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짜장면을 먹으며 / 정호승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짜장면보다 검은 밤이 또 올지라도
짜장면을 배달하고 가버린 소년처럼
밤비 오는 골목길을 돌아서 가야겠다.
짜장면을 먹으며 나누어 갖던
우리들의 사랑은 밤비에 젖고
젖은 담벼락에 바람처럼 기대어
사람들의 빈 가슴도 밤비에 젖는다.
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
비 젖어 꺼진 등불 흔들리는 이 세상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 국물 / 신달자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이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 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 국수를 먹으며 / 신달자
황혼녘 변두리 음식점에서 혼자 국수를 먹는다
먼데서 온 사람처럼 낯선 음식점에서 뜨거운 국수를 먹으며 창문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오늘같이 불쑥 걸어나온 싱거운 내 발길에 국수장국 같은 간간한 맛이라도 배일 것인가
국수 하나 먹는 일에 몸을 바치며 땀흘리듯 그렇게 무용하게 땀흘리며 살아온 날들이 많았다
빈 박 속같은 가슴에 비린 국물을 마시고 조금씩 어두어 가는 낯선 창 밖을 내려다보는
내 인생은 얼마나 비린 것일까
그러나 순결한 시간이여 헛헛한 어깨를 낮추며 해 저문 거리의 어둠을 밟는다
※ 잔치국수 / 이해인
삶은 하나의 축제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잔치국수를 먹다보면
외로운 이웃을 불러 모아
큰 잔치를 하고 싶네
우정의 깊이를 더 길게 늘려서
넉넉한 미소로 국수를 삶아
대접하고 싶네
쫄깃쫄깃 탄력있는
기쁨과 희망으로
이웃을 반기며
국수의 순결한 길이만큼
오래오래 복을 빌어주고 싶네
※ 종로, 어느 분식점에서 아우와 점심을 하며 / 황지우
국수 두 그릇과 다꾸왕 한 접시를 놓고
그대와 마주앉아 있으니
아우여, 20년 전 우리가 주린 배로 헤매던
서방 고새기 마을 빈 배추밭이 나타나는구나
추수가 수탈이었음을, 상실이었음을 그 때 우리는
몰랐어도
다 거두어간 뒤의 허한 밭이 우리에게는 더한 풍요였다
내 입으로 벗긴 배추 등걸을 어린 그대에게 먹일 수 있었다
그대가 곱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경계가 있고
찬 저녁 노을이 우리를 몰아낼 때까지 거기가
할퀸 우리 땅임을 몰랐으므로
아우여, 이농의 허천난 후예로서 우리는
가시 돋친 탱자나무 울타리 안을 노려보며
땅강아지같이 살아왔다
거지와 도둑이 사는 마을, 닐니리 동네와 철로변 하꼬방촌을 전전하며, 땅 바깥으로 삶을 내동이치는
울타리가 도둑질이며 도둑질을 하게 한다는 것을
알기도 전에 어느새 내가 울타리 안에 있음을
아까 악수하는 그대 손바닥이 알려준다
울타리를 치지 않기 위해서 밖으로 나간 아우여
국수를 한 입에 몰아넣는 그대 앞에
나의 허기가 사기라는 것을,
아 어쩌다가 내가 시인이 되었을까,
국수와 설움과 쫓겨난 땅을 노래하는 일까지 극치의
사치라는 것을
아우여, 용사여,
두려워서 자백하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나간 길과 다른 나의 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통로, 나의 길
나는 늘 경계에 있었다
대구와 양산, 김해 혹은 영등포에서 빡빡 깎은 그대 머리를
대했을 때 우리는 깔깔 웃었다 그게 나에 대한 그대의 면책은
아니었다 면책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계가
나의 에펜네, 새끼들, 그리고 그대와 나의 어머님,
지금도
해남에서 땅에 코를 박고 살아가고 있는 형님과
나 사이에도 있다 나의 분노는 슬픔을 지나온 것이다
나는 뚫고 가야 하리라
내 등을 그대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그대가 먼저 떠나라
우리는 다꾸왕은 한 입도 대지 않았구나
빈 국수 그릇에, 그대와 나의 새벽 공복을
울리고 가던 송정리행 기적소리
※ 짜장면 / 오철수
중국집에 음식을 시켰는데
평소보다 한 다섯 배는 늦었다
배달하는 아이가 문을 들어서며
오늘이 초등학교 졸업식이라서……
그랬다
삼십 년 전 나도 처음으로 탕수육과
짜장면 먹었다
삼거리 이층 북경반점
지금은 계시지 않는 아버지가 작업복 차림으로 잠깐 나오셔
빙긋 웃으시며 한 젓가락 더 담아 준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점심
먹었다, 모처럼
※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싶다
※ 자장면 / 박경희
그대와 헤어지고 걸었던 정읍역
터진 가슴 단풍나무에 걸어놓고
세워둔 자전거 헛바퀴 돌 듯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울었다
전선 위, 우두커니 하늘바라기 하는
비둘기 날아와 쿡, 쿡
흐트러진 물웅덩이 속으로
들어간 그대, 그림자만 흔들렸다
자전거 바퀴살에
갈라지는 햇살을
울먹이는 손으로 자르다가 바라본
수타 자장면
퉁퉁 부은 가로등 밝히며
울고 있는 자장면을 먹었다
이별하고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배고픔이
뚝뚝, 불빛으로 흔들렸다
그대와 걸었던 발자국이 번져
단풍잎으로 남은 곳에서
※ 황홀한 국수 / 고영민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랗게 말아
그릇에 얌전히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의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 짜장면 냄새 / 안도현
짜장면 냄새가 나도 침을 삼키지 않겠다
다짐하고 중국집 앞을 지나간다
짜장면 냄새가 내 코를 잡아당긴다
킁킁 콧구멍이 벌름벌름
그래도 나는 침을 삼키지 않겠다
다짐할수록 내 코가 길어진다
내 코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짜장면 냄새
항복이다, 항복!
두 손 들었다
내가 졌다
짜장면 냄새하고는 싸워 볼 수도 없다
※ 도반(道伴) / 이상국
비는 오다 그치고
가을이 나그네처럼 지나간다.
나도 한때는 시냇물처럼 바빴으나
누구에게서 문자도 한 통 없는 날
조금은 세상에게 삐친 나를 데리고
동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준다.
양파 접시 옆에 묵은 춘장을 앉혀 놓고
저나 나나 이만한 게 어디냐고
무덤덤하게 마주 앉는다.
사랑하는 것들은 멀리 있고
밥보다는 짜장면이 끌리는 날
그래도 나에게는 내가 있어
동네 중국집 데리고 가
짜장면을 시켜 준다.
※ 그 자장면집 / 최영철
동해 바다 보리밭 따라 달리며
이쯤에서 자장면 먹고 싶다고
손으로 두드린 옛날 자장면 집 하나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를 생각하다가
그 생각 막 접으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그런 자장면집 하나 불쑥 나타났다
날 선 보리밭 동해 바다가 빚은 자장면
고춧가루 식초 단무지 맛으로 매콤새콤 요동치는
파도가 때기장친 면발이
줄줄이 끝도 없이 올라온다
보리밭 옆 바람이 한번 때기장치고 햇살이 버무린
여기까지 오는 길에 수월찮게 내가 때기장친
면발이 줄줄이 휘늘어진다
파도에 곤두박질치며 세월에 때기장치며
쫄깃쫄깃해진 바닷가 자장면집
너 아니? 그게 내 힘줄인 줄
*때기장치다: '땅 바닥에 내동댕이치다'의 경상도 사투리
'詩心에젖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접시꽃에 관한 시 모음 (2) | 2024.07.21 |
---|---|
능소화에 관한 시 모음 (0) | 2024.07.21 |
비와 우산에 관한 시 모음 (0) | 2024.07.17 |
장마철이면 난 행복하다-신형식 詩 (0) | 2024.07.17 |
장마에 관한 시 2 (0) | 2024.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