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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외로움이 필요한 시간

한시감상
2019년 11월 20일 (수)
이백두 번째 이야기
외로움이 필요한 시간
  

 

쓸쓸히 금학 더불어 파직되어 돌아오니
국화는 여전하고 대나무가 사립을 지키네
병든 방에서 추위를 만나 말똥을 때고
어버이께 올릴 양식 없어 관복을 파는 신세
벌레는 긴 밤 내내 우니 충직한 모습에 부끄럽고
새는 깊은 숲에 숨으니 기심(機心) 멀리함을 알겠다오
어느 곳의 운산에서 아득히 그리워할는지
한 해의 끝에 형제끼리 만날 날을 고대하겠네

 

蕭然琴鶴罷官歸  소연금학파관귀
砌菊惟存竹護扉  체국유존죽호비
病室逢寒焚馬屎  병실봉한분마시
親廚乏供市朝衣  친주핍공시조의
虫鳴永夜慙修職  충명영야참수직
鳥在深林識遠機  조재심림식원기
何處雲山存緬想  하처운산존면상
心期歲晏鶺鴒飛  심기세안척령비

 

- 이최중(李最中, 1715~1784), 『위암집(韋庵集)』 권1「다시 하당의 시에 차운하다[又次荷堂韻]」

  
해설

   이 시는 영조 연간에 주로 활동하였던 이최중이 1748년(영조24) 34세 때 지은 것이다. 이최중은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유(李濡)의 손자이고, 도암(陶菴) 이재(李縡)를 스승으로 모셔 가문(家門)과 학맥(學脈) 모두 손색이 없는 신진(新進)이라 할 만하였다. 하지만 그는 1744년(영조20) 30세가 되어서야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2년 뒤인 1746년 7월 온릉 참봉(溫陵參奉)이라는 미관말직(微官末職)에 제수되어 처음 벼슬길에 나갔다.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고 대관(大官)으로 올라가는 정식 환로(宦路)에서는 한참 벗어난 길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12월 병이 들어 결국 이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는데 이 시는 바로 이렇게 물러나 양병(養病)하던 시절에 지은 것이다. 당시 선비들의 일반적인 삶의 궤적을 고려할 때 한창 벼슬길을 내달리거나, 학문으로 이름을 날리거나 하고 있어야 할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렇다 할 업적을 세우기는 고사하고 생계마저 고민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던 늦깎이였다고나 할까.

  

   이 시는 이최중이 벼슬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온 시점에서 시작된다. 금학(琴鶴)은 거문고와 학을 짝하여 말한 것인데 청고(淸高)한 은사들이 곁에 두고 애호품(愛好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진(晉)나라 은사(隱士) 도연명(陶淵明)이 술이 거나해지면 줄 없는 거문고인 무현금(無絃琴)을 어루만지며 흥취를 부쳤다는 이야기, 송(宋)나라 은사 임포(林逋)가 학을 자식 삼아 기르면서 서호(西湖)에 배를 띄워 노닐 때 학이 손님이 찾아온 것을 알렸다는 이야기가 운치 있다. 여기에 더해 송나라 때 조변(趙抃)이라는 사람은 성도(成都)에 부임할 때 거문고 한 벌과 학 한 마리만 지니고 갔다는 고사가 있을 정도로 후대에 은사의 취향을 드러내는 한 쌍의 필수품이 되었다. 한편 국화는 도연명이 팽택령(彭澤令)을 사직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여전히 남아 있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대나무는 선비가 거처에 이 나무를 두지 않으면 속물이 된다고 한 소식(蘇軾)의 말이 유명하다. 요컨대 금학, 국화, 대나무는 모두 선비의 청빈(淸貧)한 생활과 고아(高雅)한 품격을 상징하는 것으로, 막연한 미래와 불안한 현실에 대한 고민을 걷어내고 내면의 안식을 찾기 위해 이최중이 의지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3, 4구에서는 앞서의 고상함과 대조적인 시인의 생활을 가감 없이 묘사하고 있다. 병든 몸에 추위에 시달리는데 땔감으로 쓸 장작을 못 구해 말똥을 때는 형편이고 끼니를 잇기 힘들어 관복을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에서 가난한 살림에 시달리는 모습이 여실히 전해온다. 말똥은 마통(馬通)이라고도 하는데 나무를 구하기 힘들 때는 말똥을 모아 땔감을 만들어 썼던 모양이다. 송나라 때 황정견(黃庭堅)은 어떤 이가 마통신(馬通薪) 2백 개를 보내 주자 향(香) 20개로 보답하였다고 했고 이민구(李敏求, 1589~1670)가 지은 「신가마통신(申家馬通薪)」이라는 시를 보면 그의 사위 신변(申昪)이 장인을 위해 말똥 땔감을 보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5, 6구에서는 자연의 경물을 빌려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밤을 새워 우는 벌레의 모습에서 공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기심(機心)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새를 통해 처세의 지혜를 배운다. 마지막 연에 나오는 운산(雲山)은 구름 낀 산으로 속세를 떠난 은사의 거처를 가리키고 척령(鶺鴒)은 할미새인데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형제를 비유한다. 마지막 연은 시의 제목에 나오는 하당(荷堂)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읊으며 마무리 짓고 있는데 하당은 이최중의 숙부 이현숭(李顯崇)의 아들 이존중(李存中, 1703~1761)의 호로, 이최중의 사촌형이다.

 

   이 시절의 이최중의 시를 일별(一瞥)해 보면 대체로 평이하고 담담하게 읊조리는 가운데 쓸쓸하고 고적(孤寂)한 기운이 서려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이 시절은 고독과 마주하며 자신을 추스렸던 때였으리라. 이 시절의 고독이 그의 삶에 방향을 잡아주었던 것일까? 이최중은 2년 뒤 의금부 도사가 되어 벼슬길에 다시 오른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37세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고 이후로 급제자의 전형적인 경로를 밟아 승정원, 시강원, 예문관 등을 거쳐 동부승지, 대사간, 관찰사, 이조 판서, 의정부 우참찬 등을 지냈다.

 

글쓴이변구일
한국고전번역원 승정원일기번역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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