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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명구

8촌형님? 5촌 아저씨?

팔촌 형님? 오촌 아저씨?

 

   여러분은 ‘촌수(寸數)’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삼촌’이나 ‘사촌’ 등이 바로 연상되지 않을까. 물론 요즘은 ‘촌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친척과 인척 간에 왕래가 활발하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자주 왕래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보기 드문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 필자가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친가나 외가를 가면 ‘계촌(計寸 촌수를 따짐)하여 ‘오촌 아저씨’라든지 ‘육촌 형님ㆍ아우’라든지 하는 식으로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 및 상호 간의 호칭을 규정하였던 것이 예사였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에는 어떠하였을까. 조선 시대에는 한 가문이 동일 가문과 여러 차례 혼인하는 경우가 빈번하여 친척 관계가 중첩되는 이른바 ‘겸친(兼親)’이 발생하였다. 이때 그 기준이 동성(同姓)이냐 이성(異姓)이냐에 따라 계촌과 호칭이 달라지는 번잡한 문제가 야기된다. 친소(親疏)를 구분ㆍ확정하는 것은 유가적 예법(禮法)에서 핵심적인 사안 중 하나이므로 조선조 학자들은 이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상기 인용문은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이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과 만나서 나눈 대화의 일부분으로, 18세기 낙론(洛論) 학자들의 동성과 이성에 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일례이다.

   1768년(영조44) 8월 13일, 당시 35세이던 근재는 미음(渼陰)으로 가서 67세인 미호에게 납자(納刺 명함을 바침)한 다음 배알하고, 학문(學問)ㆍ시사(時事)ㆍ예법 등 다양한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재는 평소 의문을 가졌던 예법에 관해 담론하면서 ‘겸친’일 경우에는 동성과 이성 중 어느 쪽을 기준으로 삼아 호칭을 규정ㆍ적용해야 하는지 미호에게 여쭈었다. 그것도 타인의 사례나 경전 등의 문헌에 보이는 내용을 가지고 범범하게 질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경우를 가지고 질문하였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박성원(朴盛源, 1711~1779)은 근재의 삼종형(三從兄 팔촌 형)으로, 1766년(영조42) 5월 20일에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대화에서 ‘춘천 형(春川兄)’, ‘박 춘천(朴春川)’ 등으로 언급되었다. 박성원은 근재보다 23세 연상으로, 근재의 모친 기계 유씨(杞溪俞氏, 1711~1761)와 함께 미호의 조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외손이다.

                                  (外) 朴師漢 - 盛源
                                 ↗
                        金昌協
                                 ↘
                                  (外) 兪受基 - 俞氏 - 朴胤源


   이성인 안동 김씨(安東金氏) 가문을 기준으로 삼아 계촌하면, 박성원과 기계 유씨는 사촌 간이므로, 박성원은 근재의 종숙(從叔 오촌 아저씨)이 되는 셈이다. 이렇듯 동성으로 따지면 ‘팔촌 형님’인데 이성으로 따지면 ‘오촌 아저씨’인 박성원에 대해 근재는 평소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 의문을 품고 있었던 듯하다. 상기 인용문의 대화로 미루어 볼 적에 근재 나름대로는 복제(服制)에 근거하여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입지 않아도 되는지 –복(服)의 유무(有無)- 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자신의 견해가 미호에게 검증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근재의 질문에 대해 미호는, ‘아무리 백대(百代)가 지나더라도 혼인하지 않는다[雖百世而昏姻不通]’는 ‘동성불혼(同姓不婚)’과 ‘후사(後嗣)가 되면 부자(父子)의 관계가 정립된다’는 예법상의 대원칙을 언급하며 동성, 즉 동종(同宗)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조(高祖)가 같은 팔촌 간은 본종(本宗) 유복친(有服親)이기 때문에 이성 무복친(無服親)이 아무리 촌수가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 호칭을 적용하는 것은 예법에 비추어 봤을 때 옳지 않다고 여겼다. 다시 말해, 동성인 반남 박씨(潘南朴氏) 가문을 기준으로 삼아 박성원을 ‘팔촌 형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호는, 이성을 기준으로 삼아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을 ‘춘형(春兄)’이라고 불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행위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본래 우암과 동춘당은 송계사(宋繼祀, 1407~?)의 후손으로, 은진 송씨(恩津宋氏) 가문을 기준으로 삼아 계촌하면, 한 살 연상인 동춘당이 우암의 십삼촌 아저씨가 된다.

                                      順年 - 汝諧 - 世良 - 龜壽 - 應期 - 甲祚 - 時烈
                                      ↗
                        宋愉 - 繼祀
                                      ↘
                                      遙年 - 汝楫 - 世英 - 應瑞 - 爾昌 - 浚吉


   그러나 우암의 조부 송응기와 동춘당의 조부 송응서는 각각 광주 이씨(廣州李氏) 이윤경(李潤慶, 1498~1562)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아내로 맞이한 동서 간이었기 때문에 우암은 동춘당을 ‘춘형’이라고 불렀다. 이성인 광주 이씨 가문을 기준으로 삼아 계촌하면 ‘육촌 형님’이 되기 때문이다. 우암이 동성을 놔두고 이성을 기준으로 삼아 동춘당을 ‘춘형’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무리 본종이라고 하지만 십삼촌 숙질간은 무복친으로 먼 사이가 되기 때문에 이보다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인척(姻戚) 관계 -각각의 진외가(陳外家)가 되는 광주 이씨 가문- 를 연결 고리로 삼아 호칭을 규정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이렇듯 우암의 경우 -무복친인 본종 십삼촌 간- 와 근재의 경우 -유복친인 본종 팔촌 간- 를 동일 선상에 놓고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미호는 한발 물러서는 듯한 유보적 자세를 보이지만, 그래도 예법상의 대원칙에 입각하여 이성보다 동성이 우선해야 한다는 견해를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성을 중시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풍속이지 유가 본연의 옛 예법이 아니기[東國之俗而非古]’ 때문이었다.

   이후 근재는 박성원을 ‘삼종형’이라고 불렀던 듯하다. 이는 1779년(정조3) 1월 6일에 박성원이 졸하자 동년에 근재가 지은 제문의 모두에서 “유 세차 기해년 3월 을유삭 초2일 병술에 삼종제 윤원은 삼종형 대사간 공의 영구가 발인할 날이 정해졌기에 공경히 닭과 술을 올려놓고서 제문을 쥐고 다음과 같이 영결의 슬픔을 고하나이다.[維歲次己亥三月乙酉朔初二日丙戌 三從弟胤源 以三從兄大司諫公之柩卽遠有期 敬奠鷄酒 操文告哀]”라고 표현한 부분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한편 미호를 배알한 당일, 근재는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묵으려고 하였다. 당시에는 으레 서원의 사우에 알현하고 ‘심원록(尋院錄)’에다 이름을 적었는데, ‘심원록’이란 해당 서원을 찾아온 사람이 그 이름을 적는 일종의 ‘방명록(芳名錄)’이자 ‘인명록(人名錄)’인 셈이다. 이때 근재는 미호에게 사우의 주벽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에 대하여 자신의 ‘속칭(屬稱)’을 무엇으로 규정해 심원록에다 적어야할지 질문하였다. 본래 ‘속칭’이란 ‘선조와의 친속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으로, 《이정문집(二程文集)》 권11 〈작주식(作主式)〉의 소주(小註)에 의하면, ‘속(屬)’이란 고조(高祖)ㆍ증조(曾祖)ㆍ조(祖)ㆍ고(考) 등을 가리키며, ‘칭(稱)’이란 관직이나 호(號)ㆍ항(行) 따위를 가리킨다고 한다.


   근재는 청음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속칭을 규정하고자 하여 ‘외육대손(外六代孫)’이라는 호칭도 언급하였고, ‘외외가(外外家 모친의 외가)’에 대해서도 ‘몇 대(代)’라는 표현을 사용하는지 질문하였다. 여기서 근재와 미호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근재는 미호에게 자신을 ‘척질’ -제문에서는 ‘척종질(戚從姪)’- 이라고 일컬었는데, 근재의 외조부 유수기(兪受基, 1691~1729)는 농암의 막냇사위이고 미호는 농암의 손자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미호는 근재의 모친 기계 유씨의 외갓집 사촌 오빠이다. 다시 말해, 근재와 미호는 서로 오촌의 인척 관계가 되는 셈이다.

                                  崇謙 - 元行
                                 ↗
                        金尙憲 - 光燦 - 壽恒 - 昌協
                                 ↘
                                  (外) 兪受基- 俞氏 - 朴胤源



   근재의 이러한 질문을 받은 미호는, 왜 굳이 청음에 대해서 속칭을 쓰려고 하는지 되레 물어보았다. 미호의 반문 의도는 속칭을 규정ㆍ적용할 적에 기준이 되는 대상을 잘못 선정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조부 농암이 근재의 외외증조(外外曾祖 외조모의 부친)이기 때문에 속칭을 규정ㆍ적용하려면 농암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며, 청음으로 소급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듯하다.


   그러자 근재는, 여러 신위를 모신 사우에 대해서는 주벽을 기준으로 삼아 속칭을 쓰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고, 미호 역시 근재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였는지 별다른 지적이나 반박 없이 자신의 경우처럼 ‘외예(外裔)’라고 쓰는 것이 옳다고 일러 주었다. ‘외예’란 ‘이성인 후손의 범칭’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미호가 근재에게 일러 주었던 것은, 2년 전인 1766년 5월에 자신이 찬술한 「검담서원묘정비(黔潭書院廟庭碑)」라는 비문(碑文)을 가리킨다. 검담서원은 동춘당을 기리기 위해 1694년(숙종20)에 세운 서원으로, 미호는 해당 비문의 말미에서 ‘외예 안동 김 아무개가 삼가 찬하다.[外裔安東金元行謹撰]’라고 표현하였다. 미호의 본생모(本生母) 은진 송씨는 동춘당의 증손녀로, 동춘당은 미호의 외고조이다. -상기 인용문의 ‘외증조’는 착오인 듯하다.- 미호의 말인즉슨 외고조에 대해서도 ‘외예’라는 표현을 쓰기 때문에 이보다 더 거리가 먼 청음에 대해서 자신을 ‘외육대손’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외외가’라는 용어 자체가 예서(禮書)에 보이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편의상 만들어 내 사용하는 말[俗語]’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이상의 대화를 통하여 당시 낙론 예가(禮家)인 근재와 미호가 동성과 이성을 아우르는 친인척 간의 관계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예법을 강명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겸친’일 경우 이성보다는 동성 –즉 동종, 본종- 을 중시해 주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서 미호와 근재가 견해를 함께하였다는 사실과 자신의 ‘외외가’ 집안의 사우에 대해서는 ‘주벽’을 기준으로 속칭을 규정ㆍ적용하고자 한 근재의 시도가 눈여겨볼 만하다.
 
글쓴이:이영준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