 해를 고개 숙여 감사하며
품었던 아픔 품었던 오해
훌훌 벗어 가볍게 서지 않느냐

한 발만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보이지 않느냐
상처 입기 쉬운 우리 마음도
저마다 제 안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싸리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비워버린 가슴으로 다시 만나자
바람 씽씽 부는 겨울벌판에 서서
뜨거운 손을 붙잡고 울자

우리 다시 그리운 이름이 되자
한때는 나를 슬프게 했던 사람이여
사람이여, 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이 블로그에서 다른 가을시(詩)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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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 / 임태주

가을해가 풀썩 떨어집니다
꽃살 무늬 방문이 해 그림자에 갇힙니다
몇 줄 편지를 쓰다 지우고 여자는
돌아앉아 다시 뜨게질을 합니다
담장 기와 위에 핀 바위솔꽃이
설핏설핏 여자의 눈을 밟고 지나갑니다
뒤란의 머위잎 몇 장을 오래 앉아 뜯습니다
희미한 초생달이 돋습니다
봉숭아 꽃물이 남아있는 손톱끝에서
詩는 사랑하는 일보다 더 외로운 일이라는데...
억새를 흔들고 바람이 지나갑니다
여자는 잔별들 사이로 등을 꽂습니다
가지런히 빗질을 하고
일생의 거울 속에서 여자는
그림자로 남아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씁니다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지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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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길을 걷고 싶습니다 / 용혜원

손톱 끝에 봉선화물이 남아 있을 때
가을은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이 가을 길을 그대와 함께
걷고만 싶습니다
낙엽을 밟으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을엔 시가 더 많이 써집니다
갈색 빛으로 물든 낙엽 하나 하나가
시 한 편입니다

높고 푸르기만 한 하늘이
시 한편입니다
고독해 보이는 사람들 표정 하나 하나가
시 한편입니다

이 가을 길을 그대와 함께
걷고 싶습니다
찬바람이 불어도
손을 꼭 잡고 걸으면
어느 사이에 우리들 마음도
갈색 빛으로 곱게 물들어
한 편의 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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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 문태준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몰랐지
늦가을을 제일로
숨겨놓은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살아도 살아갈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과일을 다 가져가고
비로소 그다음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혼자서
다 바라보는
저곳이
영리가 사는 곳
살아도 못 살아본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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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집으로 보내는 가을 편지 / 이태선

닫혀진 창문엔 아침 바람이 다녀갔겠다
두고 온 운동화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겠다
마른 수돗가에 쌓이는 먼지만큼
운동화 끈 고요히 바래가겠다
장독에는 티끌들 소복하겠다
서리 맞은 소국은 눈 못 뜨고
머리 숙이고 있겠다
감잎은 밤마다 혼자 지겠다
그 소리 빈 집 구석구석
마른 잎술같이 쌓여가겠다
저녁은 대문만 만지다 그냥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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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가을, 가슴에 그리운 사람 / 오애숙

가슴에 설레임으로
간절히 기다리게 하는 사람아
이가을 심연에 그대 생각으로만
일렁이게 하는 그리움의 향연

사위어 가는 이가을 끝자락
온통 불바다로 물결치는 그리움
이것이 진정 삶의 향그럼인가
삶 속에 애달픈 비련이런가

강물속에 세월 흘러갔건만
그대 그리움 첫사랑의 향연 속에
가을 깊어가는 산중 쌓인 낙엽인지
심연에 세월의 흔적만 남긴 채

그대 그리움 가슴의 멍울
흐르는 세월의 강물에 잠식하여
저만치 회도라 올 수 없으련만
고인물로 일렁거리고 있구려

이가을
가슴에 그리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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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 김용택

사랑의 온기가 더욱 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 그늘도 묻히면
길가에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릅니다

내 안에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 송이로 서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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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강처럼 / 문태준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격력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만 해서 자꾸 마음이 걸리는 그런 가을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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