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 / 정완영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 내면
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빛을 닦아 낸다
내일은 목련꽃 찾아와 구름빛도 닦으리.
-『정완영 동시선집』(지식을만드는지식, 2015)
초봄 / 이학성
말을 채 익히기도 전인
아이가
턱을 괴고 한참을 앉았다가 입을 열었다지요
어머니, 어머니 이리로 와보세요
햇볕이 요 꽃잎 속으로 들어가려고 해요
그래서 노랑꽃들이 스르르 입을 활짝 열었어요!
봄이 지나가려면 아직 먼 옛집 마당
- 이학성,『고요를 잃을 수 없어』(하늘연못, 2014)
초봄 / 조동례
비구니 수행도량 봉녕사 뜨락
지칠 줄 모르고 치솟는 분수에
봄볕 자지러진다
동안거 끝난 민들레 한 송이
토굴 밖 나오다 그만
낯뜨거워 낯뜨거워 노오랗다
무심히 바라보던 나도 문득 낯뜨거워
분수 에돌아가는데
아뿔싸, 분수의 배후가 무지개라니!
실성한 여자가 자판기 앞에 앉아
외면하는 꽃샘바람에 발끈한다
종교도 남자랑 같은 것이야!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들을세라
비구니 서넛
북 치는 연습에 여념 없는데
오늘도 내 마음의 행로는
출가도 가출도 아닌 길에서
봄볕과 실성한 여자와 비구니 틈에서
그래, 종교도 남자랑 같은 것이야
알 듯 말 듯 중얼거리며
대웅전 찾아가는 봄, 정오
- 조동례,『어처구니 사랑』(도서출판 애지, 2009)
초봄 / 허연
초봄은 우스웠다.
탈탈 털어도 나는 혼자였다.
친구들은 맥 빠진 자전거 바퀴처럼 거처에서 버려지기 시작했고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어젯밤에는 독주 몇 잔을 마셨고, 별자리처럼 늘어선 알약도 한 움큼 먹었다.
몸을 일으켰을 때 미세먼지 덮인 사거리에서 빛나는 방주 같은 게 하나 솟아오르는 걸 봤다.
귤 파는 노인에게서 얼마간의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어떤 여행의 추억을 생각했다.
비틀어 짜낼 말조차 말라 있었고, 푹 꺼진 보도블록 위에서 넘어지며 자멸파처럼 웃었다.
흔쾌하지 않은 길 끝에서 방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50킬로쯤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가 신을 영접하고 있었지만 내겐 두렵고 어색했다.
아버지의 단어들이여 안녕.
방주에 오르며
탈탈 털어도 혼자여서 나는 웃었다.
- 허연,『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2020)
초봄이 오다 / 하종오
산수유 한 그루 캐어 집에 옮기려고
산에 가만가만 숨어들었다.
나무는 뿌리를 밑으로 밑으로 내려놓았겠지.
자그마한 산수유 찾아 삽날을 깊숙이 꽂았다.
이제 한 삽 뜨면 산에게서 내게로 올 게다.
겨울 내내 집안은 텅 비고 날 찾아오는 이 없었어.
이제 마당귀에 산수유 심어놓고
그 옆에서 꽃 피길 기다리면
이 산이라도 날 찾아오겠지.
삽자루에 힘을 주어도 떠지지 않아서
뿌리 언저리 손으로 파헤쳐보았다.
산수유는 뿌리를 옆으로 옆으로 벌려놓고 있었다.
나는 삽날 눕혀 뿌리 밑을 돌아가며
둥그렇게 뜬 뒤 밑동 잡고 들어올렸다.
한 그루 작은 산수유 실뿌리 뚜두두둑 뚜두두둑 끊기자
산에 있던 모든 산수유들 아픈지 파다닥파다닥
노란 꽃망울들 터뜨렸다.
- 하종오,『무언가 찾아올 적엔』(창작과비평사, 2003)
초봄의 짧은 생각 / 신경림
ㅡ 영해에서
바닷바람은 천리 만리
푸른 파도를 타고 넘어와
늙은 솔숲에서 갈갬질을 치며 놀고
나는 기껏 백 리 산길을 걸어와
하얀 모래밭에
작은 아름다움에 취해 누웠다
갈수록 세상은 알 길이 없고
- 신경림,『길』(창작과비평사, 1990)
초봄, 산중일기 / 김용택
오늘은 하루 종일 산중에 봄비입니다
문 열면 그대 가듯 가만가만 가고
문 닫으면 그대 오듯 가만가만 옵니다
문 닫으면 열고 싶고
문 열면 닫고 싶고
그 두 맘이 반반입니다
한 맘이 반을 넘어
앞산 뒷산 산산이 다 초목이 되어버리고
그대가 내 맘 안팎에서 빨리
미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내 맘은 지금 비 지나는
물 위 같습니다
자꾸 동그라미가 그대 얼굴로
죽고 삽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서성여도 젖지 않는
산중에 오락가락 봄비였습니다
- 김용택,『참 좋은 당신』(시와시학사, 2003)
초봄의 뜰안에 / 김수영
초봄의 뜰안에 들어오면
서편으로 난 난간문 밖의 풍경은
모름지기
보이지 않고
황폐한 강변을
영혼보다도 더 새로운 해빙의 파편이
저 멀리
흐른다
보석 같은 아내와 아들은
화롯불을 피워가며 병아리를 기르고
짓이긴 파냄새가 술취한
내 이마에 신약처럼 생긋하다
흐린 하늘에 이는 바람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데
옷을 벗어놓은 나의 정신은
늙은 바위에 앉은 이끼처럼 추워라
겨울이 지나간 밭고랑 사이에 남은
고독은 신의 無才操와 詐欺라고
하여도 좋았다
- 김수영,『사랑의 변주곡』(창작과비평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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