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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불의 회상,그 따뜻함과 뜨거움에 대하여

한시감상
2019년 4월 17일 (수)
백아흔다섯 번째 이야기
불의 회상,
그 따뜻함과 뜨거움에 대하여
  

 

가난하여 기름등잔 마련할 길 없으니
구하려 해도 한여름 얼음과 다름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등불 같은 마음 있어
찬란한 그 빛 옆에서 새벽을 기다린다

 

貧家無力辦油燈 빈가무력판유등
縱羨何殊夏語冰 종선하수하어빙
惟有此心明較火 유유차심명교화
煌煌傍燭待晨興 황황방촉대신흥

 

 

벽에 걸린 찬 등잔 나를 향해 비추는데
청명한 저 빛 속에서 피는 꽃 새롭구나
바람 서리 비 이슬 모두다 딴 세상 일
작은 방 희미한 등불 밤마다 봄이어라

 

靠壁寒燈照向人 고벽한등조향인
淸明光裏發花新 청명광리발화신
風霜雨露渾佗界 풍상우로혼타계
小屋殘缸夜夜春 소옥잔항야야춘

 

- 이익 (李瀷, 1681~1763), 『성호전집(星湖全集)』 권3 「무등호운(無燈呼韻)」, 권4 「등염(燈焰)」

  
해설

   우리는 불에 대해 보통 두 가지의 상반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같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뜨거움의 이미지입니다. 산불, 용암, 용광로, 화마, 불바다, 불지옥 등과 같은 말은 그 느낌만으로도 활활 타오르는 뜨거움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총, 대포, 포탄, 원자폭탄, 가스실 같은 잔혹한 전쟁과 야만의 불꽃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우리 가슴속에서 활화산처럼 일어나는 욕망은 또 어떻습니까? 식색(食色)의 열화(熱火)나 분노·증오 같은 심화(心火)도 강한 바람 앞에 놓인 뜨거움의 불길입니다.

 

   두 번째는 따뜻함의 이미지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여정 속에서 각인된 따뜻한 불의 이미지와 그것이 소환하는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던 시골집 화로의 불잉걸일 수도 있고, 하염없이 들여다보던 아궁이의 군불이거나 MT 갔던 대성리의 춤추던 모닥불일 수도 있습니다. ‘창문에서 비치는 불빛과 마당에 켜진 외등’에서 여행자는 향수를 느낄 수도 있겠지요. ‘세상의 모든 지붕으로 들어오던 아침 햇살’은 얼마나 따사로왔으며, ‘가난하여 보여줄 게 이것밖에 없다’던 고향의 그 붉은 노을은 또 얼마나 황홀했던가요?

 

   위의 성호 선생의 시들에서 느껴지는 불의 이미지는,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봄 햇살 같은 따뜻함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설명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학(儒學)에서 보는 우리 몸과 마음속의 불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기본적으로 생명의 불인 온기와 에너지가 있어 생명력을 유지해갑니다. 그 불이 꺼지면 차디찬 죽음의 시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 안에는 앞서 말했던 식색지욕(食色之欲)과 기질적 욕구도 있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순결한 사랑과 올바름과 지혜의 등불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보면 성호 선생은 등잔 하나 마련할 길이 없을 만큼 가난합니다. 그래서 밤마다 빛 한 줄기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태연자약하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밝은 등불을 켜고 새벽을 기다리면 그뿐이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집착에 끄달리지 않고 그것을 항복받으며 주체적 자아의 존엄을 지킬 때 ‘새벽’과 ‘봄’은 오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대욕(大欲)을 극복한 무욕의 세계이며, 안빈낙도의 실천으로 무명을 깨친 경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래 ‘세상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두운 것’이기에, 우리가 등불을 켜고 있으면 나도, 세상도 밝아질 수 있고, 스스로 내면의 불을 꺼버리면 바로 나에게도, 세상에도 진짜 어둠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별똥 같은 작은 불씨가 거대한 평원을 사르리라[星星之火, 可以燎原]’는 말처럼, 이런 실존적 통찰과 깨달음으로 빛났던 사람들의 마음속 촛불이 모여, 100년 전 그해 3월과 4월, 독립과 자유와 평화를 위한 횃불로 결연히 타올랐으며, 그것이 다시 오늘날의 저 장엄한 광장의 촛불로도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4월 16일은, 세월호 5주기를 맞는 날입니다. 창밖에 ‘환한 횃불을 들고 서 있는 목련’을 바라보자니, 어느새 지고 있는 그 처연한 낙화(落花)가 왠지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부탁인 것만 같아 가슴이 저려오는 아침입니다.

글쓴이이기찬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