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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後記

백두산 서파,북파 후기

 

 

백두산

2011년 9월 16일~19일

 

 

*◈* (심양,집안-- 백두산 서파,북파종주

後記) *◈*

한민족의 발상지,민족혼의 진원지,개국신화가 깃든산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의 명산,백두산
천지를 둘러쌓고 있는 산봉우리가 백색의 浮石(부석)이
얹혀있어서 흰머리와 같아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산
이처럼 한민족인 우리에게 있어서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으로 받들고 있는데 정작 백두산의 3/1은 중국의 땅이되어
있고 나머지 3/2는 북한에 있는 남북의 분단 상황으로 인해
먼길 배타고 돌고돌아 중국이 10대 명산으로 지정하여 
장백산이라고 하는 백두산을 중국을 통해서 오를 수 밖에 없는 
분단 민족의 서글픈 현실의 비애감을 느낀다.
아주 먼 옛날 우리민족이 텐산산맥과 알타이산맥과 바이칼 바다와 몽골초원,
만주벌판을 지나  한반도로 이동한 경로를 떠올리며 텐산산맥의 
천지와 백두산 천지의 닮은 모습을 실루엣으로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백두산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대에 자리 잡은 휴화산으로 서북쪽은 중국 길림성,
남북쪽은 북한의 양강도에 속하며, 산 전체의 총 면적은 8000㎢이다.
백두산 정상의 천지는 수차례 화산 폭발과 함락에 의해 이뤄진 칼데라호이며,
수면의 해발 고도는 2189m로 전 세계 화산호수 중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천지의 동서 길이는 3.51㎞, 남북 길이는 4.5㎞,
평균 수심은 200m이며 가장 깊은 곳은 384m이다. 
천지의 물은 북쪽 승사하를 따라 일년 내내 장백 폭포로 흘러내린다.
한국 사람들에게 백두산은 친근하고도 묘한 느낌을 준다. 
한국의 여느 산처럼 쉽게 갈 수 없는 산이지만
일생에 한 번쯤은 꼭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은 어쩔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시원이 되는 성스러운 곳,

 

한반도의 허리를 잇는 백두대간이 시작되는 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두산은 한반도 영토에 있음에도 오로지 중국 땅을 거쳐야만 밟을 수 있다.

그래서, 가까이 두고도 쉬이 찾아갈 수 없는 그리움의 산이기도 하다.

게다가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날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백두산은 왠지 베일에 싸여 신비로운 느낌마저 든다.

 

 

 

 

여행 첫 날,

 

심양에서 고궁을 둘러보고 교포가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가니

제법 먹을만한 요리들이 회전판에 올려져 있어서 김치 없이도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금화식당에서 맛난 식사 후 집안으로 이동 후 석식.(5.5시간)

모든것이 우리나라와 많은 차이가 난다.

그래서 "차이나(CHINA)"라고...ㅎ

 

 

 

 

 

 

여행 이틀 째,

 

광개토대왕비,대왕릉,장수왕릉,국내성벽,5호분,5호묘,,

압록강-북한 만포마을원경)- 송강하로 이동 (5시간)

 

압록강 유람선 위에서  바라본 북한의 신의주 모습과
중국의 단동시의 모습이 보인다.

불과 몇년 사이에 단동의 신 시가지가 서울의 강남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의 발전을 하고 있는 반면에
선전용 어린이 놀이터나 세워놓고 있는 우리네 60년대
모습을 하고 있는 북한을 보면서 신의주의 북한 주민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과 이념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독재자와 그를 추종하는 소수의 똘마니들로 인해 국민이 얼마만큼 고통을
당할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치 떨리게 실감했다고 할까.

 

길림성 남부에 위치한 통화시는 백두산, 국내성, 졸본성과 연결된 교통의 요충지로

인구는 36만 명이 살고 있는데 조선족은 2만 명이 살고 있다.
고구려 유적 중에서 처음으로 관마산성을 보았다.

관마산성이란 말을 막는 산성이란 뜻으로 차단성의 역할을 하였다.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북, 동,남쪽에 각각 성벽을 쌓아 만든 삼태기 모양의 산성이다.

고구려 북도위의 가장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다.
압록강의 발원지인 통구하에는 고구려시대의 채석장이 있다.
돌무지무덤을 축조할 때 여기서 채석하여 가지고 갔다.
겨울철에 얼음 위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통구하에서 국내성까지는 20km이다.
국내성 지역도 우리나라의 산하와 비슷하고 날씨도 후덥지근하다.

압록강 바로 건너편은 북한의 만포시로 무산시와 마찬가지로 산에는 나무가 없다.

 

 

 

박물관을 보고 평지의 국내성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 환도산성으로 발길을 옮겼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면 왕들이 이곳으로 와서 지휘했을 것이다.
둘레가 6898m로 남쪽 방면에 성벽을 쌓았다.

동, 북, 서쪽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포곡식산성이다.

산성 위로는 말이 달릴 수 있게 길을 내었다.
환도산성 주변에는 칠성산 무덤군과 산성하 무덤군이 있다.

왕릉도 있고, 귀족무덤도 있다. 돌무지무덤은 왕릉이고 봉토무덤은 귀족무덤이다.  

대개 벽화는 봉토무덤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산성 위주의 방어체제를 구축했던 철옹성의 나라였다.

약 170여개의 산성을 쌓았다.

 신 성, 요동성, 안시성, 비사성 등이 제1 방어선이었다.

오골성, 책성 등이 제2방어선이었다.

그리고 평양성을 방어하는 산성들이 구축되어
있었다. 물론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방어하는 산성들도 구축되었다.
산성을 쌓는 방법이나 산성에 성문을 만드는 방법이 중국과 다르다.
이런 점들이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허구성을 밝혀준다.
국내성을 축조한 기법은 안에는 토성, 밖에는 석성으로 쌓은 이중구조의 평지성이다.

 

동쪽과 북쪽에는 성벽을 쌓고 서쪽은 통구하,

남쪽은 압록강의 지형적인 조건을 이용한 천연의 요새이다.  

그러므로 유리왕부터 광개토왕까지 4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장군총과 광개토왕릉비와 광개토왕릉을 보기 위하여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산하 무덤군에는 4,000여개의 크고 작은 무덤이 있다.

먼저 용산 아래에 있는 장수왕릉인 장군총을 보았다.

이 무덤은 최근까지 광개토왕릉으로 알려졌었다.

그 이유는 첫째,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평양에 있을 것이다.

둘째 ,비록 1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앞쪽에 광개토왕릉비가 있기 때문이다


장수왕릉 : 고구려의 돌무지무덤 양식에서 가장 발달한 형태인 방단계단식적석묘이다.

 

7층 계단으로 되어 있고, 1,100개의 석조물을 다듬어 축조하였다.

너비 31.58m, 높이 12.4m이며 1면에 3개의 받침돌이 있는데 북쪽 면의 1개가 없어졌다.

북쪽으로 후궁의 묘로 추정하는 딸린 무덤이 5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1개만 남아 있다.

묘실은 너비 5.5m, 높이 5.5m로 안에 관을 놓았던 틀이 2개 있으며, 묘실의 입구는 서남쪽 방향이다.꼭대기는 절두방추형으로 되어 있고 향단이 있었다.

 

 


광개토왕릉비 : 높이 6.39m, 무게 37t, 글자수 1,775자인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비석이며

대리석을 다듬은 중국식 비석과 구별된다.
청의 회인현지사 장월의 서계인 관월산에 의해 1877년 재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이끼가 끼어 있었기 때문에소똥과 말똥을 태워 이끼를 제거하였다.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일부 글자가 
훼손되었다.초천부란 농부가 처음 탁본(원석탁본)을 하였다.
그 후 회를 바르고 탁본(석회탁본)을 하였다. 탁본 과정에서 일부 글자가 다시 훼손되었다.
 1886년 일본인이 탁본을 입수하였다.
그 후 일본군부가 조직적으로 비석 연구에 개입하였다.
 1904년 프랑스의 싸만박사가 비석을 답사하였다.
 1975년 중국정부가 정밀하게 탁본을 하였다.
 비각의 글씨체를 보면 두 사람의 솜씨임을 알 수 있다. 
1927년 집안현지사의 주도하에 2층의 목조 구조의 비각을 세웠다.
1983년 현재의 비각을 세웠다.
비각에 쓰여진 호태왕비란 글씨는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하내선생의 친필서체이다.

광개토왕릉 : 7층의 방단계단식적석묘로 추정하지만 현재는 5층 계단으로 되어 있다.
 철구조물을 설치해놓아 봉분까지 올라갈 수 있다.
 너무 많이 파괴되어 석조물 안에 있던 작은 돌들이 밖으로 튀어나와 마치 돌무지무덤을 연상하게 한다.
 한 면의 받침돌은 5개였는데 지금은 13개만 남아 있다.
 한 변의 길이가 66m, 높이가 14.8m이다. 
묘실의 입구는 서쪽 방향으로 되어 있으며, 너비가 
2.8m, 높이가 1.5m로 장수왕릉보다 작다.
 꼭대기는 절두방추형으로 향단이 있었다.

 

 

 

광개토태왕비...과거에는 외부에 노출된 채, 풍화작용에 의해 많이 훼손됐는데 지금은 집을 지워놓았다. 그리고 ,안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하는 관계로 밖에서 유리창 안에 있는 비를 사진으로 남길 수 밖에 없었다.

 

국내 역사학자들의 왕래가 잦아지고 동북삼성의 고구려 역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자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그동안 방치해 두었던 집안 국내성 광개토태왕릉 주변의 민가를 이주시키고 광개토태왕 유적지를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중국내 문화유산 등급중 최고가 중국에서는 A 다섯개인데 A 4개를 부여한 유적지라는 표지석이 눈에 띈다.

주민들이 광개토태왕 릉의 돌을 빼다 집을 짓기위해 사용해서 릉이 형편없이 훼손된 초라한 릉의 모습이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남아있기 망정이다. 광개토태왕릉 답사를 마치고 장수왕릉으로 이동중에 압록강 건너편 북한의 자강도 동 제련소의 모습도 담아 보았다. 총알 탄피,포탄 탄피의 재료가 동이다보니 북한에서는 이 자강도 동 제련소가 국가 기관산업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공장이라 한다. 석조 건축의 진수,아시아의 피라미드라는 장군총의 모습과 만이천기가 넘는 고분중대표적인 고인돌의 모습을 담아보았다.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 답사를 마치고 단동으로 이동 압록강 유람선을 타고 북한 신의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이번 여행에 생일을 맞이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것을 어찌알고 송강하 시내 네온싸인옆에

리본모양의 화려한 조명까지 선사 해 주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간단한 식사 후, 양꼬치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조그마한 빵 하나를 구해

붉은 양초를 꽂아놓고 생일 축하파티를 해 주었다.

이국만리까지 가서 생일상을 받은 친구의 마음은 평생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겠지...^^

한 잔은 우정을 위하여~또 한잔은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위하여~~~그리고,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39도짜리 중국술을 몇 병이나 마셨는지 밥은 바빠서 못 먹고 술은 술술술~~~

그리고,노래방으로 가서 현금 10만원으로 맥주 열병과 과일안주 한 접시로 쇼부를 본다.

그러나,노래를 불러보려고 하니 리모콘도 없고 노래책도 없다.

그냥 자그마한 모니터 하나로 노래찾기를 해 보는데

2PM,2AM,소녀시대,티아라,오렌지캬라멜,,,

우리들이 즐겨부르는 이승철이나 박상민은 찾아보지도 못하고

아무 음악 틀어놓고 춤만 추다가 나왔다.

아직 중국은 써비스 정신이 형편없다는 걸 알았다.

이런 우라질레이션....ㅠ

그래도 백두산을 보기위해 숙소에서 잠깐 기도를 하고 잠을 청했다.

 

 

 

여행 3일째,

 

백두산 천지를 가다(서파-북파--장백폭포-이도백하역)

 

 
 

 

천지창조의 신비함을 간직한 천상의 호수 천지 거대한 화산 폭발로 정상 부분에 둘레 14.4Km 평균너비 1.975Km 최대너비 3.550Km 평균수심 213.3m 최대 깊이 384m 깔데기 모양의 요자형의 분화구를 만들어 놓았는데, 보통 직경이 2Km 이상의 큰 규모의 분화구 지형을 일컫어 칼데라라고 하는

 

 

이는 솥을 의미하는 포르투칼어 칼데이라에서 유래한 말로써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고지대에 가장 큰 규모의 칼데라 분화구가 
천지 호수라니 백두산과 천지는 우리민족의 영산으로 손색이 없는
한민족의 자랑이요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기에 충분한 산이라 말할 수 있겠다. 
백두산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의 참호속에서 신을 부정할 자 없고
자연의 경의로움 앞에 겸손해지지 않을자 누구겠는가?
나는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 올라 다시 한번 내 자신이
한없이 왜소해지는 겸손을 배울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장백폭포...
우리말로는 비룡폭포, 년중 1500mm 강우량 비가 많은 다우지역으로써 한해 강수량의 대부분이 7~8월에 집중되며 년중 180일이 비가 온다고 하며, 안개가 많고 일조량의 부족으로 증발량이 낮기 때문에 천지 수면이 항상 일정한데 철이 철인지라 많은 비로 인해 천지의 달문을 통해 쏟아지는 장엄한 폭포수의 위용은 멀리서 보는대도 장관 그 자체였다.
 백두산은 역시 휴화산이 아닌 활화산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이드에 말에 의하면 몆 년전에 
땅속에서 수백마리의 뱀이 일거에 나오는 소동이 벌어졌는데
화산 폭발의 징후가 아닌가 해서 소동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백두산이 화산 폭발하면 마치 팝콘을 튀기듯 부피가 팽창하고 
엄청난 규모의 화산재가 뒤덮을 것이다.
윤성효(부산대 지구과학교육과) 교수는 1천도 C가 넘는 규장질 마그마가 
천지 칼데라 안에 있는 20억톤 이상의 차가운 물과 만나면 순간 급냉하여 
산산 조각이 나면서 마치 팝콘을 튀기듯 부피가 팽창되고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부석으로 변화게되어 
칼데라 외륜산을 부수거나 달문계곡을 통해 장백폭포 쪽으로 
흘러 넘칠 수 있으며 그 결과 송화강 상류지역에
대 홍수가 발생하고 암석과 화산제 때문에 주변 지역이 묻힐 수 있다고 
언론매체를 통해 경고하는 등 ,백두산 화산폭발이 사회적 이슈가 되자
남북관계가 급냉한 MB 정권에서조차 남북의 학자들이
백두산 화산 폭발에 대한 공동 연구를 위해 만나게되는 등
한때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것을 상기하면서,장백폭포수에 발을 담그며  상상을 해 본다.
지금 화산이 폭발한다면, 여기서 내가 화산재에 묻혀 죽는다면 
이후 벌어질 여러가지 상황을 추리해 보는 조금은 우스꽝스런 
어린아이 같은 상상을 하면서 알듯 모를듯 야릇한 웃음을 지어보았다.

분화 가능성 징후

 

2014년이나 2015년 쯤에 백두산의 화산이 분화할 것이라는 많은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실제로 백두산의 화산이 분화할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천지의 지하 2~5㎞ 하부에 화산지진이 증가하고 있는데, 2003년 이후 활발한 지진현상과 함께 천지 주변의 외륜산 일부 암벽에서 균열과 붕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지 주변 온천수의 수온이 최대 83도까지 높아졌고

화산활동 직전에 나타나는 헬륨과 수소 등 가스성분이 증가했으며,

백두산 천지 칼데라

주변의 암석 틈새를 따라 화산가스가 분출해 주변 일부 초목이 고사되기도 했다. 천지의 10~12km 지하에

규장질

(알칼리유문암-조면암)마그마 방 존재가 확인되었는데, 규장질 마그마는 엄청난 양의 용존 고압가스를 붙잡아 둘 수 있다.

 

이 마그마가 지표로 상승하여 임계조건을 넘으면,

일시에 고압의 화산가스가 팽창해 강렬한 화산재와 부석의 대폭발을 수반하여 분화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천지 지하에서 발생하는 잦은 화산성 지진으로 천지에 담긴 20억t의 물이 지하 암반 틈새를 따라 지하 마그마와 만나는 경우 더 큰 화산폭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다만, 폭발의 규모는 10세기의 대폭발보다는 훨씬 적은 아이슬란드에이야피아들라예퀴들에서 발생한 화산 폭발 수준이 될 것이다.

 

 

백두산 대폭발 정도 규모의 폭발은 지구 전체 규모에서도

수천년에 한 번쯤 일어나는 매우 드문 현상이기 때문이다. 가령 규모 7.5이상의 강진과 함께 천지에서 지진해일이 일어나면서 백두산 천지의 물이 두만강, 압록강, 쑹화강 유역인 북한의 양강도와함경북도, 그리고 중국의 지린성으로 흘러가 대규모 홍수 피해가 예상된다. 백두산의 화산폭발로 분출되는 엄청난 양의 화산재는 북한은 물론 대한민국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마지막 폭발 시기는 약 1000년 전으로

한국의 역사서에도 10세기경 폭발하였다는 문서가 존재한다.

이 당시 폭발했던 규모로 본다면

화산재가 한반도 전체를 1미터 두께로 덮을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한다.

아고고 무섭다.^^

 그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하면서 장백폭포를 내려왔다.

 

 

장백폭포를 내려올 때,길거리에 장뇌삼을 판매하는 장삿꾼들이 여럿이 있었다.
한국의 등산용품 품질의 우수성을 익히 알고 있는지 유명메이커만 보면 
장뇌삼 몇 뿌리와 바꾸자고 꼬신다.
남자애들은 끼고있던 장갑을 벗어주고 ,새끼 손가락만한 장뇌삼 6~7 뿌리를 받아들었다.
가짜 삼인지 알면서도 중국 여행의 묘미라나 뭐래나...ㅋ

 

 

 

여행 4일째,
밤새 13시간45분을 달려 심양에 도착하니,손목시계는 아침 8시45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장시간동안 4인1실의 좁은 공간,영하의 날씨에 난방도 되지않는 기차안에서 단잠은 못이루었지만,
소록소록 우정은 피어오르고,  한잔 술에 피로를 풀어본다.
오전 09시에 서탑가로 가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부추잡채,생선찌게,김치,오이무침,,,
한국에서 먹던 상차림이 그대로 나와서 친구들은 밥을 두 공기씩이나 비웠다^^
그리고,노란 셔털버스를 타고 북릉공원으로 고고씽~~

월요일 아침의 출근하는 중화인들의 여러가지 모습이 앵글에 잡혔다.
도로교통법이 있는지 없는지 마구잡이로 버스나 자동차 머리만 들이밀면 먼저 가는 것이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교통사고를 수없이 목격했다.
양보라고는 개미 맹장만큼도 없는 중국사람들이다.
심양은 이도백하와는 완전히 다른 기후라,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강한 자외선이 내리쬐어 
여친들은 공원입구에 노점상에게 원형꽃모자를 하나씩 구입했다.
컬러별로 쓰고,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열심히 찍고 ,찍히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가슴까지 담았다.
마지막날이라 더욱 바빠진 마음들이 모여 한인거리까지 가서 명품,진품만 판매한다는 
한인백화점에 쇼핑도 하고 맘에 드는 빅백도 하나 구입하고, 기쁜 마음으로 심양공항으로 이동..
심양공항에서 기념품 몇 개씩 구입하고 
오후 6시45분(한국시간)  비행기로 인천국제공항으로 날아왔다.
4일동안 이동하는 버스안에서도 먹고, 호텔에서도 먹고, 또 먹고 ,,
이번 중국여행은 음식이 입에 맞아서인지 다들 토실토실 살이 붙어서 온 것 같다.^^*
 이번 백두산 종주와 유적지 탐방을 통해서 나름대로 느낀점은
힘의 논리에서 중국을 상대해서 동북삼성을 우리 땅이라 한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까?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동북삼성에 대한 역사 인식과  이론적 무장과 먼저 통일에 힘쓰고,

 

통일 후 힘을 기른다음 우리의 영토를 찿을 수 있도록 하는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하고 생각을 해 본다.

 어느 연인의 설레임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백두산 천지를 오를 수 있었음에, 추진해 준 친구에게 고맙고,

함께 여행을 한 산벗들에게도 행복한 마음 전한다. 

아직 德을 못 쌓은 친구들은 백두산 화산이 폭팔하기전에 얼른 다녀오심이 어떨까? ㅋ

바야흐로 때는 10월초순...

여행하기 좋은 계절에 더 많이 보고, 느끼고,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했으면 좋겠다.

 

이상,뒤늦은 백두산 후기였습니다.

2011년 11월 3일 꽃구름 신윤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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