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와 우산에 관한 시 ]
※ 비 오는 날에 / 나희덕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 봄비1 / 김용택
바람이 붑니다
가는 빗줄기들이
옥색 실처럼 날려오고
나무들이 춤을 춥니다
그대에게 갈까요 말까요
내 맘은 절반이지만
날아 온 가랑비에 내 손은 젖고
내 맘도 벌써 다 젖었답니다
※ 아내의 봄비 / 김해화
순천 아랫장 파장 무렵 봄비 내렸습니다
우산 들고 싼거리 하러 간 아내 따라 갔는데
난장 바닥 한 바퀴 휘돌아
생선 오천 원 조갯살 오천 원
도사리 배추 천 원
장짐 내게 들리고 뒤따라오던 아내
앞서가다 돌아보니 따라오지 않습니다
시장 벗어나 버스 정류장 지나쳐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비닐 조각 뒤집어 쓴 할머니
몇 걸음 지나쳐서 돌아보고 서 있던 아내
손짓해 나를 부릅니다
냉이 감자 한 바구니씩
이천 원에 떨이미 해가시오 아줌씨
할머니 전부 담아 주세요
빗방울 맺힌 냉이가 너무 싱그러운데
봄비 값까지 이천 원이면 너무 싸네요
마다하는 할머니 손에 삼천 원 꼭꼭 쥐어주는 아내
횡단보도 건너와 돌아보았더니
꾸부정한 허리로 할머니
아직도 아내를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꽃 피겠습니다
※ 장마 / 황인숙
빗방울보다 단단한 것들이
빗방울을 가볍게
맞받아치는 소리 들린다
또 하염없이 맞받아치는
냉장고 위 천장 구석
둘둘 말린 거미줄, 이라기보다 거미줄의 허물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들이칠 때마다
풀썩, 풀썩, 몸을 뒤챈다
이 방에서 거미를 본 바 없는데
저렇듯 거미의 자취가 종종 보인다
비 오는 날은 거미들이
공치는 날일 것이다
파리, 나방이, 잠자리, 하루살이
그 많은 날벌레도 그럴 것이듯
하필이면 급경사길이 많은 동네에서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를 종종 본다
비 오는 날 그분을 만나면
세상이 폐지처럼
거미줄처럼 눅눅해진다
할머니시여, 빗방울보다 단단하소서
※ 봄비 / 심훈
하나님이 깊은 밤에 피아노를 두드리시네
건반 위에 춤추는 하얀 손은 보이지 않아도
섬돌에, 양철 지붕에, 그 소리만 동당 도드랑
이 밤엔 하나님도 답답하셔서 잠 한숨도 못 이루시네
※ [동요] 우산 / 윤석중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우산 검정우산 찢어진우산
좁다란 학교길에 우산 세개가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 갑니다
※ 봄비 / 안도현
봄비는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 비가 온다 / 김민호
비가 온다
이쯤에서 너도 왔으면 좋겠다
보고 싶다
※ 비가 오면 / 이상희
비가 오면
온몸을 흔드는 나무가 있고
아, 아, 소리치는 나무가 있고
이파리마다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가 있고
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
비로소 젖는 나무가 있고
비가 오면
매처럼 맞는 나무가 있고
죄를 씻는 나무가 있고
그저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이 있고
※ 하늘을 깨물었더니 / 정현종
하늘을 깨물었더니
비가 내리더라
비를 깨물었더니
내가 젖더라
※ 빗소리가 비를 묶어놓듯이
―쌍어문雙魚紋 / 김 륭
혼자 너무 많은 꿈을 꾸었다. 쓸데없이 긴
꼬리를 흔들어대는,
그런 밤엔 살을 굽거나 피마저 돌릴 수가 없어서 가만히
우는 일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앉아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류의 일이어서
나는 벽에 눌러앉은 그림자를 밤새 떼어내며
몸이 마음이 될 때까지 주물렀다.
걱정 말아요. 울지 말아요.
쿠팡에서 배달된 택배상자를 뜯을 때마다 나는
내가 너무 좋아져서 점점 미쳐간다고 마침내 생선에게
머리를 맡길 지경에 이르렀다는 괴이한 문장 위에 엎드려
가물가물 저녁불빛처럼 멀어진 키스를
다시 잡아왔다.
돌무지무덤 하나 만들지 못한 사랑이 그랬고
슬픔이 그랬다.
여기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나는 나보다 먼저
떠내려가는 발자국을 노릇노릇 구운 생선처럼
구경했다.
※ 여우비 / 이 선영
햇살인 줄만 알았던가
어떻게 햇살이기만 하겠는가
그대 다문 입가에 느닷없이 찬 빗방울 떨어질 때 고개 들어 샅샅이 바라보라
나 언제나 그대 눈과 손과 귓가에 가볍게 닿으려는
환한 햇살이지만
이 햇살엔 그대와 나를 적실 수 있는 위험한 비가 감춰져 있는 것을
※ 장마철이면 난 행복하다 / 신형식
장마철이면 난 행복하다
후텁지근한 가슴속에
자존심처럼 간직했던 일들
우르르 쾅쾅
눈물로 쏟아버릴 수 있어
난 행복하다
그리움이 먹구름처럼 끼고
사랑도 만남과 이별 사이에서
시시각각 변덕을 부리는 장마철이면
들고 나갔던 우산을 잊어버려도
핑계가 있어 난, 행복하다
그러다 가슴속까지 흠뻑 젖어도
난 행복하다
울다가도 웃는 세상.
참 지조 없는 세상.
그렇게 사는 것이,
그런 핑계를 댈 수 있다는 것이
나는 행복하다
그대 닮은 하늘 아래서
그대처럼 웃고,
또 그대처럼 울며 살 수 있다는 것이
더 없이 행복하다
장마철이면
그대가 있어서 난 행복하다
장마철이면
그대가 없어도 난, 마음껏 행복하다
※ 비 오는 날의 기도 / 양광모
비에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때로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소서
사랑과 용서는
폭우처럼 쏟아지게 하시고
미움과 분노는
소나기처럼 지나가게 하소서
천둥과 번개 소리가 아니라
영혼과 양심의 소리에 떨게 하시고
메마르고 가문 곳에도 주저 없이 내려
그 땅에 꽃과 열매를 풍요로이 맺게 하소서
언제나 생명을 피워내는
봄비처럼 살게 하시고
누구에게나 기쁨을 가져다주는
단비 같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 이 세상 떠나는 날
하늘 높이 무지개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 비닐우산 / 정호승
오늘도 비를 맞으며 걷는 일보다
바람에 뒤집히는 일이 더 즐겁습니다
끝내는 바람에 뒤집히다 못해
빗길에 버려지는 일이 더 즐겁습니다
비 오는 날마다
나는 하늘의 작은 가슴이므로
그대 가슴에 연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으므로
※ 우산이되어 / 이해인
우산도 받지 않은 쓸쓸한 사랑이
문밖에서 울고 있다
누구의 설움이 비 되어 오나
피해도 젖어 오는 무수한 빗방울
땅 위에 떨어지는
구름의 선물로 죄를 씻고 싶은
비 오는 날은 젖은 사랑
수많은 나의 너와
젖은 손 악수하며
이 세상 큰거리를 한없이 쏘다니리
우산을 펴주고 싶어
누구에게나 우산이 되리
모두를 위해
※ 소나기/ 곽재구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를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격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 약속 / 정일근
늦여름 장마비 속에서
흰 꽃을 밀어올리는
수련睡蓮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만든 집과 집 속의 사람이
속수무책으로 젖고 있는데
한사코 자신의 야윈 몸 위로
화사한 꽃을 피우려 애쓰는
착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의 굵은 손바닥 후두둑 후두둑
세상의 등을 때려
큰 절집과 열세 채 작은 절집 품은
영축산 통도사도 단단한 결가부좌를 풀고
눅눅한 오수에 빠져드는데
산山 번지도 사라진 빈터
깨어진 돌확 속에서
단정한 앉음새로 앉아
가을이 오기 전에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그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찬 빗속에서도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예, 라고 대답하며 수런거리는
수련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 여보! 비가 와요 / 신달자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
너무 뜨거웠던 적의
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
무겁고 치열한 싸움은
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 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 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 정지용 시 「향수」에서 인용.
※ 비를 헤아리다 / 한혜영
쉴 새 없이 유리창을 할퀴는 저 섬뜩한
손톱! 언뜻언뜻 칼날까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여간 오랫동안 벼른 원한이 아니군요
우리가 어디에서 만난 겁니까
솔직히
시간을 더듬어도 잘 모르겠어서 소환하던 기억을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그대에게 빌린 문장을 돌려주지 않고 도망쳐 왔을
아니면 당신의 야망이라도 가로채 야반도주를 했을까요? 그도 아니면 당신에게 목숨 빚이라도 졌는지도
비가 상처를 세우면 내 마음에는 손톱자국이 깊어집니다 일방적이긴 하지만 그것을 비의 폭력으로 규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습관은 질기고 나는 나를 책임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득 비하고 나하고
조상이 같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드는군
어떤 인과성이 없고서야 목소리가 저렇게 닮을 수는 없다는, 남의 탓을 하는 원성까지도 똑같다는
단지
창문 아래 수북한 비의 손톱에서는 그 뿌리의 내력을 읽을 수가 없을 뿐입니다
※ 비의 목록 / 김희업
손바닥에 닿으면 부러지는 연약한 비
비가 거리의 목록에서 노점을 지웠다 오늘은
가난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산을 펴자 비가 우산 위로 사납게 달려들었다
우산은 우산 크기만큼만 비를 가려주었다
온다는 소리 없이 집집마다 비가 다녀갔다
섭섭하지만 비를 뒤쫓아갈 필요가 없었다
훗날을 기약하며 보내주기로 했다
비를 모금함 속에 모아두는 엉뚱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사람을 불러모으는 재주를 가진 노점이 사라진 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에 스며들었는지
한산한 거리가 비로 시끌벅적했다
비에 쫓겨난 봄꽃은 어디서 보상 받을지
생계가 막막해진 봄꽃이
뿔뿔이 자취를 감추었다
손바닥에 닿으면 부러지는 연약한 비에도
바퀴의 노동은 멈추지 않고, 내일도 모르고 앞만 향해 자꾸
달려간다 이런 날, 바퀴도 없이 미끄러지는 사람이 꼭 있더라
저만치 자신을 내팽개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비가 거리의 목록에서 이제 웃음조차 지우려 한다
오늘은 비의 목록에 따뜻한 위로가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 이상국
비가 오면
짐승들은 집에서
우두커니 세상을 바라보고
공사판 인부들도 집으로 간다
그것은 지구가 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가 오면
마당의 빨래를 걷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고
강을 건너던 날 낯선 마을의 불빛과
모르는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는 안 가본 데가 없다
빗소리에 더러 소식을 전하던 그대는
어디서 세상을 건너는지
비가 온다
비가 오면 낡은 집 어디에선가
물 새는 소리를 들으며
나의 시도 그만 쉬어야 한다
※ 비 / 서숙희
아무도 없는 밤을 누가 톡톡 두드린다
창문을 활짝 열고 귀마저 환하게 연다
늦도록 불 켜진 창에 빗금들이 깃을 부빈다
가볍게 스치는 여린 물빛의 느낌표들
빗금과 빗금 사이 번짐이 함뿍 젖어
투명한 울먹임으로 가슴에 스며든다
뒤척이는 한 영혼과 명징한 빗소리가
적막이라는 따스한 둘레 안에 깨어서
가만히 밤을 넘고 있다, 서로를 기댄 채
※ 비가 호수를 때릴 때 / 이기홍
문득 보았다
고요하던 호수가 징처럼 흐느끼는 것을
비 맞으며 호수는
비애를 가득히 밀어내고 있었다
비 그치자
징은 사라지고 호수는 넓고 깊어졌다
평평한 수면 속 푸른 핏줄이 비친다
비바람에 쓰러졌던 풀잎들도 호수가 일으킨다
어머니에게서 징들이 사라진 건,
이웃집 빨랫감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국수 반죽을 밀다 그런 줄 알았다
젊어서 네 아버지를 여의고부터
가슴속에서 종종 징이 울리더라
그래서 그 징을 저 호수에 버렸단다
우기 동안 어머니가 징소리를 견딜 때까지
아, 나는 왜 아무것도 듣지 못했나
풀잎들이 다시 바람에 씻긴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불 때
젖어들며 나는
가만히 엿듣는다
호수 가득한 당신의 징소리를
※ 진종일 비 / 윤성택
비는 오랜만에 우산에서 종일 기다려주었다
우리는 한철 내리는 빗속에서 튀고 있다
빗방울 속 파문을 열고 들어가 순간을 움켜 본다
너는 왕관 속에서 한 방울로 아름다웠다
우유 광고를 볼 때마다 기억은
그 왕관 속 탄력으로 싱싱해진다
빗소리는 어딘가로 다이얼을 돌렸고
꽃나무들은 와이파이를 켜두었다
아니 그렇게 되기만 바랐다
하나의 물방울이
다른 하나에게 기대어
주르륵 결을 탄다
우산을 쓰고 걷다
흠뻑 젖어도 좋을 오른쪽의 편애를
느끼는 나무들
비는 작정하고 예보를 들어줄 모양이다
예감을 내일로 묻어 두기로 한다
꿈속에서 죽은 사람의 여권으로
낯선 국가에 가서
여생을 비밀로 살다 부스스 일어난
꽃들이 지고 있다
비들이 지고 있다
※ 비 오는 날에 / 나희덕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 봄비 / 정호승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 장마 / 문인수
비는 하염없이 마당귀에 서서 머뭇거리고
툇마루에 앉아 있으니 습습하다
목깃 터는 비둘기 울음 습습하다
어둑신한 헛간냄새 습습하다
거미란 놈이 자꾸 길게 처져 내렷다
제 자리로 또 무겁게 기어 올라간다
두꺼비 한 마리가 느리게 가로질러 가는 ...
어머니 콩 볶으신다
비는 하염없이 마당귀에 서서 머뭇거리고
※ 어디 우산 놓고 온 듯 / 정현종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 우산 / 도종환
혼자 걷는 길 위에 비가 내린다
구름이 끼인 만큼 비는 내리리라
당신을 향해 젖으며 가는 나의 길을 생각한다
나도 당신을 사랑한 만큼
시를 쓰게 되리라
당신으로 인해 사랑을 얻었고
당신으로 인해 삶을 잃었으나
영원한 사랑만이
우리들의 영원한 삶을
되찾게 할 것이다
혼자 가는 길 위에 비가 내리나
나는 외롭지 않고
다만 젖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먼 거리에 서 있어도
나는 당신을 가리는 우산이고 싶다
언제나 하나의 우산 속에 있고 싶다.
※ 감색 우산 / 문성해
엊그제 발 담근 계곡에서
급한 비를 받아낸 우산을
오늘 내다 말린다
그곳에서
엉덩이춤을 추던 연변 여자들과
계곡마다 평상을 앉히고
음식을 나르던 근육질의 총각들
깔깔거리며 뒤집어지던 나뭇잎들과
허연 넓적다리들
소란을 다 받아내던 민달팽이 등 위로
당신과 내가 쏟아낸 웃음은 몇만 타래인데
그 들끓는 물방울들을 다 받아낸
우산은 짙은 감색인데
오늘 우산은 누가 채근하는 것도 아닌데
급속히 마른다
식당으로 피혁 공장으로 흩어진 여자들의
하초도 마르고
민달팽이의 민등도 마르고
눈물 많은 당신도 마른다
내 감색 우산은 여전히 참 잘도 튕겨낸다
언제나 웃음처럼 활짝 펴진다
※ 카페 세라비 / 박정원
그곳에 내가 있을 것 같은
그곳에 꼭 그대가 있을 것 같은
종로에는
비가 몰아쳐도 바람이 불지 않는다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하나 매섭지 않다
오늘 다시 우산을 잃어버린다 해도
그때 그 자리에 또 놓고 온다 해도
거기 어딘가에 우리가 있을 것 같은
그 카페에는 내 잃어버린 우산이 없다
더이상 잃어버릴 우산도 없다
혹시 그대 옆 빈자리에 우산 하나
다소곳이 눈물짓고 있다면
외로히 종로를 걷고 있을 딱 한사람만을 위해
그대로 놓아다오
※ 보헤미안 광장에서 / 김상미
갑자기 내리는 비
그 비를 피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펼쳐지는 우산들
그러나 우산은 지붕이 아니다
아내 있는 남자가 남편 있는 여자가
몰래 잠깐 피우는 바람 같은 것이다
갑자기 내린 비가 멎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러니 사랑을 하려거든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하려거든
한 지붕 아래에서 하라
갑자기 내린 비는 금방 지나가고
젖은 우산에 묻은 빗방울들은
우산을 접는 순간 다 말라버린다
※ [ 동요 ] 우산 / 이규경
비 오는 날이었어요.
낯선 아이가 내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어요.
"그래, 같이 가자.
우리는 나란히 우산을 받쳐 들고
갔어요.
우산 하나를 두 사람이 쓰다 보니
반은 서로 비를 맞았지요.
반은 서로 비를 맞은 대신
반은 서로 친구가 되었어요.
그래요.
나누어 쓴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에요.
'詩心에젖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능소화에 관한 시 모음 (0) | 2024.07.21 |
---|---|
짜장면과 국수에 관한 시 (0) | 2024.07.17 |
장마철이면 난 행복하다-신형식 詩 (0) | 2024.07.17 |
장마에 관한 시 2 (0) | 2024.07.06 |
장마에 관한 시 모음 (0) | 2024.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