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마 / 강정식
방송국마다 피해 속보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300mm 이상 내린 살인적인 호우로
서울의 서쪽이 침수되고
물에 잠겼다 고속버스 터미널이
벌써 3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단다
늦은 아침을 꾸역꾸역 먹으며
점심에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면서
느긋하게 소파에 가로누워
TV 화면을 강 건너 물 구경하듯 바라보며
깜박깜박 낮잠 속으로 다시 빠져 든다
비는 계속 전국 온 사방에 쏟아지고
겹겹으로 자동차들이 처박힌
시장 통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사망자 수는 이미 40여 명을 넘었다
맥없는 잠도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7호선 운행이 중단되고
도심의 신문사가 물에 잠기고
사망자 수가 50여 명을 넘은 것 외에는
아무 일이 없나 보다
100mm 이상의 비가 더 예상된다지만
내게 별일이 있을 리 없지 여기며
게으른 낮잠 속으로
더 깊이 빠져 들어간다
빗줄기는 줄기차게 거세지고
TV 화면에서는 아우성이…
40명, 50명, 6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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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 강희찬
바깥은 온통 빗금 투성이다.
뜨거운 욕망을 숨긴 울매미처럼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은신처로 빨려 들어 갔다
전선은 종잡을 수 없이 이동 중
막하 섯부른 선택은 금물임
비는 앙갚음이라도 하듯
본디 욕심 이상 쏟아부었다
반발하는 우울 두 분자, 분노 한 방울
낮은 곳을 찾아 어디든 강림하사
쓸어가야 할 것은 모두 쓸어 가야지
터전을 잃고 쓰린 가슴속까지도
비는 이미 분별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시계추는 물을 먹은 듯 무거웁다
나름의 기대치는 승산이 없지
갈증은 습습한 틈바구니에 웅크린
독버섯처럼 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모든 인내는 전선 뒷전에서 종종 걸음중
은신처에 탕난 욕망들은
쨍하는 햇살이 장막을 가르자
원래 모습으로 단숨에 복귀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과장은 심해지고
아무리 잃어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아무도 못 넘볼 배짱 한 움큼이라도,
하지만 벌써 모두 잊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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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 강해림
복지교회 옥상 위에서 예수가 비를 맞고 서 있다 첨탑 십자가를 향해 빗줄기가 심문하듯 창끝, 꽂힌다 시멘트 바닥 널브러진 검은 비닐봉지와 널빤지 조각들 퉁퉁 불은 기억의 한쪽 끝을 움켜쥔 채 빗물 토해내고 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멀어, 꿈과 현실을 사선으로 이어주던 양철계단이 삐걱거리며 무거워진다 빗소리에 지붕과 지붕, 번지와 번지 사이 구원이라 믿었던 길들 경계가 실려가고 삶의 찌꺼기가 홈통을 타고 흘러내린다
세상을 온통 붉은 녹물로 뒤섞어놓으며 범람하는 시간의 하수도는 만원이다 밤새 중얼거리던 주기도문이 떠내려가고 누추와 생활의 무게로 달그락거리던 세간살이가 떠내려간다
며칠째, 옥상 안테나는 복음 대신 빗소리를 송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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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 공석진
서러움이
살점 뜯어내는
눈물 쏟는구나
뼛속까지 스며
골수로 아파하여
애흔(愛痕)마저 흐르나
그리움 출렁이어
가슴 속 흘린 눈물
천 길 만 길
찬란했던 사랑은
추락하는 몰골로
끝없이 울어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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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 공현혜
영월댁 할머니 마디 굵은 손엔 지문이 없다
호밋자루가 다 지웠다 했다
같이 사는 할아버지 손에도 지문이 없다
삽자루가 다 지웠다 했다
동네 사람들은 두 사람이 한집에 사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이 되려고 만난 것이기에 가족 있는 사람들은
모른 척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한 탓이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할아버지는
높은음 목소리로 전국 사투리를 쓴다
담너머 들려오는 할아버지 화난 목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웃을 수 있는 것도
할머니가 막걸리 통 들고 빨리 걷는 것도
사람들에게는 재미있는 하루 일과였었다
은행이라고는 한뼘 소금 항아리가 다였고
귀한 반찬은 낚시에 걸려던 생선 뿐이던 생활
목소리 엮이고 목소리 엮으며 마음 엮어 살던 날은
할아버지 아들 찾아 오던 날이 마지막 장면이었다
소금 항아리깨진 그날은
억수장맛비 쏟아지고
경찰차도 병원차도 안왔다
밥상에 마주 누워 할아버지는 왼쪽으로
할머니는 오른쪽으로 지문 없는 손가락을 걸었을 뿐
흙 발자국 넘치는 방안에는 빗소리만 가득 들어앉았다
동네사람들은 무덤 하나에 두 사람을 뉘었다
눈물 마르는 사람 없었고 제자식 보고 웃는 사람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나흘 동안 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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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 권순자
장맛비에 꽃길이 묻히네요
오래도록 서러운 꽃물이 번지네요
뭉쳐 가슴 속 깊이 박혔던 그리움들
빗줄기로 갈라져 마구 쏟아지네요 쓸쓸한 빗소리
꽃잎은 빗물에 둥둥 떠내려가며 눈물 삼키고 있네요
세상의 모든 상처들은 다 비명들처럼 끓어오르고
캄캄한 울음들은 빗금들을 쳐가며 일렁이는
무늬들만 자꾸만 더 새겨놓네요
투명한 내장처럼 당신의 얼굴이 또 포개지네요
어쩌죠 당신을 향한 뿌리가 아직도 저토록 자라나고 있으니
길거리에서도 저토록이나 당당하게 출렁대오고 있으니
장맛비에도 아랑곳 않고 저토록 뜨겁게 자라나고 있으니
당신의 선홍색 목소리도 둥둥 떠내려오고 있으니
붉은 촉수로 젖어 온통 산지사방으로 다 흘러내리고 있으니
구름이 수면 아래에도 둥둥 떠내려오고 있네요
얼굴이 온통 퉁퉁 부어올라 그리움마저도 퉁퉁 다 부어올라요
물컹물컹한 이 그리움들만 점점 더 불어나네요
그리움이 다 터져버리면 이토록 비만 내내 내리게 되는 걸까요
초라하고 측은한 낮달은 저 하늘의 또 그 어디엔가 숨어 있다는 걸까요
창백한 회색의 저 허공 위에서 저 혼자만이 오로지 안 젖어들고 있다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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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 김길자
구름 하나가 중천에서
헛구역질 몇 번 하더니
이내 울컥울컥
쏟아붓는다
나뭇잎들이 목 놓아 울어
개울마다 눈물이 넘치고
상처 난 대지의 신음소리
초록의 몸부림이다
장마 끝에서
막중한 책임을 놓칠 수 없어
땀과 눈물의 시간을 딛고
떼 지어 개망초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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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 김병훈
어머니의 양산은
며칠째 휴가 중입니다
아버지의 우산은
며칠째 야근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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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 김안로
비는 잠시
그치고
내 생각은 영영
잠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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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 김주대
아버지만 당신의 생애를 모를 뿐
우리는 아버지의 삼 개월 길면 일 년을
모두 알고 있었다
누이는 설거지통에다가도 국그릇에다가도
눈물을 찔끔거렸고
눈물이 날려고 하면 어머니는
아이구 더바라 아이구 더바라 하며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놓고 했다
아직은 아버지가 눈치 채지 못했으니
모두들 목구멍에다가 잔뜩 울음을 올려놓고도
내뱉지는 않았다
병원 출입이 잦아지면서 어느 때보다
무표정해진 아버지 얼굴에는
숨차게 걸어온 오십구 년 세월이
가족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전에 없이 친절한 가족들의 태도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이미
당신의 남은 시간을 다 알고 있으면서
가족들을 위해
살아온 생애가 그렇듯 애써 태연한 건지도
여름내 아버지 머리맡에 쌓이는
수많은 불교서적들에서
내가 그걸 눈치 챌 무렵
어머니가 열어놓은 창 밖에는
긴 장마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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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 박태원
계곡을 휘감아 돌아
바쁘게 길을 재촉하는 너
무엇이 그리도 좋아
덩실덩실 춤을추며
흔한 눈 인사도 나누지 않고 떠나가는가
며칠전만 해도 너를 기다렸는데
이젠 너를 보내고 싶다
네가 짖굿은 짓 안 하고
고이 머물러 주는것 고마운 일
하지만
구름속에 해바라기 얼굴을
기다리는 탐스러운 수국은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으니
얘야 미안하구나
몇 날이 지나 다시 내릴 때
거친 방망이 질 해대지 말고
수줍은 아가씨처럼 고운 잎새에
사뿐히 내려앉아 꽃잎을 어루만져 주다가
방긋 고운 미소 띄우며 인사해 주고
길 떠나면 얼굴마다 환한 웃음꽃 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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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 송정윤
장마비가 내린다
어깨에서 내 발끝까지
새들은 날지 않고
소낙비만 요란하게
강물소리 떠간다
7월에 장마는
막걸리처럼 시원하다
그 막걸리에
내가 너무 취해 버렸으니
언제쯤 저 꽃들은
저 강을 건널까
==============
+ 장마 / 안재동
믹서기에서 순식간에
형태 사라진 토마토처럼
머릴 짓누르던 생각들
어디론가 몽땅 사라지고 이젠,
바윗덩이처럼 커진 적막
머리를 압박한다
휴일 명동, 동대문시장
혹은 디스코장 같이
사람 붐비고 귀 찢어질 정도
음악 소리 시끄러운 곳
애타게 그리워진다
개구리 떼 소리처럼
와글거림에 지쳐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산중
혹은 혼자만의 공간으로
달아났으면 싶던 때처럼
가뭄, 한 때 소나기 후두둑...
또 가뭄, 이젠 장마
--------------------
+ 장마 / 이승복
잿빛 하늘이
머리를 감는다
금이간 황토 벌에
종종걸음 얼굴마다
땀과 빗물이 범벅이다
빗물에 취한 대지가
황룡이 헤엄치며
꼬리를 세울쯤
어수선한 가운데
이웃끼리 맞잡은 손
퍼담은 근심을 풀어놓는다
꼭 이맘 때 찾아오는
질긴 인연이라
준비는 길어도 닥친 일은
태산이다
비 맞은 삶이 빗물을
어느 정도 털어 내면
붉은 노을에 타 들어간
목젖이 쉰 소리로
잦아든다.
---------------------
+ 장마 / 이영균
빗줄기 세찬 어둠의 끝
서늘한 마음 서성거린다.
회상, 애써 빗물에 씻어내는 후회스러움
참호 속 눈동자 검게 부풀어 오르던
굳은 무언의 언약
세찬 물기둥에 둘러싸이던 밤
삶과 죽음 앞에서의
어쩜 신과의 맹세였을지도 모른다.
평생 가슴을 놓아주지 않는
푸른 유혈의 고통
그날의 비명 아직도 세차기 때문이다.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장마의 그 끝엔
무성한 전선의 포성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먼 훗날
그래도 포성보다는
그 밤은 심한 장마였다고 기억되리다.
---------------------
+ 장마 / 이지언
검은 먹구름은 떼를 지어
우르르 몰려와 도시를 점령했다.
벌써 며칠 째 밤이고 낮이고
되풀이되는 집중호우.
죄 많은 도시의 죄를 씻기 위해
슬픔 많은 도시의 슬픔을 거두기 위해
한 여름의 빗줄기로 세상에 내려와
진흙빛으로 갈아입고
처참하게 생명을 잃을 줄 알면서
이 땅에 내려와 자신을 내동댕이 친다.
슬픔의 잔치는 좀처럼 쉽게 끝나지 않는다.
낮은음을 자랑하는 첼로의 독주곡처럼
너는 한 낮에 한 밤의 우울함을 연주하는
불행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기쁨보다 눈물을 사랑하는 음률의 시인이다.
============
+ 장마 / 이현우
넉 잠 후 섶에 오른 오령(五齡)누에가
뽕잎 물든 소리를 갉아먹는 밤
마음 속 잔등(殘燈)마저 꺼지고 나면
기나긴 실을 뽑아 제 몸을 감고
하염없이 떠도는 깃 잃은 날개.
---------------------
+ 장마 / 임영준
이것저것 모두 다
뒤죽박죽인데
어김없이 찾아왔구나
어느새 우리가
허튼소리에 익숙해
둔감한 껍질만 남았던가
지루한 공방 사이를
어설픈 광대들은 헤매고
헐벗은 여름을 난타하는
울분의 빗줄기들은
흩어진 민심을
잠시라도 엮으려
연일 패거리 지어 다니는데
---------------------
+ 장마 / 한상숙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많은 눈물 흘리고도
울음을 멈출 수 없는 걸까?
끊임없는 너의 눈물에
꿈이 심어진 논두렁이 무너지고
골목길이 물에 잠겨
타협할 수 없이 거래가 끊겨진 세상에
무거운 기운만 감돈다.
퇴비장 옆에 얼굴내민
해바라기 한 그루는
햇살 그리다가 지쳐
고개 떨군다.
익어가던 열매들이
천둥소리에 놀라
성장을 멈추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
--------------------------
+ 장마 記 / 박금숙
장대 같은 비는
연일 아픈 구석구석을 찔러 대고
패인 상처마다 습한 기억들이
푸른곰팡이처럼 피어오른다
간간 스치는 바람이
아릿한 생각의 끄트머리를
저만치 밀어내곤 했지만
이내 먹구름을 몰고 와서는
우울한 독백을 쏟아내고 만다
건너지 못할 강의 수심은
깊을 대로 깊어져
더 이상 슬픔의 깊이를
드러낼 수가 없다
차라리 역류라도 할 수 있다면
퉁퉁 불어 오른 기억들을
죄 흘려버리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살아오면서
때때로 열어 말리지 못한 속내들이
이미 먹구름으로
또아리를 틀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랫목 온기라도 지펴볼까
아, 오래 순환되지 못한 보일러가
웅웅 숨통을 열고
응얼졌던 피톨들을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다.
===============
+ 장마 비 / 박인걸
7월 하늘은 슬프도록 흐린데
쥐어짜지 않아도 눈물 같은 비가
뚝뚝 후드득 흩날리고 있다
고달프고 외로운 내 마음을 아는지
저 산속 숲과 풀이 물결처럼 출렁인다
사랑하는 그대 모습 그릴 때마다
가느다란 흔들림에도 내 마음 멍이 든다
지나간 날들을 떠 올려보면
송아지 고삐 같이 끌려온 추억뿐
잘못 살아온 어눌한 청춘이여!
이제 그만 지긋지긋한 장마비와 함께
저 멀리 떠나가 주렴!
--------------------------
+ 장마비 1/ 유일하
7월 하늘은 슬프도록 흐린데
쥐어짜지 않아도 눈물 같은 비가
뚝뚝 후드득 흩날리고 있다
고달프고 외로운 내 마음을 아는지
저 산속 숲과 풀이 물결처럼 출렁인다
사랑하는 그대 모습 그릴 때마다
가느다란 흔들림에도 내 마음 멍이 든다
지나간 날들을 떠 올려보면
송아지 고삐 같이 끌려온 추억뿐
잘못 살아온 어눌한 청춘이여!
이제 그만 지긋지긋한 장맛비와 함께
저 멀리 떠나가 주렴!
--------------------------
+ 장마 통 / 권오범
북쪽에서 태어나 차갑게 팽창하는 무리와
남쪽에서 태어난 화끈한 천성
조물주가 지구 거름발 위해 수작 부린 상극이라
만나지 말아야 평화로운 사이
그러나 어쩌랴
삶의 원천 공급 목적이 우선이라
세력이 비대해지면 모름지기
싫든 좋든 치러야 하는 전쟁이 숙명인 것을
만나기만 하면 철천지원수 같이 으르렁거리다
결국엔 끝장을 봐
세력이 와해돼야 직성이 풀리는
피차 득 없는 연중행사
인간들 방패인 우산과 동행하도록 밀고 밀리다
며칠 조용한 걸 보면, 아마
세력 보충할 때까지 휴전하기로 했나
상투적인 수작이 궁금해 그냥 속가량 해보는 7월
----------------------------
+ 가을장마 / 오정방
갈 장마 하염없이
저렇게 내리는 건
겨울을 재촉하는
자연의 흐름인 저
온몸에
젖어든 한기寒氣
무엇으로 데우리
================
+ 건들장마 / 권오범
열대야로 흐리멍덩하게 지지고 볶더니
가을 향한 어중간한 처서 보폭에
잦은 작달비에 버무려진 세상
모처럼 아스팔트에 꽂힌 햇귀가 투명하다
유리창이 제집인 양 달라붙어
성하의 푸른 물결 침침하게 막던 먼지들을
어둠 속 더듬거려 말갛게 닦아 내리느라
방울꽃들이 밤새 그렇게 칭얼거렸던 것을
옥상부터 방범등 대머리까지 싸잡아 감기고
뒤란 호박잎 하나 다치지 않게
말끔히 야간작업 끝내고 시침 뚝
그러잖아도 곤댓짓 일삼는 코스모스 세월 만났다
하늘이 평소 볼만장만 하는 것 같아도
삼라만상이 꾀죄죄해지는 꼴을 못 봐
때 맞춰 대청소해주니 죄짓지 말아야지
산책길 비거스렁이가 이다지도 상큼할 줄이야
------------------------------
+ 마른장마 3 / 권오범
면면이 이어와 손에 익었을 연중행사건만
시작부터 션찮아 갈증 해갈이 안 된 우리 동네
그러면서 만날 가마솥처럼 볶는 걸 보면
밑천이 딸리나 보다
우중충한 구름 시켜
만날 더위만 낳아놓고
한 사날 혹은 대엿새에 한 번씩
감질나게 생색만 내는 하늘
어제는 솜 같은 뭉게구름으로 가을까지 표절해
어쩐지 속보여 남세스러운지
오후에 더러 가무잡잡한 것들 집합시켜
드디어 날 잡았구나, 했건만
멀리서 번쩍번쩍 싸우기만 할 뿐
만삭이 된 먹장구름들
밤새 산고로 으르렁거리다 또 흐지부지
떠들기 좋아하는 걸 보면 정치 닮아가나
-----------------------------
+ 장마일기 / 양인숙
우울한 비의 노트를 말린다 속이 다 젖고만 청춘, 꺼져버린 건 미네르바의 램프만이 아니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가방을 버리고, 씨앗을 버리고, 약자를 죄다 버렸다. 도서관 서가에도 장마가 진다 습기에 절은 망자들의 독백. 죽어버린 말들이 더 고혹적이다 산 자의 힘이여, 망자의 유언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망치는 건 순간, 블루의 비망록엔 불후의 명작만을 골라 박아야 한다 한 백 년쯤 서가의 시렁을 장식할 옹골찬 씨앗들만 살아남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잇몸 고운 말들은 다 떠내려가고 흔적 없는 사랑처럼 상처뿐인 우울들아, 안녕 서슬 푸르던 슬픔의 곰팡이여, 이제는 안녕. 골방 한켠에서 꿈의 스토브를 환히 켜고.
-----------------------------------
+ 억수장마 2 / 권오범
만삭으로 더부룩해진 소소곡절
언제까지 끌어안고 여행할 수 없어
어차피 금수강산에 비우려고 작정했거들랑
골고루 적당히 나눠줄 것이지
적선이 아까운 듯
마지못해 찔끔거리다
편파적으로 휘뚜루마뚜루 쏟아부어
놀부같이 티를 내는 몹쓸 심보
무슨 억하심정으로
예 저기
하루아침에 결딴내
애먼 농부들 피눈물 흘리게 하는지
넘치면 부족한 만 못한 것을
엎친 데 덮칠 요량으로
또 기웃거리는
징글징글한 먹장구름들아
================
+ 웬 장마냐 / 장수남=
얘. 야,
네 아버님
비 벌써 그쳤는데 우리 집 밥상엔
또 웬 장마냐
네?
그시기 장화 읍냐.
어머님이 벌써 챙겨 신으셨는데요.
뭐?
고 할망구 동작 되게 빠르데이~~.
내 장화 사러 자갈치 좀 다녀오마.
네??
아버님 오실 때 그럼 우산도 몇 개
더 사오이소
알겠다ㅎㅎ~~~~.
니가 나보다 한수 빠르구나 니한테
한수 더 배워야겠구나.
-----------------------------
+ 장마 그 후 / 홍승표
가거라 다신 네 이름
부르지 않으마
우거진 검 푸른 숲과
滿朔인 들판으로
물안개 찬란한 꿈을 꾸며
떠오르고 있었다.
彷徨은 끝이 없었다
가슴마저 저려왔다
지쳐 쓰러진 바다는
屍身처럼 널브러지고
노을이 섬으로 떠서
몸부림치며 울었다
남겨진 사연들이 몸져누운 그 언저리
여름은 소슬 한 자락에
넘어지고
자빠지고
멀리서 새떼 한 무리가
깃털 번뜩이며 몰려왔다
-------------------------------
+ 장마 사랑 / 오보영=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행여
님의 모습 보이려나
두 눈 크게 뜨고 보았었는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행여
님의 음성 들리려나
두 귀 활짝 열어 기울였는데..
이젠
땅바닥에 튀어 올라
흐트러지는
물거품만 물끄러미
쳐다보누나
-----------------------------
+ 장마전선 / 권오범
저잣거리 건달 같은 구름끼리 만나
공연한 시비 끝에
소나기 한판으로 소멸하고 마는
그런 속 보이는 션찮은 싸움이 아니다
비대해진 조직의 힘 따라 방방곡곡
천방지축으로 오르내리다
마지노선이 무너져야 직성이 풀리는
태곳적부터 세세연년 치러 이골이 난 전쟁이다
아래세상 갈증 해갈시켜 주려다
예 저기 땅거죽 벗겨 쑥대밭 만드는
그리하여 애당초
인간의 피눈물로는 간섭할 엄두조차 없었다
생명의 원천을 계산한 조물주 농간으로
서로 다른 성깔의 기압골로 태어났기에
만나기만 하면 구질구질하게라도
밑천이 고갈될 때까지 티격태격해야 하는
================
+ 장마철에 / 유상철
빗줄기들을 이어서 옷을 짠다면
부끄러운 이 몸을 가릴 수 있을까요
차라리 바위 치는 폭포수가 된다면
이 깊은 회한을 다 씻어낼 수 있을까요
어머님 가시고 처음 맞는 장맛비,
모여서 황톳물이 되고 흘러서 강물이 된다지만
비 갠 날 물 빠지는 강변처럼
어머니의 빈자리만 넓어가는데
아득히 우렁거리는 물결 소리 있어
그 체취를 더듬으며 다다른 고향 어귀엔
새하얀 달맞이꽃들이
떼를 지어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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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월 장마 / 마광수=
장마 가운데 내리고 싶다
내 가슴속 엉긴 핏덩이
좔좔좔 좔좔좔 씻어 내리고 싶다.
무엇이 두려우냐 무엇이 서러우냐
뒤섞여 흘러가는 저 물속에
네 고독이 오히려 자유롭지 않으냐
아아, 못생긴 이 희망, 못생긴 이 절망
밤새워 뒤척이는 숨 가쁜 꿈, 꿈들,
빗줄기 속으로 씻겨져 내렸으면!
긴긴밤 보채대는 끈끈한 이 사랑,
제미처 죽지 못해 미적이는 이 목숨,
우우우 우우우 부서져 흘렀으면!
장마 가운데 내리고 싶다.
내 껍질 모두 다 훨훨훨 빨가벗겨
빗줄기에 알몸으로 녹아들고 싶다.
========================5
+ 7월의 장마 / 나명옥
장마라고 말한 지가
벌써 한 달은 되는 것도 같은데
비는 오다 말다
철부지처럼 천연스럽기만 하다
흐렸다 맑았다
축축하게 몸과 마음만 적시며
그래 세상살이
더도 말고 딱 이만큼만
모자라도 귀신마저 업신여긴다니
누구도 고개 돌리지 않도록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와 위치에서
지나치면 뭐든 산사태 물사태
사랑사태 이별사태 7월 거센 장마처럼
폭우로 쏟아지려니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만 눈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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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끝 산행 / 김길남
장마 뒤 끝이라
표범폭포 밑 계곡이 범람하다
징검다리가 보이지 않아
신발을 초혜로 갈아 신고
기우뚱 거리며 계곡을 건넌다
발 위로 듬직한
바윗 돌이 굴러 감을 느낀다
태양은 생명의 햇 빛을
내리쬐어 주었다
구름은 푸른 하늘을 화폭 삼아
추상화를 그리고
이름 모를 산 새는
발랄하게 지저귀며
푸른 나무 사이로 날아간다
한가로운 새소리가
테레빈유 소나무 향기와
같이 춤을 춘다
야생화가 파르르 흔들렸다
꽃 위에 앉아 있던 점박이 나비가
근처를 한 바퀴 사뿐거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용의 비늘 같은 갑옷을 입은
울긋불긋 적송의 뿌리는
땅을 박차고 나와
승천을 하려는지 폼을 잡고 있다
시야가 너무 맑아
동북쪽으로
금강산 내금강 산 줄기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여
두 발을 높이 들고
그냥 손을 내밀었더니
설잡으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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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비 유감 / 김유택
깊은 밤
장마 오는 새찬 소리
후덥지근 뜨거운 앞가슴엔
땀방울 맺히는 불쾌함
가려움의 인내
일터가 걱정돼
잠자리를 박찼다
긴 밤 일터엔
무슨 일 없을까
날 밝아오는 아침이 두려워
비상연락망 속 직원들
밤잠을 깨운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
직원들은 디지털 시대
양적인 것과
숫자와 계산적 표현과의 불협화음
장마 비가 우릴 싸움의
유혹 빛깔로 젖게 한다
속내를 가리고
얼굴만 드러낸 우리는
새벽 축시(丑時) 때 만난 Salary-Man
장마 비 유감(遺憾)
졸리운 눈 소지(小指)로 비비며
떨어지는 눈꼽만큼
우린 정(精)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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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속의 잠 / 길상호
한 바가지 남은 쌀을 쏟아놓고
쌀벌레 골라내는 어머니, 제발
저의 꿈틀대는 몸은 집어내지 마세요
시간을 까먹고 또 파먹어도
푹 꺼져버린 배를 채울 수 없어
쌀로 만든 집 필요했던 거예요
아직 날개 돋지도 않았는데
이제 겨우 단 꿈 씹고 있는데
어머니 시커먼 손가락이 닿으면
서둘게 지은 집 깨지고 말아요
눅눅한 장마 지나고 나면
퇴화된 등판 날갯죽지가
삐걱삐걱 다시 움직일 것 같아요
넌 환상의 방에 누워있는 거란다.
어머니의 말은 듣기 싫어요
깨어나 날개 없이 처박히더라도
그냥 여기서 젖은 몸을 말리게
비 내리는 세상 불러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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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속으로 / 박지원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눈물은 흐르는 대로 두고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장대비 내리고
비와 하나 되는 눈물
그렇게 흘러가고 싶었다
떨고 있을 둥지 밖의 새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걷고 싶었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것들을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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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와 나날 / 허 연
강물은 무심하게 이 지지부진한 보호구역을
지나쳐 갑니다. 강물에게 묻습니다.
“사랑했던 거 맞죠?”
“네”
“그런데 사랑이 식었죠?”
“네”
상소 한 통 써 놓고 목을 내민 유생들이나, 신념 때문에 기꺼이 화형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장마의 미덕이 있습니다. 사연은 경전만큼이나 많지만 구구하게 말하지 않는 미덕, 지나간 일을 품평하지 않는 미덕, 흘러간 일을 그리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 미덕. 핑계 대지 않는 미덕. 오늘 이 강물은 많은 것을 섞고, 많은 것을 안고 가지만, 아무것도 토해 내지 않았습니다. 쓸어안고 그저 평소보다 황급히, 쇠락한 영역 한가운데를 몰핀처럼 지나왔을 뿐입니다. 뭔가 쓸려 가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건,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치료 같은 거죠.
강물에게 기록 같은 건 없습니다
사랑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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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와 아이 / 박재삼
아직 돌도 안 지난 아이가 마루 끝에
빗방울을 보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마당에는 일었다 사라졌다 일었다 사라졌다
나팔꽃 줄기처럼 줄줄이 잇닿은 물방울
너는 네 꿈을 아직 모르고
소망마저도 있을 리 없으나
그 아무것도 없고
그 아무것도 아닌
하늘바탕 그대로의 네 눈망울에
아, 그러나 무심한지고,
너무 길고 너무 큰
장마가 천근의 무게로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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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의 추억 / 강정식
어릴 적 장마는 긴 기다림이다
물 새는 지붕과 벽면 곰팡이가
전장의 기념비 같은 커다란 지도를
상처처럼 남겨
고단하게 살아가던 궤적으로 쌓였다
우묵 배미 안마당
정강이 넘게 흙탕물이
문지방에 찰랑거릴 때쯤
붉은 기와 용마루에도 틈이 자라서
하늘이 보이고
천장을 적시며 영토를 넓혀가
물받이 그릇이
방 안 가득하던 시절에도
우리는 강가로 물 구경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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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철 잔상 / 신석종
오랜 비, 멎고
갠 날
새살처럼 돋는
파란 하늘 보면,
당신 생각에 다시
또, 울컥거려
병자처럼
수 없이, 여러 번
잿빛으로 바래다가
쪼그라든다
세상의 모든
탈색되는 것들이
쌓인 그리움만으로도
이렇게 망연히
절름발이가 되나 봐,
그런가 봐
생의 길 위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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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철 표정 / 신석종
늦봄쯤에 책상 위에 놓였던
업무용 노트 한 권과 책 두 권이
죽은 사람처럼 그대로 누워 있다
그들 몸엔 곰팡이가 살고 있었고
황사가 다녀간 듯 얼굴이 뿌옇다
구름이 매일마다 태양을 삼킨다
내 몸에, 곰팡이 생겨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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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월령 - 장마 / 유안진
칠칠한 머리채 풀어
목을 놓아 울고 싶구나
뼈가 녹고 살이 흐물도록
이승 너머 저승까지
모질게 매듭진 인연
그만 녹여 풀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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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고 슬픈 장마 / 이선명
내 마음에 너는 멍든 살 마냥 검은 먹구름이었다
며칠을 울고 또 울어도 가벼워지지 못할
여름날의 어둡고 무거운 장맛비였다
잠시 해가 보이듯 네 시선이 머물면
무지개라도 본 아이 마냥 하늘을 걸었고
구름 뒤로 사라진 해처럼 표정 없는 얼굴은
내 마음에 절망의 폭우를 뿌렸다
어느새 진탕길이 되어버린 마음은
홀로 선 기다림으로 깊이 파인 미련의 웅덩이를 만들고
웅덩이 가득 흙탕물 같은 나만의 못난 추억은
사랑인 양 미련인 양 슬프게도 출렁인다
장마가 와도 우산하나 없는 궁색한 사랑은
마르지 않는 옷처럼 언제나 무겁고
고인 흙탕물처럼 언제나 흐리다
질퍽질퍽 마음만 진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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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의 장마 / 오보영
어디까지 갈 것인지
얼마나
흩어놓고
무엇을
남길 건지
난 오직 지켜만 보련다
있는 자리 굳건히
버티고 서서
푸른 모습 당당히
비추이면서
무례하게 설치는 널
그저
담담히
눈여겨만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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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가 끝나고 / 김행숙
장마가 걷혔다 아직은 잔뜩 찌푸린 하늘이 내려와 있지만 몇 날 며칠 쏟아붓던 빗줄기가 겨우 멈췄다 성났던 분당천은 노기를 가라앉히고 모든 것은 이제 제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비에 젖었던 오리들은 냇물 가장자리에 몸 담근 채 놀란 가슴 진정하고 아직도 빠르게 흐르는 물살을 바라본다 쏟아붓는 장대비 속에서도 불어난 흙탕물에 쓸려가던 어린 나무들은 아직도 그 자세로 엎드려 외친다 쓸어가라 쓸어가라 나는 그저 어린 나무일뿐 내 힘으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게 아니냐 범람했던 물이 빠지고 나자 수 십 마리의 작은 물고기들이 맨 땅에서 파닥거리고 있다 물고기들을 하나씩 흐르는 냇물에 던져 넣어준다 따스하고 커다란 자연의 손이라야 상처 난 곳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람 하나 방죽에 우뚝 서 있다 냇물에 휩쓸린 나를 건져낼 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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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와 어머니 / 신지혜
여러 갈래의 몸으로 서있다 어머니 잿빛 치마폭 같은 바람 속, 줄무늬눈물 서있다 때로 어머니 구멍 난 가슴 열쇠처럼 햇살 꽂힐 때까지, 어머니 주룩주룩 무너진다 세상을 덮는 비애의 조각조각 꿰매진 일명 퀼트, 바느질 가게에도 빗줄기 여윈 다리를 꺾어 문턱을 넘는다 어둠이 딱딱하여 부술 수 없는 밤에는 어머니, 낡은 상처 한 장씩 꺼내 안감과 속감 두텁게 누비며 탈주의 길을 만든다 길 안과 밖, 무겁고 은밀한 기억까지
저 아득한 하늘 어떻게 다 가둘 수 있을까 이불 위로 삐뚤삐뚤 절망의 실이 풀린다 저잣거리 잡상인으로 머리칼 다 빠지도록, 생목숨 둥글려 만든 똬리 위에 무거운 근심을 얹고 또 그 위에 허공을 얹고 어머니, 허리춤에 매달린 전대 속에서 묵직한 어둠이 절랑거리고 허기처럼 솥뚜껑을 두들기는 한여름 기인 장마, 生의 장작불이 생각의 조각조각을 태워버리면 빗속에 흩어지는 風磬소리처럼 번져가는 물방울의 시간
어머니 각진 시간들 모아 모서리를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시푸른 강 하나 바늘귀를 통과한다 어머니 발자국 지워가는 물줄기, 낡은 지붕 처마 끝에 매달려 환히 빛나는 수천의 몸들. 은뿌리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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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때 참새 되기 / 황동규
하류(下流) 끊긴 강이 다시 범람한다
세 번 네 번 범람한다
외우지 않기로 한다
―물이 지우는 몇 개의 섬
신문을 읽지 말고
혹은 읽으면서 잊어버리고
몇 번 재주넘어
―천천히 참새가 된 나와 아내
비가 내린다
물이 거듭 쳐들어 온다
새는 지붕 간신히 막아놓고
아들아, 아빠가 춤을 춘다
창 틈으로 날아들었다가
머리를 바람벽에 부딪치고
눈앞이 캄캄해져서
참새가 참새가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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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맛비가 내리면 / 홍수희
한 사나흘
나도 물이 되어볼란다
내리는 비만 탓하지 않고
나도 물이 되어볼란다
독방 속에 갇힌 수인(囚人)처럼
단단한 내 마음의 벽안에 갇혀
벽지만 후벼 파던 결별의 세월
아, 이제사 나도 물이 되어볼란다
제 모양만 고집하지 않고
담기는 대로 네가 되어주는
자유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이제사 나도 바다로 가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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