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의 거리에서 /박종영
늦봄의 행간에 우뚝 선
가로수의 잎이 푸르게 열리고 있다
따스한 봄기운이 바람에 실려 와
움트는 생명의 몸부림이 경이롭다
해마다 눈여겨보는 새잎의 행렬을 기억하지만,
유독 이토록 늑장 부리는 봄에
궁금한 나무들의 나이테를 알아내기까지
지루한 성장의 해법이 있었음을 부인 못 한다
우리가 늘 순리를 뒤따르는 생각의 깊이는
이 세상 선물로 받은 푸름의 세월에 한 획을 긋고,
밝은 세상을 바라보며
귀한 생명을 선물로 받아
지금까지 행복했음을 고백하는 시간,
그러므로 내 울음의 무게가
가벼워서는 아니 되는 것.
늦봄, 대추나무 /임형신
살아 돌아온 새들이
가시나무 끝에 앉아있다
살아 있는 것마다 화간(和姦)을 꿈꾸는
부활의 아침
잎도 꽃도 없이 가시만 잔뜩 안고 서 있는 너는
골고다언덕의 예수처럼 마르고 단단한 얼굴이다
오늘은 발이 붉은 머슴새가
가시 끝에서 피나게 울다 간다
꽃들이 달려오는 몽환의 거리에
가시막대 들고 졸음을 쫓으며
성성하게 서 있는 늦봄 대추나무
어느 날 마른 등가죽 찢고 나오는
새 움 한 줌 틔우려고
행렬의 맨 뒤를 따라오고 있다
봄이 다 가도록 오지 않는
대추나무의 봄
늦봄에 온 전화 /서안나
언니 잘 살고 있어요?
잊힐 만하면 걸려 오는 그녀 H는
국문과 출신의 고향 후배다
한때 같이 시를 쓰고
밤늦도록 열정적으로 시를 이야기하던
인도풍의 얼굴을 한 여자애였다
부모 반대 무릅쓰고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고
도망치듯 사라졌던 그녀
남편 사업이 여러 번 실패하고
지금은 경기도 어디쯤 지하 단칸방에서
딸 둘과 남편과 개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일주일에 오일을 야채 트럭을 몰고
남편과 함께 아파트 상설시장을 돈다는 그녀
나도 시를 쓰고 싶은데요 그게 잘 안 돼요
언니는 요즘도 시 많이 써요?
야채를 팔며 흥정을 하다
문득 시들어 떼어낸 푸성귀 잎들이
자신의 얼굴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그녀
가냘프던 그녀의 목소리엔 삼십 줄 후반의
노련함이 배어 있다
애는 잘 크고 있느냐는 내 안부에
그녀의 목소리가 환해진다
그럼요, 무처럼 쑥쑥 자라요
토마토처럼 입술도 붉고요
아이들은 무섭게 클 수 있는 힘을
어디서 배우는 걸까요
아이들이 요즘은 구구단을 외는데
엄마가 집에 없으니까 자꾸 셈이 틀리나봐요
수학 공식도 엄마의 손길이 닿아야
아이들에게 뿌리를 내리는 건가 봐요
구구단처럼 집이 빨리 두 배로 넓어졌으면 좋겠어요
언니 시를 생각하면 난 너무 멀리 걸어와 버린 것 같아요
야채를 다듬다가
야채를 싼 신문 귀퉁이에서
시집 소개라도 읽게 되면
왜 갑자기 울컥하고 눈물이 날까요
언니 내가 너무 많이 걸어와 버렸나 봐요
언니 내일은 가락동 시장에 싱싱한 채소들을 고르러 가야 해요
또 전화할게요
그녀는
매일 트럭을 타고
온몸으로 푸른 야채들과 함께
시를 쓰는지도 모른다
삶이란 문장 안에서
시든 잎들을 떼어내고
아이들 푸른 몸뚱이를 씻기며
너무 길게 자란 생각의 뿌리들을 칼로 다듬고
아이들의 눈동자가 상하지 않게
싱싱한 소금도 듬뿍 뿌리면서
늦봄 /임경림
牧丹이 시들도록 젖은 빨래는 마르지 않네
흐드러진 牧丹,
부풀어 오른 외음부 한껏 열어젖혀진 꽃잎 속
노란 꽃술 다발에 벌들이 어질머리 처박고선
젖은 빨래 다 마르도록 나오질 않네
수직으로 치켜든 꽁무니,
쉴 새 없이 날개 버둥거리는 저 벌들,
붉은 해 등에다 지고 온몸 붉게붉게 젖어드네
더러는 검게 타버린 혓바닥
다 타고도 남는 허전함이 더 붉게붉게 타들어가네
牧丹은 시들고
젖은 빨래는 아직 마르지 않네
빨래집게에 혀 빼 물린 채
시들어빠진 해 그림자 다 마르도록 젖어 있네
늦봄 /강인호
제비꽃은 이제 지고 없더라
당신 가슴 속을 닮았노라고
깊은 슬픔이라고 부르던 꽃
당신 안부를 궁금해 하더니
제비꽃은 이제 지고 없더라
달개비는 이제 피고 있더라
당신 깊은 눈빛 닮았노라고
맑은 슬픔이라고 부르던 꽃
당신 없이도 그리 무심하게
달개비는 이제 피고 있더라
늦봄의 원근법 /이성렬
그해 봄 우연히 눈썹 위에 앉은 꽃가루 몇 점이
숲길 사이의 노란 리본들처럼 나의 여로를 간질여
나는 어느 먼 도시에 무거운 닻을 내리고 그간의
피폐한 행적들을 낯선 지붕 밑에서 가늠하려 했다
그곳의 고풍스런 세관 건물 입구에는 오래전 나의
엽서 밖으로 걸어 나간 청동의 촛대가 앉아 있었고
나는 읽고 있던 토마스 만의 두터운 소설을 우정
처연한 마음으로 물리고 새벽의 그림자극을 벌였다
갯내음 짙은 항구의 어깨에 기댄 빈 술잔들과
눈을 비비는 가로등의 선잠이여, 시샘으로 팽팽한
세간의 빗줄기를 피해 나는 상점가에 내걸린 색색의
네온등을 천천히 일별하여 끔찍이 외로워도 좋았다
뱃머리 사이로 갈라지는 물살은 공중을 부유하는
기억들의 몸부림인가, 덩굴손에 움켜 쥐인 가지의
뒤틀린 고통마저도 내게는 굵은 위안이었으니
누군가는 굽은 등으로 처마 밑을 거닐 것이며
어떤 간절한 시편도 낮은 우레에 미치지 못하니
언젠가 다리가 풀리는 날 비로소 무릎을 꺾으며
캄캄한 길에 뿌린 핏자국들이 굳는 날이 올지니
며칠간의 호사 뒤에 다시 찾아들 적빈의 상흔과
외톨이의 운명을 잠시 잊고자 하던 그날에 나는
옛 제국의 퇴색한 초상화와 자진한 작가의 유고
폐원 입구에 드리워진 황혼의 오랜 숨결을 향해
애절한 눈길을 보내곤 했다 장식적인 원근법으로
늦은 봄 /홍해리(洪海里)
꽃잎이 피고 있었다
눈맞춘 사내
집마당으로 날아드는
옥색 고무신
젖은 눈으로
댓돌 위에 기다리는
흰 고무신
꽃잎이 지고 있었다.
늦봄에 내리는 눈 /강말주
꽃봉오리 몽글몽글 맺힌
봄나무들 어떡하라고
반갑지 않은 손님이 오신다.
늦봄의 눈이라면
이른봄 길 가에 쌓인 잔설처럼
겨울 먼지들 다 쓸어 모은 듯
추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떡하라고.
봄날을 시새우는 놀부가
봄나무들 상처를 주면서
신나게 치마바람 날리며 오네
늦봄의 기도 /이은경
오, 내 사랑 그대여! 내 눈을 감겨요. 나 그대 만질 수 있어니
내 사랑 그대여 33년전 그날같은 살가운 햇볕이 들어요.
함석헌의 씨알 하나 들고 어디로 갔나말이오.
그대가 좋아하던 ode to the west wind를 새로 낭송해요. 그 날처럼 서풍이 거칠지도 않은데 티비는 제 멋대로 놀아요.
창 밖 담벼락 빨강 중장미 넝쿨 아름답다. 아니, 그냥 예쁘다.
오, 내 사랑 그대여, 그 하마디 못하고 그대 떠나 보냈소.
“사랑한다”“사랑한다”“사랑한다”.
눈물이 흐른다.
늦봄 /최명길(1940~2014)
도꼬마리 털게다리가
물푸레나무 둥치를 타고 기어오른다.
보슬비 내린 후 적막강산 지나
쪽박넝쿨도
댕댕이덩굴도 두어 뼘
늦봄의 역할극 /이병철
무채색과 원색 사이
나비가 날개를 접었다 펴는 동안
당신의 혀가 화염을 당겨놓았다
잠깐 잉태되었다가 지워지는 불구의 시간
잘못 적힌 지문만 바라보다 하루를 놓쳤다
두서없이 수식된 계절은 읽지 않을래요
당신이 몰래 심어 놓은 양귀비 위에서
어딘지 곪거나 떫은 우리의 키스
내 식도를 열고 창자로 내려가는 씨앗 몇 개
몸속 좁은 골목마다 열꽃이 피었다
꽃의 방백이 들려요
달궈진 밑에 밑이 데일까 봐
우리는 입맞춤을 멈추고
희미한 손톱들이 떠다니는 허공에다
색채들을 내던지며
새2 역할을 하는 새와
양귀비1 역할을 하는 양귀비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녀의 역할을 해야 해요
내가 탯줄 대신 뱀을 묶고
당신의 배꼽으로 들어갈 때
부풀어 오르는 배를 부여잡고
초록을 음독(飮毒)하는 일
암전되지 않은 채 막이 내린다
늦은 봄길 /강인호
산길 따라 중미산 고개 너머 유명산
조뱅이 지칭개 분홍메꽃 싸리 꽃
정겹고 예쁜 이름 하나씩 불러주며
남한강 따라가서 북한강변 오는 길.
다가왔다 멀어지는 산줄기 강줄기
그대 향한 마음도 천 갈래 만 갈래
오늘 종일토록 다시 또 생각커니
그대와의 인연은 정녕 못 풀 실타래.
가끔은 잊고서 혼자 지내 봤으면
슬며시 가는 봄에 실어 보냈거늘
어느새 돌아와 앉은 그댈 어쩔거나
그대 생각 이고지고 다녀오는 늦은 봄길
봄날이 간다 /初月 윤갑수
꽃피는 봄날이 스멀스멀 진다.
햇살이 따갑게 저미어 오면
떨어지는 꽃잎들이 날개깃 하지만
심난한 삶이 흩어져 죽어간다.
열매도
맺기 전 우수수 떨어진 꽃받침
나신이 서있는 길섶에 수북하니
지는 삶의 노을처럼 너부러져있다.
푸른 잎들 사이로 고개 저민
열매들이 살랑 이는 바람 앞에
애처롭게 속삭인다.
서성이는 늦봄 더위를 이겨내고
붉게 농익은 달콤한 앵두가
탐스럽도록 먹음직스럽다.
유혹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어
너를 한입 품으니 봄날이 간다.
늦봄에 /박종영
들찔레 하얀 가슴 열고
하르르 하르르 생글거리면
먼 산 뻐꾸기 울음
산막집 처녀 그리운 정에 가슴 메고
낮은 목소리로 반짝이는 앞 방죽 물살
은빛 가슴에 물수제비 뜨면
콩콩 튀어 오르는 까까머리 얼굴들
늦은 후회로 찾은 고향길에
시린 맘 달래주는 수달래
분홍빛 화음으로 그리움 차오르고
자주 고름 곱게 매던 분홍치마 그녀
옛 그대로 잘 있을까
늦 봄 /유봉길
어릴적
동네 양계장에서
계란 한알 훔쳐
조심조심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점심때쯤
결국은 깨져 먹지도 못하고
그나마 하나뿐이던
봄부터 늦여름까지 입고 다녔던
여름 반바지
계란 범벅 만들고
가까스로 어른되어
뒤돌아 보는 늦봄..
늦봄 아침 /구재기
배추속대 오르는 듯한 봄 이야기는
소쩍새 울음소리 달아오르는 어둑새벽에서부터 비롯된다.
이윽고 샛바람을 타고 용수철처럼 아침 햇살이 튀어나오면서
풋송아지는 어미 닮아가는 듯
느슨해진 울음소리를 두어 번 토해내며 남새밭 돌담 위로 뛰어넘고,
새끼오리 두어 마리가 졸음에 겨운 몸뚱이를 흔들며 물가를 찾아 나서면,
요요요 강아지풀에는 차가운 이슬방울 몇.
뒤꼍 넘실대던 사당에는 무거운 고요가 내려 깔리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부터 나라에 크게 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징징 울음을 터뜨렸다는 정자나무의 그림자가 아침 햇살에 헐떡이는데,
어디서부터 밤을 세워 달려온 것일까,
장꾼들의 말방울 소리가 북적하다 했더니
샛문 틈으로 피어오르는 쇠죽 내음새가 훨씬이나 흥청인다.
늦봄 끝자락Ⅱ /윤갑수
콧등에 망울진다.
가슴 조이듯 땀방울이 몽글몽글
미세한 움직임에도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스쳐간 바람이 그립다.
햇살은 헐벗긴 머리위에 따갑도록
내리쬔다.
헐레벌떡 숨소릴 조이듯 봄의
끝자락에 해맑은 하늘이 야속타
구름 없는 태양의 묵언시위가 눈
시리도록 봄은 멀어져 간다.
뜨거움이 몰려온 정오
나무 우듬지의 새싹들도 축 처진
모습이 가슴 아리도록 안쓰럽다.
뿌리치지 못한 봄의 향연이 끝나고
여름이 다가오니 마음 한구석에
꽃피던 봄날을 조용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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