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에 관한 詩모음
초여름의 노래 /문태준
오늘은 만물이 초여름 속에 있다
초여름의 미풍이 지나간다
햇살은 초여름을 나눠준다
나는 셔츠 차림으로 미풍을 따라간다
미풍은 수양버들에게 가서 그녀를 웃게 한다
미풍은 풀밭의 염소에게 가서 그녀를 웃게 한다
살구나무 아래엔 노랗고 신 초여름이 몇 알 떨어져 있고
작은 연못은 고요한 수면처럼 눈을 감고 초여름을 음미한다
초여름은 변성기의 소년처럼 자란다
하늘은 나무의 그늘을 펼치고
하늘은 잠자리의 날개를 펼친다
잠자리는 산 쪽으로 날아간다
나는 잠자리의 리듬을 또 따라간다
초여름 속에서 너의 이름을 부르니
너는 메아리가 되어
점점 깊어지는 내 골짜기에 산다
초여름을 찾아 /김덕성
초여름 길을
망설이다 나선다
시를 찾아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벌써 살갗이
붉게 탄다
들녘에는
예쁜 꽃보다는
다소곳이 등 뒤에 숨은 잎새
순박함으로 다가와
나는 시를 담는다
초록 바구니에
초여름
한결 시원하게
내 가슴에 다가오겠지
초록빛으로...
초여름 하루 /조길순 趙吉順
청마로 앉은 나비 졸다가
깜작 놀라
동그라미 그려놓고 하늘로 날라가네
밭고랑 일구는 아비 얼굴 붉으시고
초록 자식 자라는 모습
뚝에 앉자
담뱃불 당기시고 먼 산 바라보신다.
마구깐 송아지 반눈 뜨고 쉴 때
강아지 길게 누워 잘 때
초 여름
들녘 가득 어미의 젖가슴처럼
넉넉하게 익어간다
초여름 숲처럼 /문정희
나무와 나무 사이엔
푸른 하늘이 흐르고 있듯이
그대와 나 사이엔
무엇이 흐르고 있을까.
신전의 두 기둥처럼 마주보고 서서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면
쓸쓸히 회랑을 만들 수밖에 없다면
오늘 저 초여름 숲처럼
그대를 향해 나는
푸른 숨결을 내뿜을 수밖에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서
서로를 쑤실 가시도 없이
너무 멀어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 길을 만드는 일도 없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흐르는 푸른 하늘처럼
그대와 나 사이
저 초여름 숲처럼
푸른 강 하나 흐르게 하고
기대려 하지 말고, 추워하지 말고,
서로를 그윽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변방의 초여름 풍경 /(宵火)고은영
아치형 창틀 너머 6월은 행복하다
바람 따라 팔랑거리는 이파리들은
뜨겁도록 황홀한 연가로 물오른 청춘의 사랑을 쓰지만
그 누군가의 단말마가 전율로 스쳤는지도 모를
수족처럼 부리던 주인없는 안경이 두동강으로 허리가 잘린 채
공원 나무 밑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다
누구였을까 저 안경의 주인은
공원 벤치에 앉아 나는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등 굽은 행려자는 건너편 벤치에서 컵 라면을 먹는다
우리는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도
극명한 대립의 각도로 서로를 흘끔거리고 서로를 경계하고 있다
아무 거리낌없이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그와의 나의 거리는 얼마쯤일까
지금 나는 그에게서 공감하는 동질성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똥파리들이 날아다니고 행려자가 덥고 잤던 이불이며
후즐근한 옷 몇가지, 그리고 누군가
아무렇지도 않게 버렸을 빈 박스며 쓰레기들이
무질서하고 너저분하게 흩어진 도심의 공원에도
가난한 공간이 울렁이는 걸 나는 몰랐네
이 시대의 가난과 맛물린 아픔이거나 사회에 대한 이질감 내지는
선의 출구가 도태 되고 페쇄 돼 가는 시절 시절들
아, 슬픔은 언제나
안으로 감출 수밖에 없는 변형된 삶
그러므로 삶의 기우로 흐르는 것들은 모조리 죽어버려라
에고의 껍질을 벗어버릴 수 없는 미련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
도덕이 죽으니 예절은 자취가 없고
차가운 증오로 점철돼 가는 유역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한 비열한 세상만이 버티고 섰구나
그러므로 제3지대 사람들의 가슴에는
온기도 없이 차가운 살의만이 충일하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는 생의 문을 열고
잠시 머물던 유월은 시들어 가면서도 이제 울지 않으리
초여름 밤 /淸草배창호
어스름 땅거미 내리면
들녘에는 달빛만 찰랑대고
열 꽃핀 후줄근한 하루를 실바람으로 달랜다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의
일생에서 무한의 전율이 일어도
쉬 삭힐 수 없는 절규 또 한 흘러가는 것인데도
눈꺼풀이 한 짐인 별조차 갈지자 하품을 해댄다
통념으론 딱, 요 만치인데
누구에게는 애끓음이기에
짧은 밤 다하도록
목이 쉬도록 구슬피 울었는지 모른다
단 한 번 허락하는 은하수도 있건만
괜스레 동창이 밝으면
언제 그랬냔 듯이 시침 뚝, 땐
한길 속 사람 마음 그대로 쏙 빼닮았으니
어쩌랴 배울 걸 배워야지
보챈다고 될 일도 아닌 걸,
오직 네 탓이라고 개굴개굴!
초여름 일기 /이정원
(제 1회 가림토 문학상 대상 당선작)
한낮은 뭉근하다.
푸른 잎사귀들이 더위에 제 몸을 내어 주고 달아오르는 동안
아이와 팔베개하고 드러누워 클클 대며 만화책을 읽었다.
사그락 사그락 마르는 빨래, 바람이 휘저으며 노는 소리,
쓰레기통은 한참 부화중일 테지. 살충제를 들고 일어나는 순간 아이의 잠이 툭 떨어진다.
어느새 아이는 어미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듬지 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인가.
몸이 뿌리로 박혀 꽃으로 환생할 어디쯤 곤충의 애벌레같이 부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아이의 잠을 베게에 올린다.
아이는 놓쳐버린 꿈을 움켜쥐려 한번을 더 뒤척이고,
땅속의 모든 벌레들이 돌아눕는 소리, 땅의 껍질을 깨고 튀어 오른다.
쓰레기통은 닫혀있다.
마른 잎이 물을 끌어당길 동안 빨래집게에 꽂힌 햇빛 한줌 마악 잎사귀에 내려앉을 판이다.
주룩주룩 설거지물 하수구에 쏟아져 내린다.
아이의 덜 닫힌 잠의 창으로 한줄기 소낙비 시원스레 퍼 붓는다.
뭉근해진 한낮이 조리개 속으로 풀어진다. 풋여름이다.
초여름 이마 /벽란 김상훈
정오의 미열 속에 앓는 소리를 내며
봄이 곱다시 죽지 않는 까닭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오랜 꽃말들이
미처 다 벗어 놓지 못한 속옷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벗어도 전설이 되던 치마와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는 것들이
지상에서 난교를 벌이던 정사의 서(書),
초여름이라는 이마에 신열이 내릴만하다
이제 봄의 변방을 지킬 집요한 기억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버림받는 순교처럼
겨울까지 관통하는 하인의 언어로 남아
연둣빛 씨앗의 한 종교로 남을 것이다
사라지므로 거룩한 삶을 이룩한 봄아,
잠시 물기에 젖었던 생의 무게를 버리고
초여름 잔등에 6월이라는 바코드 찍어
콧등 시큰한 부활의 잎으로 다시 만나자
초여름 아침 /신광호
이른 여름 비오는 아침
서울 청계천은 소도시 길목 같이
무더위도 개울에 스며들고
길가 가로수들 싱싱함을 자랑한다
우리가 태어난 광교
내 사랑 바라보듯
이제 시작이다
초여름 아침이다
아직도 길에 나온 사람 눈에 띄지 않음은
이제 내가 제일 먼저 미뉴에트 3박자 느린 춤으로
바람결 속삭이며 지나가는 빗속을 거쳐 꾸밈없이
어린아이 사랑을 배우는 말
초여름 /유안진
지난 봄엔
꽃으로 문지른 가슴팍을
잎으로 짓이겨댄다
사랑하여 죽고 싶은
붉은 마음 바꾸어
초록 불티 튕기면서
살고 싶어라
뜸부기 우는 나루터에도
뻐꾸기 자지러드는 골짜기에도
쓰린 이야기는
보태지고 더해져서
사랑보다 아픈 삶을
진정 살고 싶어져
초록빛 숨결은 가빠가빠 오른다.
긴 여름 밤 /은석 김영제
초여름의 태양은
좀 더 뛰 놀고 싶어한다
몸은 지쳐도
마음은 하루종일
뛰고 뛰어도
전혀 지치지를 않는다
초여름의 하루는
속임수에 물들은 하루
원하지 않는
썸머타임제에
한 시간 일찍
일어나야 하는 고충
초여름의 낮 길이
실컷 잔 것 같은데도
태양은 아직
중천에 떠 있고
가는 청춘이
아까울 정도로 긴 계절
첫여름 /이세기
1
쪽사리인데 대낮에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갯고랑이 보이는 끄트머리
서너 채 함석 집
할매들이 바지락을 캐어다
물배가 오면 내어다 팔기도 하고
돌톳을 햇볕에 말렸다가
팔기도 하는
늙수그레한 몸에는 갯내가 났다
2
함석집에는
목침이 있고
이불을 올려놓은 선반이 있고
장판이
누렇게 눌은
아랫목은
시꺼멓게 먹밤처럼 늙었다
밤이 오면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손전등 불빛들이 갯바위 틈새에서 새어나왔다
3
유성이 떨어지는
깊은 밤에는
해안가 샘골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어두운 방으로 들어오고
골짜기에서는
치성을 드리는지
주문이 들려왔다
그러다가 다시 저녁밥 때가 오면
기력은 곡식에서 생긴다며
고봉밥이 최고다
삼시세끼 제때 먹는 것이 몸에 화를 내리는 것이라며
밥을 권하기도 하고
밤이면 밤마다
치성을 마친 인기척이
골짜기에서 걸어 나왔다
세상을 견디는 목소리가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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