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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꽃을 사랑한 남자

고전산문
2019년 11월 13일(수)
오백스물두 번째 이야기
꽃을 사랑한 남자
  
번역문

    큰 은혜는 은혜를 끊고, 큰 자비는 자비를 끊으며, 큰 연민은 연민을 끊고, 큰 사랑은 사랑을 끊습니다. 재상의 지위에 올라 큰 녹봉을 받는 것을 누가 사랑하지 않을까요? 오직 은사(隱士)가 가장 사랑하지만, 그걸 잃거나 빼앗길까 염려하여 애초에 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깊숙한 안방 부드러운 베갯머리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가까이하는 것을 누가 사랑하지 않을까요? 오직 석가가 가장 사랑하지만, 이별과 그리움이 두려운 까닭에 애초에 사귀지 않은 것입니다. 붉고 흰 온갖 꽃들의 품격 있는 빛깔과 고운 향기를 누가 사랑하지 않을까요? 오직 내가 가장 사랑하지만, 봄날 비바람과 함께 떠나가는 것이 두려워 애초에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랑은 얕은 사랑이고 내가 꽃을 사랑함은 절실한 사랑입니다. 저 운남(雲南) 그 땅에는 봄은 있고 가을은 없으며 겨울에 진달래꽃을 비롯해 아욱꽃, 홍매화, 장미꽃, 계수나무꽃, 수선화 등 오색의 꽃을 보면 모두 사계절 화려할 것입니다. 아! 내가 그 땅을 고향 삼으면 나는 반드시 숲 아래 집을 지을 것입니다.”

원문

大恩割恩, 大慈割慈, 大憐割憐, 大愛割愛. 位卿相祿千鍾, 人孰不愛? 惟隱士最愛, 慮其有喪失逐奪也, 故初不居焉. 深閨軟沈, 調靑昵紅, 人孰不愛? 惟釋氏最愛, 懼其有睽離思眄也, 故初不交焉. 千紅萬白, 品色行香, 人孰不愛? 惟余最愛, 恐其有春去風雨也, 故初不有焉. 世人之愛, 淺之愛也, 余之愛花, 愛切也. 滇之南, 其地有春無秋, 冬月, 見五色杜鵑花若錦葵花․紅梅花․木香花․木犀花․水仙花, 皆四時榮. 噫! 使吾鄕於此, 吾必以林下爲家矣.

-이옥(李鈺, 1760-1815), 『담정총서(潭庭叢書)』 「화설(花說)」

  
해설

   우리 고전 최고의 미인을 꼽으라면 단연 수로 부인이다. 수로 부인은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의 부인이다. 미모가 워낙 빼어나서 온갖 잡신들이 호시탐탐 그녀를 탐낼 정도였다. 그녀가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가던 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옆에는 병풍을 두른 듯한 깎아지른 벼랑이 있었다. 문득 그녀의 눈에 벼랑 위에 탐스럽게 핀 진달래꽃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 꽃이 갖고 싶었다. “누가 나를 위해 저 꽃을 꺾어다 줄 수 있겠느냐?” 그러나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옆에서 암소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그 말을 듣고 벼랑 위에 올라가 꽃을 따와서는 아울러 「헌화가(獻花歌)」를 지어 함께 바쳤다. 수로부인은 왜 하필 위험천만한 벼랑 위의 꽃을 탐냈을까? 아무도 손댈 수 없는 ‘벼랑 위의 꽃’이었기에 욕심이 났을 것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이 자연 최고의 미(美)를 만난 것이다. 그 꽃을 꺾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미에 탐닉하는 존재이다. 인간 최고의 미인은 가장 아름다운 꽃을 탐냈고, 소 끄는 노인은 부끄러움을 잊고서 인간 최고의 아름다움을 욕망했다.

 

   꽃은 참 매혹적인 사물이다. 꽃의 향기와 빛깔은 인간을 잡아끌기에 충분하다. 꽃은 그 향기와 자태를 뽐내면서 끈질기게 인간을 유혹해 왔다. 조선 후기의 김덕형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화원으로 달려가 꽃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누워, 종일토록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꽃만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해도 개의치 않고 오로지 꽃에 미쳐 지냈다. 백화암(百花庵) 유박(柳璞, 1730~1787)은 남의 집에 값진 꽃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천금을 주고라도 반드시 구해왔으며, 외국의 배에 진귀한 꽃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만 리를 달려가 구해왔다. 매화를 지극히 사랑한 퇴계 선생은 마지막 유언으로,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라는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꽃에 사로잡혀 꽃을 가까이하고 꽃을 즐겼다.

 

   그러나 매혹적인 사물일수록 더욱 위험하다. 성리학에서는 사물에 탐닉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른바 사물에 탐닉하면 도를 해친다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정신이다. 성리학의 관점에서 꽃은 인간의 내면을 해치는 위험한 존재였다. 꽃은 덕을 해치고 마음을 다치게 하는,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사물이었다. 가장 끌리는 존재지만 멀리해야 하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하여 선비들은 꽃에서 인간의 덕목을 찾았다. 꽃을 수양의 방편으로 삼아 꽃을 기르는 행위는 마음을 수양하는 일임을 강조했다. 꽃에 등급을 매기고 등급이 높은 꽃을 가까이했다. 꽃에도 차별이 이루어졌다. 이른바 군자의 꽃인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그렇게 탄생했다. 선비들은 사군자(四君子)에서 운치와 절조를 찾아냈다. 양화(養花)는 꽃을 기르는 일이면서 덕을 기르는 일이었다. 가장 미적인 꽃조차 윤리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꽃을 차별하지 않고 그 자체로 사랑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문무자(文無子) 이옥이다. 이옥은 어릴 적부터 수십 종의 꽃이 피어 있는 마당에서 자랐다. 매화외사(梅花外史), 매암(梅庵), 매화초자(梅花樵者), 화석자(花石子), 화서외사(花漵外史), 도화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 등에서 보듯이 그는 자신의 호를 주로 꽃 이름으로 지었다. 늙어가면서는 꽃을 더욱 사랑해서 하루라도 꽃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고백했다. 다시 태어나면 기이한 꽃과 초목이 많이 자라는 대리(大理) 지방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소망했다. 현재 전해지지는 않지만 『화국삼사(花國三史)』를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옥은 꽃의 등급을 가리지 않고 어떤 종류의 꽃이든 가까이하고 즐겼다.

 

   남양(=지금의 화성시)에서 태어난 이옥은 성균관에 합격했다. 과거 준비를 하는 중에도 이옥은 틈만 나면 한양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꽃구경을 했다. 남산, 북한산, 화개동, 도화동 등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1790년대 초의 어느 봄날이었다. 따뜻한 봄날을 맞아 사람들은 꽃 구경을 다니느라 바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옥은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지인인 동원공(東園公)이 의아하게 여겨 이옥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모두 꽃 구경을 다니는데 자네는 어찌 꽃에 그리 무심한가?” 이옥은 꽃을 너무 사랑해서 꽃을 멀리한다는 재미있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누군가는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옥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들의 방식이다. 진정한 사랑은 떠나보내는 것이다. 왜냐? 이옥은 말하길, 큰 자비는 자비를 끊고 큰 사랑은 사랑을 끊는다. 석가가 인간의 욕망을 끊은 것은 그가 아름다운 여인을 가장 사랑했지만, 이별과 그리움이 두려워 가까이하지 않은 것이다. 만남에는 반드시 이별이 정해져 있다. 누군가를 깊이 좋아할수록 헤어짐의 상실감도 그만큼 커진다. 그러니 그 이별의 상실감을 겪고 싶지 않아서 아예 처음부터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옥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떠나감’에 대한 두려움이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사라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는 마음이 아예 꽃을 외면하게 했다. 사랑하는 이를 옆에 두고도 그윽한 슬픔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다는 자각에 이르면 사랑의 깊이만큼 상실의 두려움도 커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꽃에서 향기와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마음 여린 한 선비는 꽃에서 사라짐을 떠올렸다. 존재의 소멸은 가장 실존적인 체험이다. 그가 꽃에 대해 느끼는 미의식은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꽃이 비바람과 함께 떠나가는 것이 두렵기에 그 아름다움을 차마 즐기지 못하고 아예 끊어버리려는 것이다. 그 감성은 여린 감성에 바탕을 둔 허무와 무상성이다. 이옥에 이르러 격물치지가 해체되고 문학이 도덕에서 분리되는 순수 서정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한다.

 

    수로 부인은 꽃을 꺾어 가지려 했지만, 이옥은 꽃을 놓아주려 했다. 수로 부인은 꽃을 좋아한 사람이었고, 이옥은 꽃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박수밀
글쓴이박수밀(朴壽密)
고전문학자

 

주요 저서
  • 『박지원의 글 짓는 법 』, 돌베개, 2013
  •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다락원, 2014
  • 『옛 공부벌레들의 좌우명』, 샘터, 2015
  • 『고전필사』, 토트, 2015
  • 『교사인문학』, 세종서적, 2017(공저)
  • 『리더의 말공부』, 세종서적, 2018(공저) 외 다수의 저역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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