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자라는 직업 때문인지 작명에 대한 문의를 받는 경우가 있다. 어딘가의 철학관에서 지어온 이름을 내밀며 의견을 묻는 식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어달라는 사람은 없다. 작명에 한해서는 박사학위보다 철학관 간판이 믿음직한 모양이다. 하기야 대학에서는 작명을 학문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과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관 작명의 근거는 무엇일까? 철학관 작명법도 여러 가지지만, 대체로 두 가지를 고려한다. 첫째는 한자의 획수다. 한자의 획수를 따지는 작명이 일본의 성명학자(姓名學者) 구마사키 겐오(熊崎健翁, 1881~1961)의 작명 이론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인데, 아직 모르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그의 이론이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은 1940년경이다. 이 무렵 창씨개명으로 작명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자 전에 없던 ‘작명소’라는 업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오늘날 철학관의 시조다. 당시 신문광고의 상당수는 창씨개명을 위한 작명 광고였다. 한자의 획수를 따지는 작명법은 구체적인 방법이 어떻건 전부 구마사키 이론의 아류다. 한자의 부수와 획수는 『강희자전(康熙字典)』(1716)에서 비로소 확정된 것이다. 조선에서도 1796년 『강희자전』의 분류체계에 따라 『전운옥편(全韻玉編)』을 편찬했는데, 그 전까지는 부수와 획수로 한자를 분류한다는 관념이 희박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수와 획수를 불변의 원리처럼 떠받들기 시작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일본 출판사들이 펴낸 ‘옥편’이 전부 강희자전식 분류체계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수와 획수는 어디까지나 수많은 글자를 분류하기 위한 편의적 기준에 불과하다. 게다가 획수는 글자를 쓰는 방법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획수를 세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획수를 고정불변의 요소로 간주하는 것은 문자학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증거다. 철학관에서 획수를 운운하거든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바란다. 철학관 작명의 두 번째 고려사항은 오행(五行)이다. 사주(四柱)의 오행을 고려하여 한자를 정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전통적인 방식은 아니다. 조선 국왕의 작명 과정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왕자가 태어나면 신하들이 정명단자(定名單子)라는 것을 올린다. 여기에 이름 후보 세 가지를 올리면 국왕이 하나를 골라 낙점한다. 조선 국왕들은 이름을 지을 때 오행을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 항렬자 정하듯 오행상생의 순서를 따지는 법도 없었다. 조선 국왕 27명 가운데 오행상생의 순서에 맞는 이름은 효종[淏], 현종[棩], 숙종[焞] 3대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숙종의 아들(경종)이 태어나자 신하들이 오행상생의 순서를 따라 이름을 지어야 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숙종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우연에 불과하다.” 결국 경종의 이름[昀]은 오행상생의 순서와 무관하게 지어졌다. 그러니 작명가가 사주와 오행을 운운하거든 역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오기 바란다. 오행상생을 따르는 항렬자 역시 오래된 전통이 아니다. 문중에서 정하는 항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따르지 않아도 좋다. 조선시대에도 이름을 고칠 때는 항렬자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법적으로 인명에 쓸 수 있는 한자는 제한되어 있다. 1990년 대법원이 인명용 한자 2,731자를 제정했다. 이 범위를 벗어나는 한자는 원칙적으로 인명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여론이 들끓어 현재는 8,142자까지 늘어났다. 참고로 일본의 인명용 한자는 호적법에 규정된 2,999자가 전부이다. 중국은 따로 제한이 없으나 대개는 ‘통용규범한자표’에 수록된 8,105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자를 상용하는 일본과 중국보다 우리나라 인명용 한자가 더 많다. 그래도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어째서일까? 획수와 오행을 함께 맞추려면 쓸 수 있는 한자가 별로 없다. 그래서 대법원의 인명용 한자에는 옛날 같으면 이름으로 쓰지 않았을 기상천외한 한자가 가득하다. 획수와 오행에 집착하는 기묘한 작명 관습 탓이다. 한자 이름이 무난해서 많이 쓰고 있지만, 사실 한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원래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이름은 한자가 아니었다. ‘힘찬’이나 ‘빛나’ 같은 우리말 이름도 좋고, ‘요한’이나 ‘마리아’ 같은 외국식 이름도 나쁠 것 없다. 그 또한 시대를 반영하는 이름이다. 하지만 획수와 오행에 집착하여 생소한 한자로 지은 이름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옛사람이 선호한 것은 의미 있는 이름이었다. 이름을 돌아보며 그 의미를 생각하는 고명사의(顧名思義)야말로 작명의 핵심이었다. 이름은 뜻이 좋고 부르기 쉬우면 충분하다. 그래도 기어이 획수와 오행을 따지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다만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건 분명히 말하고 싶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름을 잘못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이름을 탓하는 비뚤어진 마음가짐이 문제다. ‘화와 복은 스스로 구하는 것이다.’ 이름을 고치고 고치지 않고와는 상관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