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실뿐 |
천하의 일이란 성실하지 못함을 근심할 뿐입니다. 진정으로 성실하였다면, 아무리 견고해도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고, 아무리 완고해도 바로잡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天下之事, 患不誠耳. 果誠也, 則無堅不破, 無頑不格. 천하지사, 환불성이. 과성야, 즉무견불파, 무완불격. 조현명(趙顯命, 1691~1752), 『귀록집(歸鹿集)』 권5, 「언사소(言事䟽)」 |
조선 영조대의 명신 조현명이 1727년 그의 나이 37세 때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에 나오는 명구이다.
『승정원일기』 영조 3년 7월 18일 기사 중에도 실려 있다. ‘성실(誠實)’ 또는 ‘정성(精誠)’으로 풀이되는 ‘성(誠)’자가 이 구절에서 주요한 관건어로 쓰였다. 바로 뒤에 ‘정신(精神)이 오롯이 이르면 금석(金石)도 꿰뚫을 수 있다’는 옛말이 허언이 아니라고 덧붙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성실함이 정신 집중과도 직결된다고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조현명이 영조에게 진언하는 맥락은 붕당을 타파해야 한다는 논의 속에서 나왔지만, 이 대목은 세상사의 여러 가지 상황에 두루 적용해도 좋을 법하다. 요즘은 ‘성실’이라는 말을 가훈이나 교훈으로 접하는 경우가 많고, 식상하리만치 ‘근면’과 나란히 일컬어지기도 한다. 현대인들에게는 너무 흔하게 들어온 덕목이라 외려 감흥이 적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성(誠)’은 연원이 유구한 고전어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용(中庸)』에서는 ‘성실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不誠無物〕’라고 단언하였다. 무엇이든 성과를 내려면 성실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근심해야 할 사안은 다른 게 아니라 ‘성실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것뿐이다. 성실하지 못하면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지극히 성실하고서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경우는 있지 않다. 성실하지 않으면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경우가 있지 않다〔至誠而不動者, 未之有也, 不誠, 未有能動者也.〕’라고 한 『맹자(孟子)』의 말을 되뇌어 본다. 남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성실한 자세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해 나가면, 넘볼 수 없을 것만 같던 견고한 성마저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성실’해야만 ‘감동’을 줄 수 있다며 양자를 필연적인 관계로 인식한 사례는 『장자(莊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참이란 순일(純一)과 성실(誠實)의 지극함이다. 순일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가 없다〔眞者, 精誠之至也. 不靜不誠, 不能動人.〕’라고 하였다. 이 문제만큼은 흥미롭게도 유가와 도가가 거의 동일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하기야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유명한 말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으며 때로는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성실해야 ‘지극히 성실하다’고 할 수 있을까? 『중용』의 답안을 따르자면, 중단 없이 지속하는 것이 지극한 성실함이라 할 수 있다. 지극한 성실함은 쉼이 없다.〔至誠無息〕 작심삼일과 중도이폐를 반복하는 평범한 사람이 결심할 만한 ‘지성’은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을 거듭하다가 한 가지가 떠올랐다. 나의 롤모델이 흘린 땀만큼 나도 노력하는 것이다. 필자가 연구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한 데 큰 영향을 주신 은사님께서는 강의시간에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임하셨다. 한 학기 내내 매 시간 어떤 학생보다도 공부를 더 많이 해 오신 분이셨다. 정말이지 강의를 듣는 동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자 자신이 존경하거나 동경하는 존재의 삶을 하나의 잣대로 삼아 성실과 불성실의 경계를 엄정하게 자문해 볼 일이다. |
글쓴이 :김종민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BK 동아시아 고전학 미래인재 교육연구팀 연구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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