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과 눈에 관한 시모음 ]
※ 겨울의 노래 / 복효근
멀리서 보면
꽃이지만
포근한
꽃송이지만
손이 닿으면
차가운 눈물이다
더러는 멀리서 지켜만 볼
꽃도 있어
금단의 향기로 피어나는 그대
삼인칭의
눈꽃
그대
※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 편지 / 윤동주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 눈사람 / 나태주
밤을 새워 누군가 기다리셨군요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그만
새하얀 사람이 되고 말았군요
안쓰러운 마음으로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을 땐
당신에겐 손도 없고
팔도 없었습니다
※ [초등교과서 음악]
겨울 나무 / 이원수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평생을 살아 봐도 늘 한 자리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
꽃 피던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 이생진
시 읽는 건 아주 좋아
짧아서 좋아
그 즉시 맛이 나서 좋아
나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
하고 동정할 수 있어서 좋아
허망해도 좋고
쓸쓸하고 외롭고
춥고 배고파도
그 사람도 배고플 거라는 생각이 나서 좋아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누가 찾아 올 것 같아서 좋아
시는 가난해서 좋아
시 쓰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서 좋아
그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시 속에 그 사람이 남아 있어서 좋아
시는 짧아서 좋아
배고파도 읽고 싶어서 좋아
시 속에서 만나자는 약속
시는 외로운 사람과의 약속 같아서 좋아
시를 읽어도 슬프고 외롭고
시를 읽어도 춥고 배고프고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슬픔도 외로움도 다 숨어 버려서 좋아
눈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눈에 파묻힌 집에서 사는 것 같아서 좋아
시는 세월처럼 짧아서 좋아
※ 눈 위에 쓴 시 / 류 시화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 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 몇 번의 겨울 / 천양희
하늘 추워지고 꽃 다 지니
온갖 목숨이 아까운 계절입니다
어떤 계절이 좋으냐고 그대가 물으시면
다음 계절이라고 답하지는 않겠습니다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봄이라고
아주 평범한 말로
마음을 움직이겠습니다
실패의 경험이라는 보석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내가 간절한 것에
끝은 없을 것입니다
※ 어느 절간 / 이생진
소나무가 바람을 막았다
부처님이 흐뭇해하신다
눈 내리는 겨울 밤
스님 방은 따뜻한데
부처님 방은 썰렁하다
그래도
부처님은 웃으신다
※ 겨울사랑 / 문정희
눈송이 처럼 너에게 가고싶다
머뭇 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싶다 .
※ 겨울은 부동자세로 선다
/ 다서 신형식
겨울은 부동(不動)자세입니다.
밤새워 여위어가는 가지위로
안기고 또 안겨 봐도
굴복하지 않는 고독함입니다.
그리워도 결코 핑계대지 않는
고집스런 기다림입니다.
사랑할 줄 아는 것들은
모두 떠나가고
가장 낮은 곳으로
그들의 고백만이
하얗게 모여 앉는 겨울엔,
끝내 주지 못한 사랑도
얼어붙은 겨울기도도
길가의 이정표처럼
부동자세로 섭니다.
가슴 깊숙이 숨겼던 것들
모두 녹아흐를 때까지
참아야 할 것들은 참아야 한다고
입 다물고 선 겨울은,
거친 휘파람 물고
뜨겁게 뜨겁게
부동(不凍)자세로 서 있습니다.
결코 얼어붙지 않겠노라고
※ 겨울 오후 / 이승훈
겨울 오후 대전 버스 터미널 가방 들고 지나갈 때
미친 여자가 "배가 고파 그래요.
천원만 줘요." 손을 내밀며 말하네.
난 코트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 주며 말했지.
"천 원짜리가 없어요"
물론 주머니엔 천 원짜리 지폐가 있었겠지.
내가 이런 인간이다.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 겨울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 동요] 구두 발자국 / 김영일
하얀 눈위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누가 누가 새벽길 떠나갔나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 발자국 소복소복
도련님 따라서 새벽길 갔나
길손 드문 산길에 구두 발자국
겨울해 다가도록 혼자 남았네
※ 우리의 겨울 / 서윤덕
팔장을 끼듯
그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따뜻함을 충전받습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한 주머니속에 두 손
겨울이라서 더 좋습니다.
※ 겨울나무 / 장석주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빈 벌판
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속에
말없이 서있는
흠 없는 혼 하나
당분간 페업합니다
이 들끊는 영혼을
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
마음도 떼어 버리고
문패도 내렸습니다
그림자
하나
길게 끄을고
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
※ 겨울 초대장 / 신달자
당신을 초대한다
오늘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이런 겨울 아침에 나는 물을 끓인다
당신을 위해서
어둠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내 힘이 비록 약하여 거듭 절망했지만
언젠가 어둠은 거두어지게 된다
밝고 빛나는 음악이 있는 곳에
당신을 초대한다
가장 안락(安樂)한 의자와 따뜻한 차와
그리고 음악과 내가 있다
바로 당신은 다시 나이기를 바라며
어둠을 이기고 나온 나를 맨살로 품으리라
지금은 아침
눈이 내릴 것 같은 이 겨울 아침에
나는 초인종 소리를 듣는다
눈이 내린다
눈송이는 큰 벚꽃 잎처럼 춤추며 내린다
내 뜰안에 가득히
당신과 나 사이에 가득히
온누리에 가득히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리고 새롭게 창을 연다
함박눈이 내리는 식탁 위에
뜨거운 차를 분배하고
당신이 누른 초인종 소리에 나는 답한다
어서 오세요
이 겨울의 잔치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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