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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心에젖어

여름에 관한 시 모음

+ 수국 / 이문재

여름날은 혁혁하였다.

오래된 마음자리 마르자
꽃이 벙근다
꽃 속의 꽃들
꽃들 속의 꽃이 피어나자
꽃송이가 열린다
나무 전체 부풀어 오른다

마음자리에서 마음들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열엿새 달빛으로
저마다 길을 밝히며
마음들이 떠난다
떠난 자리에서
뿌리들이 정돈하고 있다.

꽃은 빛의 그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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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 / 안수동

줄창 울고는 싶었지만 참고
참은 눈물이 한번 울기 시작하니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는 거지
누군가의 기막힌 슬픔은
몇 날 몇 밤을 줄기차게 내리고
불어 터진 그리움이 제살 삭이는 슬픔에
이별한 사람들은 잠수교가 된다
해마다 7월이면
막혀 있던 둑들이 젖어
매일 하나씩 터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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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 김광규

달리고 싶다 
가시덤불 우거진 가파른 산비탈 
기관총에 맞은 게릴라처럼 
피를 뿜으며 
구르고 싶다 
풀에 맺힌 이슬로 혀끝 적시고 
새가 되어 계곡 깊숙이 
날아 내리고 싶다 

넘어지고 싶다 
몰려오는 파도에 채여 
깎이지 않는 바닷가 
한낮의 햇볕 아래 무릎 꿇고 
마지막 땀방울까지 
흘리고 싶다 
바다 밑 깊은 골짜기에 
그림자 드리우고 
알몸으로 돌처럼 
가라앉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끈끈한 어둠의 숨결 
무더운 수액 출렁이는 숲 속으로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싶다 
쓰러져 
잦아들어 
땅 속을 흐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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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 최영희

여름은 아직도 
지치도록 푸르른데 

젊은 날은 
저만치 
바람따라 서성이고 

해는 
서둘러 넘었는가 
서녘이 붉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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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밤 / 김춘수

발가락이 가렵다
(무좀일까? 또)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밤이 온다 먼 데서
작디작은 바다가 하나 이리로 다가온다
어딘가
소리 내지 않는 악기가 숨어 있다
숲은 왜 서서 잠을 잘까
새는 어디 가고
바람이 제 혼자 눈을 뜬다
벌써 아침인가 하고
가랑이 사이로 누가 보이지 않는
세상의 뒤쪽을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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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 김귀녀

수많은 별들을 헤아리다 
숫자를 잃어버린 밤 

밤을 밝히는 박꽃아래 
태초에 나를 이 땅에 보내주신 분 생각한다 

별을 헤아리다 
세는 법을 잃어버리네 

나는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별들의 숫자도 헤아리시는 당신 

이름도 지어 주시고 
또 그 이름도 불러 주신다고 하시니 

풀벌레 하늘 보고 울어대는 
이 여름밤 
우주를 향한 그분의 크신 뜻 
사랑하지 않을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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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밤 / 배귀선

창 크기만한 하늘을 우러른다 
더위에 지친 초록이 한숨을 쉬어내는 
늦은 밤 
황토구들을 베고 눅눅한 하루를 삼킨다 
열릴 듯 
열리지 않는 화두처럼 
땡볕의 시간은 벌건 등짝만 데우고 또 하루를 마감한다 
새벽 일터 
금세 잡힐 것 같은 성공은 
젊은 날을 담보로 내내 삶을 희롱했다 
우리는 더 이상 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캄캄한 밤 낡은 전구 하나에 의지했다 
살아내야 하는 뭉텅이의 시간들 
파열음을 내며 내 앞에 던져진다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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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비 / 박인걸

바람과 함께 비는 그치지 않는다. 
횡으로 내리는 비에 우산이 무색하다. 
빗물은 처음 와본 도시에 흔적을 남기고 
축축한 습기로 유령처럼 떠돈다. 
길손에 밟힌 빗물은 신음도 없이 
자기 길을 찾아 굵게 흐른다. 
귀에 익은 노래가 들린다. 
어릴 적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저음이다. 
툇마루에 앉아 낙숫물을 바라보며 
햇 강냉이 먹던 내가 보인다. 
사라지지 않는 빗소리는 
오래된 추억들을 몽땅 불러오고 
잔뼈가 굵은 마을로 마음은 뛰어간다. 
사람들은 색색의 우산을 들고 
질척거리는 빗물을 밟으며 걷는다. 
빗소리를 듣는 사람들마다 
나와 똑같은 추억에 빠져있을까? 
우산을 든 여인의 앞길을 
갑자기 불어 온 바람이 가로막는다. 
당황한 여인은 어쩔 줄 몰라 한다. 
바람줄기에 섞여 내리는 비는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란 것을 깨닫는다. 
감상에 빠졌던 자신을 후회한다. 
비는 더욱 세차게 프라다나스를 공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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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 손병흥

온대 지방의 사계절 중 하나인 
덩굴장미 줄지어 만발하는 풍경 

아침저녁 낮 시간대의 일교차가 심한 
여름에 막 들어선다는 처음시기인 초하 

따가운 햇살에 일사량 많고 온도 습도 높은 
고온다습해져서 끈적거리며 무더워지는 날씨 

나쁜 환경 뿌리치듯 상큼한 녹음으로 짙어져 간 
드리워진 그늘 시원한 냉수가 간절해지는 나날들 

여름문턱에서 신록마저 못내 짙푸른 초록빛이 된 
허공 맴돌던 산들바람에 텅 빈 마음 달래보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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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 김수영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소음도 번쩍인다
여름은 이래서 좋고 여름밤은
이래서 더욱 좋다

소음에 시달린 마당 한구석에
철 늦게 핀 여름 장미의 흰구름
소나기가 지나고 바람이 불듯
하더니 도 안 불고
소음은 더욱 번성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아끼는 날
소음이 더욱 번성하다 남은 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던 날
소음이 더욱 번성하기 전 날
우리는 언제나 소름의 2층

 땅의 2층이 하늘인 것처럼
이렇게 인정(人情)의 하늘이 가까워진
일이 없다 남을 불쌍히 생각함은
나를 불쌍히 생각함이라
나와 또 나의 아들까지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다 남은 날
땅에만 소음이 있는 줄만 알았더니
하늘에도 천둥이, 우리의 귀가
들을 수 없는 더 큰 천둥이 있는 줄
알았다 그것이 먼저 있는 줄 알았다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이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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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 강대실

진초록 푸른 잎 사이사이 
꺼멓게 익어 가는 복분자 밭머리 
느티나무 그늘 자락 깔고 앉아 
흰 구름에 눈길 준다 
그냥 지나는 길, 막무가내 
속가슴 질러대는 바람아! 
못 가진 것도 죄라면 큰 죄 지었나니 
진한 밤꽃 향기에 
두견이 애달픈 울음 토해대면 
이름 없는 골짜기 절로 피고 지는 
그늘골무꽃 그리움에나 살련다 
영영 낮 가고 기인 밤 오면 
달 넘어 오는 산마루 
등 굽은 노송 두엇 내다보이는 
생풀 풋풋한 언덕배기에 
가만, 가만히 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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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강가 / 장수남

작은 언덕을 내려오면 
강물이 흐르고 
강가에 마른 숲에는 
억새풀들이 꼿꼿이 서서 
하얀 웃음으로 바람을 
유혹한다. 

조금 멀리 바라보면 
팔뚝만 한 숭어무리들이 
강물 아래서 지상으로 
다이빙을 하고. 

청둥오리 한 쌍이 
갈대숲에서 
머리만 올렸다가 내렸다 
이 뜨거운 날씨에 
짝짓기 사랑을 하는지. 

온종일 같은 몸짓으로 
파란색 하늘 예쁜 부리 
천연의 몸짓으로 사랑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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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단풍 / 최남균

남한산성 
향락객은 벌봉 향해 오르고 
나무는 남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형형색색 
산악회 리본보다 화려한 
여름이 한창인 6월 
녹음으로 내달리는 
누 빗길 
절벽 산성의 성벽을 기댄 
노송의 눈시울이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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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방학 / 안도현

오이밭 지나 옥수수밭 사이 
두 노인네 사는 외갓집이 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 따라 짐 자전거 타고 온 날은 
끓는 물에 어김없이 닭을 삶던 집 
감꽃이 떨어지면 감꽃을 주어 먹던 집 
오늘은 마당가에 풀 뽑던 외할머니보다 먼저 
외할머니 눈물이 그렁그렁 마중 나옵니다 
아이구 내 새끼 오네 
남조선 천지에서 시 제일 잘 짓는 새끼 
그러나 얼마나 떨리는 일인지, 끝없이 쓸쓸한 줄을 
외손자가 쓴다는 시가 무엇 하나 적시지 못하는 
가엾은 냇물이라는 걸 모르시고 
내 솔담배 한 개비 외할머니 드리고 
외할머니 청자 한 개비 내가 받아 
불붙여 맞담배 피우는 것이 우리 첫인사입니다 
외할아버진 못둑 밑 논에 피사리하러 가시고 
닭 없는 닭장 옆에서 늙으신 외할머니 
어제는 재너머 고추밭 매러 갔더니 
소짝새가 소짝소짝 그렇게 울어대더라 
우리 안서방 일찍도 북망산 가서 
남겨둔 처자식 보고 싶어서 
저리 소짝새 되어 우는갑다 생각하니 
외할머니 맑던 하늘이 또 눈물입니다 
외할머니는 우리 어머니 낳아 시집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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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사랑 / 임영준

가뿐히 돌아서면 
지워지리라 생각했습니다 

밤새 술렁이던 파도와 
비릿한 바람처럼 
또 만날 수 있겠지 하고 
가벼이 넘겨버렸습니다 

하지만 파고드는 모래알처럼 
밤바다를 적시는 수많은 별처럼 
두고두고 헤집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룻밤의 열정이 일생을 다그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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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석별 / 오보영

다시 만날 
기다림 

그리어보며 

보고 싶을 
그리움 

새기어 넣고 

잠시 긴 작별을 한다 

안아주던 푸근함 
가슴에 품고 
함께 하던 사랑을 
남겨둔 채로 

아쉬운 맘 뒤로하고 

먼 길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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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일기 1 /이해인

 

사람들은 나이 들면 고운 마음 어진 마음
잃기 쉬운데 느티나무여!
당신은 나이 들어도 어찌 그리 푸른 기품
잃지 않고 넉넉하게 아름다운지
나는 너무 부러워서

당신 그늘 아래 오래오래 앉아서
당신의 향기를 맡고 싶습니다.

당신처럼 뿌리가 깊어 더 빛나는
시의 잎사귀를 달 수 있도록
나를 기다려 주십시오

당신처럼 뿌리 깊고 넓은
사랑을 나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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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일기 2 / 이해인

사계절 중에 여름이 제일 좋다는
젊은 벗이여!
나는 오늘 달고 맛있는
초록 수박 한 덩이 그대에게 보내며
시원한 여름을 가져봅니다

한창 진행 중이라는 그대의 첫사랑도
이 수박처럼 물기 많고 싱싱하고
어떤 시련 중에도 모나지 않은 둥근 힘으로
끝까지 아름다울 수 있기를
해 아래 웃으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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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일기 3 / 이해인

바다가 그리운 여름날은
오이를 썰고 얼음을 띄워
미역 냉국을 해 먹습니다

입안에 가득 고여오는
비릿한 바다 내음과
하얀 파도소리에

해녀가 되어 시의 전복을
따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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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편지 / 한영옥

그해 여름 유난히 짱짱한 날이 있었다
그날 좋은 햇빛 속에 들어서서
대책 없는 우리 사이 두들겨 말리려고
회암사에 올라 흘린 땀 식히고 있을 때
마당 한쪽, 약수 물 동그랗게 고인 곁에
동자승 한 분도 동그랗게 웃어주었다
동자승 고운 얼굴 반쪽씩 나눠갖고
이 길, 그 길로 우리는 내달았다
이 길이 그땐 그토록 먼 길이었다
어느덧 그때처럼 또 여름이다
그쪽이여, 
그 길엔 연일 비단길 ​꽃잎 날리는가
이쪽 이 길에도 잡풀 꽃 그럭저럭 하고
올여름 다행히 실하여 노을도 잘 흐르고
장단 맞추며 나도 이리 흥겨운 모양이니
기절한 우리 사이 가만히 내다 버리겠네
그토록 먼 길이었던 이 길로 오던 길에
흥건히 불어 빠졌던 발톱도 이젠 내다 버리겠네
그해 여름 그날, 가뭇없으라고 불어오는 밤바람
아득한 그쪽으로 그어진 능선 모조리 덮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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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풍경 / 이은경

하늘 네모조각, 하얀 나비 하늘하늘. 그림자 앞 건물에 투영되다. 찬란한 새소리, 여름 아침의 대부분은 햇빛의 절정시간, 햇빛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간에 저 뜨거움, 환호하는 저 뜨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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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한낮 / 박얼서

잘 여문 옥수숫대가 덩실댄다고 
제철 만난 듯 건들거리는 모습 
넌 사촌뻘인 수수깡대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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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 김 참

천둥 치는 날들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슬레이 
트 지붕에서 빗방울이 끝없이 떨어져 내렸다. 나무들은 
흠뻑 젖었고 비 맞은 비둘기들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 
갔다. 거실 피아노의 하얀 건반이 저절로 움직였다. 내 
귓속으로 음악이 흘러들어왔다. 생선 뼈다귀를 문 검 
은 고양이들은 지붕과 지붕을 뛰어다녔다. 시계탑에서 
열한 시의 검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에 젖은 청년 
이 공원을 향해 힘껏 뛰었다. 나는 방에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천둥 치는 날들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나무들이 흠뻑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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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름밤 / 김행숙

넓은 창으로 노을이 진다 
차츰 어둠이 그물처럼 내려와 
창 앞의 나무들을 가려도 
여름밤의 열기는 쉬 식지 않는다 
한낮의 지독한 폭염은 
저녁엔 지쳐서 그늘이 된다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 
바로 저 별들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보기도 하지만 
분꽃 때문일지도 몰라 
저녁나절 뒤란을 환히 물들이며 
어스름 곁에 서 있는 나를 향해 
조용조용 말을 건네 오는 꽃 

하늘에는 하나 둘 별이 눈을 뜨고 
분꽃도 잠 못 들어하는 
별똥별이 길게 쏟아지는 밤 
숲은 크게 일렁이고 있다 

===================
그 맘 때에는 / 문태준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
빈손이다
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
두 눈을 살며시 또 떠보았다
빈손이로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 보았다
무른 나는 금강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 맘 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 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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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가운 여름 / 김영철

바닷가에 다녀온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화장실에서 들리는 
처얼썩 착, 파도 소리 

소리도 징그럽지만 
침은 더 무섭습니다. 

간호사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면서 

많고 많은 살 중에 
왜 하필 엉덩이인지 

시커먼 도깨비에게 
따져 묻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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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자 / 강소천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갈매기 오라 손짓하는 바다로 가자.

푸른 물결 속에 첨벙 뛰어들어
물고기처럼 헤엄치다,

지치면 모래밭에 나와 앉아
쟁글쟁글 햇볕에 모래성을 쌓자.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한 바다로 가자.

한창 더위로 꼼짝 못 하는
여름 한철은 바다에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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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국을 보며 / 이해인

기도가 잘 안 되는
여름 오후
수국이 가득한 꽃밭에서
더위를 식히네

꽃잎마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잎새마다
물 흐르는 소리

각박한 세상에도
서로 가까이 손 내밀며
원을 이루어 하나 되는 꽃

혼자서 여름을 앓던
내 안에도 오늘은
푸르디푸른
한 다발의 희망이 피네

수국처럼 둥근 웃음
내 이웃들의 웃음이
꽃무더기로 쏟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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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날 기대 / 민경대

오늘은 큰 그림 속에 우리는 방울처럼 출렁거리며 
기다린 삶 속에 희망의 소리 듣고 
맑은 사람들의 서성거림 속에 
나도 방울 소리 들으며 
이것은 하나의 기대 속에 큰 소리 듣는다 

===================
+ 여름날 오후 / 강은교

어느 여름날 오후, 젖어 있으며 울퉁불퉁한 땅, 빵 한 개가 비에 젖고 있다. 
허리가 잘록한 개미 한 마리 빵을 살며시 쓰다듬어보더니 어디로 인가 급히 간다. 
울타리 하나가 고개를 수그리고 빵을 들여다본다. 

비에 빵의 살이 풀어진다. 팥고물이 피처럼 흐르기 시작한다, 안개 뒤에서 태양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허리가 잘록한 개미 몇 마리 빵을 자르기 시작한다, 

어디서 들려오는 너의 소리…… 

울타리가 빵 위에 엎드린다, 젖어 있으며 울퉁불퉁한 땅, 질척이는 고름 사이로, 들여다보는 돌 하나, 

네가 빵 위에 넘어진다, 우리 모두 빵 위에 넘어진다, 멀리서 태양의 비명소리, 기적이 들려온다, 여름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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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밤의 꿈 / 문재학


정겨운 초가지붕에 송이송이 피어나는 
하얀 박꽃이 눈부시던 여름밤 속으로 
전설처럼 떠오르는 순이 모습 
마음이 저리도록 살아나는 
순정의 풋사랑이 
붉게 붉게 영글어가던 그 시절 
그리움으로 방울방울 맺히네. 
언제나 달려가고 싶어라 
아! 그 옛날 여름밤 꿈이여 


메케한 모깃불 향기로 쏟아지는 별빛들 
고향풍경이 녹아있는 여름밤 속으로 
댕기머리 출렁이던 그 아가씨 
끝없이 속삭이며 거닐었던 
사랑의 꽃길들이 
지금도 가슴 적시어오는 그 시절 
젊은 날의 분홍빛 밀어들이 
행복의 파도로 밀려오네. 
아 ! 그 옛날 여름밤 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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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밤의 꿈 / 손병흥

오래도록 굽이굽이 끝이 없는 산자락 넘고 돌아서 
자연이 달콤한 세레나데 소리로 살아 숨 쉬고 있는 

절대 잊지 못할 꿈결 같은 추억들 고이 간직한 채 
몰아치는 무더위에 지친 심신 달래고파 떠난 여행길 

어느새 그저 꿈같은 시간 풀벌레소리처럼 여물어가는 
어김없이 가슴 가득 달맞이꽃 피어나는 달빛 어린 계절 

아직 정돈되지 못한 쓸리는 온갖 사연 이야기꽃 되어버린 
시원해진 바람에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마저 여유로운 밤공기 

마냥 흘러만 가는 시간이 너무나 아쉬운 두드러진 여름휴가철 
모처럼 맨얼굴 온몸 가득 여유로움 일깨워보는 깊어져간 긴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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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보내기 / 성백군

8월도 끝이라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시원섭섭합니다 

가뭄, 장마, 불볕더위에 
진이 다 빠지고 
폭풍에 상처까지……, 그때는 
여름이 미워죽겠었는데 

시간은 막히지 않아 
한 철 같이 살다 보니, 그 사이 
싸움은 무디어지고 미움도 그런대로 정이 들고 
겨우 마음 정리되는데 

벌써, 처서라고 
굳이 가겠다고 하시니 
바닷가 해수욕장엔 발자국만 스산하고 
계곡 너럭바위 위 널린 수영복들은 
주인 잃은 슬픔에 버림받은 설움까지 겹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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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속으로 / 윤수천

돌아가고 싶다
뜨거운 폭양 속으로
피라미떼 하얀 건반처럼 뛰어놀던
그 시냇물
악동들 물장구치던 그 여름 속으로

뜨거운 맨살의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
악동들 다시 불러 모아
온 산천을 발칵 뒤집어놓고 싶다
매미들도 불러다가
한바탕 축제를 열고 싶다

쇠꼬챙이처럼 내리 꽂히는 불볕화살
가마솥 같은 여름 한낮에
온몸 열어 태우고 싶다
온갖 세상의 땟자국들을
말끔히 지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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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어느 날 / 권복례

풍만한 가슴 아래로 
홀아비꽃, 초롱꽃, 며느리밥풀꽃, 동자꽃 
다 거느리고서 
혼지 좋아서 실실 
웃고 있는 여름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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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노래 / 김병근

푸른 하늘 아래 
정오의 이글거리는 저 태양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낸다. 

때마침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시원한 바람을 품은 푸른 파도가 
더운 열기를 식혀 내린다. 

파도는 리듬을 타며 
더욱 크게 노래한다. 

밀려오는 파도는 모래밭에 
지난날 추억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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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가네 / 임백령

계곡물소리 눈에 담지도 못하고 여름이 가네 
가까운 산 멀리 세워 두고 여름이 가네 
임 한 번 불러 보지 못하고 여름이 가네 
속 깊은 얘기 나누지 못하고 여름이 가네 
이별 없이 이별의 날 온다고 여름이 가네 
장례식 많이 가 주지 못하고 여름이 가네 
잠자리 피던 곰팡이 무너지며 여름이 가네 
한반도는 평화를 원한다 북한과도 평화협정 
체결하고 대화하라고 트럼프에게 트윗 날리며 
분단국가 전쟁을 근심하다 여름이 가네 
죽음의 백조 B-1B가 또 올 거라며 여름이 가네 
한쪽을 따돌리자 동맹의 악수 굳은 여름이 가네 
남은 적폐를 척결하라 외치다 여름이 가네 
분노와 증오가 웃자란 채 여름이 가네 
불난 집 안부 묻지 못하고 여름이 가네 
복날 찾지 못하고 처서 오며 여름이 가네 
더웠던 여름옷도 움츠리며 여름이 가네 
선풍기가 이제야 찬바람 내주며 여름이 가네 
가식의 울음과 울먹임 꽃피던 여름이 가네 
유기견과 소라단에서 산책하던 여름이 가네 
권력의 초라한 노숙을 지켜보며 여름이 가네 
키우던 화초 몇 죽어 가던 여름이 가네 
살아와 밭 매던 할머니 떠난다며 여름이 가네 
분단과 적폐와 당파와 양극의 나라 여름이 가네 
달라질 게 없다고 매미들 울며 여름이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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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여름 하루 / 조길순

청마로 앉은 나비 졸다가 
깜짝 놀라 
동그라미 그려놓고 하늘로 날아가네 

밭고랑 일구는 아비 얼굴 붉으시고 
초록 자식 자라는 모습 
뚝에 앉자 
담뱃불 당기시고 먼 산 바라보신다. 

마구깐 송아지 반눈 뜨고 쉴 때 
강아지 길게 누워 잘 때 
초 여름 
들녘 가득 어미의 젖가슴처럼 
넉넉하게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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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여름 / 최영미

시라는 걸 쓰기 시작한 뒤 처음 맞는 8월은 그냥 지 
나가지 않았다. 술 마신 다음날 반쯤 시체가 된 몸은 
꾸역꾸역 밖으로 나가고만 싶어 창문을 열면, 매미소 
리와 함께 마지막 여름이 가고 놀이터 아이들은 키 큰 
잠자리채를 깃발처럼 흔들었다 

무성한 벌레울음과 그 뒤에 오는 짧은 침묵 사이로 
어제의 시가 유산되고, 간밤의 묵은 취기도 마저 빠져 
나가고 맴맴, 맴돌기만 하던 생각도 가고 그대와 함께 
여름이 간다 

아직 배반할 시간은 충분한데....... 그리 높지도 푸르 
지도 않은 하늘 아래 구름은 또 비계 낀 듯 잔뜩 엉겨 
붙어 뭉게뭉게 떨어지지 않고 다만, 거짓말처럼 천천 
히 서로 겹쳐졌다 풀어지며 경계를 만들었다 허무는 
힘으로 입술과 입술이 부딪치고 다만, 한 기억이 또 
다른 기억을 뭉개며 제각기 비비다 울며 여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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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름 풍경 / 박인걸

어젯밤 내린 비에 
나무들마다 샤워를 하고 
싱그럽게 춤을 춘다. 

한 여름엔 나도 
한 그루 소나무가 되어 
짙은 향기를 내뿜는다. 

숲 속을 헤젓는 
산새들의 고운 음색도 
싫지 않은 앙상블이다. 

보랏빛 꽃을 피운 칡넝쿨과 
하늘로 솟아오르는 
산 나무들의 경쟁도 치열하고 

건너편 숲에서 들려오는 
매미의 숨넘어가는 절규도 
여름에만 듣는 노래다. 

한 여름은 온통 
생명 있는 것들로 충만해 
산다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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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더운 여름밤 / 조병화

무더운 여름밤
밤에 익은 애인들이 물가에 모여서
길수록 외로워지는
긴 이야기들을 하다간..... 밤이 깊어
장미들이 잠들어버린 비탈진 길을
돌아들 간다.

마침내 먼 하늘에 눈부신 작은 별들은
잊어버린 사람들의 눈
무수한 눈알들처럼 마음에 쏟아지고
나의 애인들은 사랑보다 눈물을 준다.

​내일이 오면 그날이 오면
우리 서로 이야기 못한 그 많은 말들을
남긴 채
영 돌아들 갈 고운 밤

​나의 애인들이여
이별이 자주 오는 곳에 나는 살고
외로움과 슬픔을 받아주는 곳에 내가 산다.

무더운 여름
밤이 줄줄줄 쏟아지는 물가에서
이별에 서러운 애인들이 밤을 샌다.

별이 지고
별이 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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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날의 연정 / 박동수

푸른 사랑을 하고 싶다 
뜨겁게 불어오는 하늬바람 속을 
당신과 뜨거워 못 견디는 
진한초록의 사랑을 하고 싶다. 

가슴속으로 줄기차게 내리는 
여름날 소나기 빗줄기처럼 
당신과 끝없는 
줄기찬 사랑을 하고 싶다 

낙엽이지는 가을 
붉게 타버린 세월의 낙엽 사이로 
떨어지는 날 있을지라도 
한 계절만이라도 
불타는 사랑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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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밤 별지기 / 김용관

여름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간간이 스치는 솜털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별이 되고 싶습니다. 

토방마루 끝에 멍석을 깔아 
서릿발 가득한 수박을 놓고 
내 허리를 질끈 동여매는 여인 같이 
은하수가 있는 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름밤에는 천 년의 꿈을 
한날 밤에 풀어내는 맑은 소녀의 눈동자에 
인연의 고리로 머물러 이슬을 먹고 배부른 
베짱이가 되어 스륵 쓰륵 울고 싶습니다. 

그러나 별지기는 
이별보다 아픈 상처를 안고 
문풍지 새로 숨어버린 댓잎소리만 
홀로 매만지며 자야 할 때가 있습니다. 

먹구름을 칭칭 감아올린 나무 사이로 
광풍에 밀려온 바람이 별자리를 흔들고 
꼬리 잘린 여우같이 성질 사납게 달려와 
멍석을 말아가는 밤이 싫습니다. 

그래도 별지기는 
여름밤이 찾아오면 소녀가 다 풀지 못한 
수수께끼 같은 7월 7석 희로애락을 
멍석에 다시 깔아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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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밤 이야기 / 김용관

언제부턴가 여름밤에는 
모깃불을 놓고 멍석위에는 줄부채를 
항상 준비해야 하는 일은 
남자라고 내게만 아버지는 명하셨다. 
어머니는 식은 보리밥 밥상 위에 
된장에다 풋고추를 푹 박아서 내놓는다 
어쩌다 국수도 나오고 
밭에서 일찍 오시는 날에는 
골진 수제비국도 물김치 옆에서 
달빛을 받아 빛을 내고 있었다. 
모기는 연기를 좋아해서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기를 좋아하는데 
보릿대만 타고 풀이 없으면 연기가 없다고 
항상 싱싱한 풀잎을 불 위에 덮어야 한다며 
몇 숟갈 뜨기도 전에 “이놈아 왜 식구들 
생각하는 마음이 그리도 없느냐.”라고 호령이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달빛을 가리고 운다. 
도시의 여름밤은 달도 별도 모깃불도 없고 
아버지 엄하신 명령만 바람에 싸여 
가끔씩 왔다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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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비의 사랑 / 김덕성

여름비가 
시원스럽게 내린다 
그렇지 네가 안간힘을 다 해도 
내겐 별 수 없을 거야 하며 

여름비는 더위에게 대항하며 
민의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기세 당당하게 쏟아지는 여름비 
으르렁대는 위험이 대단하다 

더위에 지친 나뭇잎을 
사랑으로 촉촉하게 적시니 
수그러졌던 잎 빳빳이 펴지며 
신귀하게 되살아난다 

금세 초록 옷으로 갈아입은 듯 
세상 초록세상이 되고 
더위는 고개 숙인다 
사랑으로 내려주는 여름비인데 
더위인들 당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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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을 보내며 / 이향아

절정은 지나갔다 
8월은 이제 만만한 풋내기가 아니다 
말복을 향해 불을 뿜던 칸나도 
제풀에 지쳐 목이 잠기고 
감출 것도 머뭇거릴 것도 없는 
그렇다고 으스대지도 않는 
이미 판가름이 난 굿판 
발표가 남았어도 조바심하지 않는다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을 것 
두근거림도 가라앉히고 
평온하게, 
아주 평온하게 익어가는 대낮 
햇발은 느긋하게 그림자를 늘인다 
그래도 매미는 죽을힘을 다해 
최후의 공연을 부르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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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햇과일 / 윤의섭

우물가의 앵두는 
터질 듯 붉어지고 
울 밖의 살구는 단내를 뿌린다 

텃밭의 딸기 토마토 
다투어 크고 
땅속의 감자도 흙을 터트리네 

이슬 먹은 상추 
잎이 붉어지고 
때 묻지 않은 햇빛이 바구니를 비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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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텃밭 기도 / 정윤목

해 넘어 뉘엿 
오묘한 달 별 초롱이 
밤하늘 등걸 위 신비로 밝히울 때  

가만히 드리운 풀들의 정원 
사각사각 뿌리 뽑아 한 켠 수북히 
하늘 시선 두면 모두 다 같은 삶이라 끄덕이고, 

고마운 눈물 희망으로 젖어 들어 
풀벌레 파동 따라 깊은 사색 
저들의 언어에 길들이는 은총의 시간  

님이여 
제 안 가득 널리 깊이 웅장하게 
터 잡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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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소나기 / 조남명


찌는 듯한 무더위는 
땅속까지 말라 가고 
지친 생명들 아우성인데 

반가운 님이 
별안간 찾아왔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열기 
뜨거워진 몸의 
주체 못 하는 몸부림을 
후련하게 식혀주고 간다 

이게 
얼마나 가랴 

갈증으로 
목이 말라오면 또, 
그 님이 그리워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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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꽃잎 질 무렵 / 김기연

자주감자 꽃잎 지는 초여름이었습니다
아버지 동네 부역 나가시고,
어머닌 오일만에 드는 이십 리 읍내의
의성장 가시고
오빠들마저 학교에 간 정오는
덕지덕지 고요가 쌓였습니다
아, 풍요해진 고요는 사랍짝을 밀치고 나와                        
휑한 동네의 구석구석을 마저 채웠습니다

앞산자락 참나무 사이 뻐꾹새 흐드러지게
고요를 읽고 있을 때
나는 가슴 한 자락 살포시 펴고
묘사 끝, 음복떡 보자기에 챙겨 담듯이
그 소리 담았습니다

이내 소리들은 졸음이 일고
졸음 든 소리를 베고 누워 따라 잠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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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해야 할 여름 / 백원기

섭씨 사십 도를 바라보는 더위 
이천십팔 년 칠월은 
재앙의 달이다 

무심했던 것이 그리워진다 
흘러가는 구름과 
귀찮던 빗방울 
그리고 나그네 바람 
한 번이라도 붙잡고 
눈인사할 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더위 
위대한 창조자의 힘이기에 
넘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세상 사람아 
이 무더위에 눈을 감고 
자성의 시간을 갖자 
내 생각과 언행이 
과연 옳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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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해 여름 배롱꽃 / 오소후

매미도 울지 않았다 
목탁소리가 한 번 두 번 울릴 때마다 
호르륵 새가 울었다고 기억한다 
아니 배롱꽃이 수레바퀴 꽃차례를 굴리고 
한 개 두 개 붉은 꽃잎이 주름살을 폈던가 

유두절 비가 퍼부었다 
망자를 위한 비가도 들리지 않았다 

이승에 남은 가족들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사십구재를 올리고도 
여름 내내 백 번의 제례를 올렸다 

짙푸른 숲 속에는 호루라기새만 호르르 울고 
스님은 지장보살 지장보살 한 시간 넘게 호명하고 

누굴 만났다가 이별을 했다는 건가 
싱거운 질문이 고개를 든다 
부처는 자신의 설법이 뗏목 같다고 했는데 

붉은 꽃이 여름을 태우며 백일을 핀다고 배롱꽃 
고요를 깬다는 파양수 (怕揚樹) 
그해 여름 나는 한 그루 배롱꽃으로 피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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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미가 없던 여름 / 김광규

감나무에서 노래하던 매미 한 마리 
날아가다 갑자기 공중에서 멈추었다 
아하 거미줄이 쳐 있었구나 
추녀 끝에 숨어 있던 거미가 
몸부림치는 매미를 단숨에 묶어버렸다 
양심이나 이념 같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후회나 변명도 쓸데없었다 
일곱 해 동안 다듬어온 
매미의 아름다운 목청은 
겨우 이레 만에 
거미밥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걸리면 그만이다 
매미들은 노래를 멈추고 
날지도 않았다 
유달리 무덥고 긴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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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열매 속삭임 / 이영지

나뭇잎 세포에다 
하늘의 바람만을 

얹어서 놓으세요 
바람을 놓으세요 

빠알간 가슴속으로 
들어가서 
살게요 

사랑이 가슴만큼 
오늘은 얼마만큼 

사랑이 둥글둥글 
온 날이 열어놓아 

알알이 여물어가며 
여름 열어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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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가는 소리 / 김길남

산길 높낮이 구분 없이 
성크름한 숲길 사이로 
밤새 흡족히 내린 이슬 머금고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새벽 녁 
창문 틈새로 
각두정 같은 바람을 몰고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구름 한 점 없고 
거리를 알 수 없는 
청자 빛 하늘 아래로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저 능선을 넘으면 
하산 길이 시작되는데 
건너편 산 봉우리 따라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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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밤의 단상 / 오애숙

참 예쁜 추억의 꽃 늘 맘에 피어나 
옛 얘기 들려주며 사랑을 속삭여요 
그대 맘 심 중에서도 세월이 흘러도 

그때의 그 추억들 일렁이는 물결로 
풋풋한 첫사랑을 새김질하고 있나 
한밤중 소야곡으로 불렀던 그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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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밤의 동침 / 최영희

내가 그렇게도 좋은 가봐 

싫대도, 싫대도 
어느새 내 허벅지, 
발가락까지 입맞춤했나 봐 
난 너(모기)의 사랑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데 
여름밤 내내 너에게 강요당한 동침 
재스민 비누향기도 가시기 전 
지키지 못한 내 순결 
아무리 생각해도 분노여라 
이 지긋한 한여름 밤의 사랑 전쟁 
내 곁에 깊이 잠든 
내 사랑 당신은 아시나요? 
한여름 밤 
이 불순한 동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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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지나는 길목 / 윤갑수

까치와 까마귀들의 구역 다툼 
단잠을 깨우며 난리법석을 떤다 
싸움 한판 중이다 

거칠어진 울음소리에 눈을 뜨니 
해는 중천에서 웃고 있다 
열대야는 밤새 지친 몸을 잠 못 
이루게 하더니 

아침을 깨운 새들의 전쟁 속에 
싸우다 간 자리를 가득 메운 매미들 
임을 찾기 위한 몸부림 소리가 
불쾌한 심사를 녹인다. 

돌고 도는 계절은 멈춤이 없나 보다 
입추가 지나고 말복이 다가온다. 
여름 끝이 눈앞에서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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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름에 낙엽이 진다 / 용혜원


한 여름에 낙엽이 진다.
울고 싶지 않은 눈물이 쏟아지는 날
캠퍼스 가로수는
한 시대가 쏟아낸 최면에 걸려 
뱅그라 떨어져 나뒹군다.

잎들이 떨어질 때,
젊음도 떨어지지 않을까?
가을이 오면 푸른 하늘은 어이할까나.

대낮에도 부끄러울 얼굴들이 외면한 세월
캠퍼스 초록을 거닐며
이상과 낭만을 노래하던 젊은이는 어디로 갔나.

오늘도 윤동주 시비가 있는 캠퍼스엔
한 여름에 낙엽이 지고 젊음도 지고

시인은 오늘도 캠퍼스를 거닐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한다.

젊은이여, 그대들
진정한 눈물이 흐르는 날
캠퍼스 낙엽은 가을에 지고
이상은 푸른 하늘로 퍼져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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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하, 여름시작의 오후 / 박종영

뒷산이 쩌렁쩌렁 울리게 
산 꿩이 훼(喙)를 친다 
신방을 차리자는 장끼의 유혹인가, 
까투리 곰곰이 생각하다 풍만한 가슴을 
장끼에게 내민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여름 시작의 오후는 
초록 그늘에서 저것들의 
야릇한 유희(遊戱)를 만끽(滿喫)하게 하고, 

청보리 익을 무렵, 
어느새 회색 알을 깨고 나온 
현란한 장끼를 닮은 꺼병이가 줄줄이 
이랑 따라 펼치는 
작은 천국의 풍경들, 

가는 봄이 아쉬운가 
산바위 가슴에 봄의 무게를 잡아매는 더운 바람이 
연초록의 산그늘을 펼치는데, 
우리는 어찌해야 너희 
장끼 가족의 빛나는 요정(妖情)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가. 

==========================
+ 여름밤 잔별들의 속삭임 /윤갑수

별이 빛나는 여름 밤하늘엔 
잔별의 속삭임에 풀벌레도 졸고 
사랑하는 젊은이들만이 한밤을 
깨운다 

총총히 흩어지는 별똥별들이 
내게로 쏟아지다 사라지는 
밤하늘의 향연 
어둠 속에 반짝이는 사랑의 듀엣 
옛 시절 로맨스가 그리워진다. 

그대와 별 바라기 하던 
낭만이 살아 숨 쉬는 바닷가의 
밤하늘 

그대 그리움 속에 젖어드니 
조각구름이 잔별을 가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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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에 참 아름다운 당신 / 이채

마음은 바다를 향해도 
몸은 고된 하루에 지쳐 있을 
나의 이웃, 나의 벗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얀 파도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나보다 더 소중한 그 누구를 위해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담아내며 
긴 긴 하루 저물도록 걸어가는 
여름에 참 아름다운 당신에게 
시원한 바람의 노래를 불러주고 싶습니다 

누구나 마음의 고향이 있지요 
정겨운 그 고향 언덕에 
늘 그리움의 집 한 채 짓고 사는 우리 
그 언덕 푸른 숲 나뭇잎은 흔들리고 
새소리 바람소리 가슴을 적실 때 

어디에 가면 
세상에 없는 꿈이 거기 있을까요 
비 개인 아침 숲 
박하내음 같은 당신이여! 
홀로 조용히 시간을 더듬어 보면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독한 일입니다 

하늘은 결코 기적을 주지 않고 
인내에 응답하는 믿음을 약속할 뿐 
숭고한 노동의 의미와 
그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여름에 참 아름다운 당신 
당신은 오늘의 빛이고 내일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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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싸리 꽃의 보랏빛 외출 / 정세일

사랑하는 나의 당신이여 

당신의 그리움은 다시 안녕하신가요. 
당신의 동요와 동시에 
다시 등장하는 여름날 
한여름 밤에 달빛을 더욱 고요하도록 
별들은 스스로 무지개를 만들어 
서편 하늘에 
붉은 한 편의 그림을 만들고자 한다. 
누군가의 이름이 쓰이지 않아도 
언젠가는 풀잎들의 이름으로 
보내질 것 같은 
여름날 싸리 꽃의 보랏빛 외출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소낙비의 세찬 회초리 
마음의 오선지에 쓰이고 있는 
가는 비와 
이슬비의 합창 
사랑하는 당신이여 
그래서 다시 당신에게 물어봅니다. 
마음의 시작은 어대였는지 
소낙비처럼 
자신을 다스리고 절제된 모습의 
세찬 비를 내리게 하는 것도 
어쩌면 동요와 동시를 만들기 위한 
한여름 밤의 달빛에게 물어보는 
아침이 오는 곳 
그리고 아침햇살이 엉금엉금 기어와 
마치 음악의 동굴을 통과한 것처럼 
표정을 짓는 것도 
그래서 소낙비의 동요와 동시는 
비를 피할 수 있는 키 큰 미루나무 아래서 
아직도 구름을 가져와 
풀잎들의 어영차 
수초를 만들어 
다시 웅덩이가 되면 
개구리울음소리가 들리는 
웅덩이를 만들어 
산 아래에까지 
다랭이 논이 마음이 잠기게 하고 
칸칸마다 여름날의 깨어있음을 개구리의 울음소리로 가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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