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 나기철
감나무 잎이 창을 덮어
건너 아파트 삼층 여자의 창이
안 보인다
감나무는 내 눈을
우리 집 안방으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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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 유자효
이 여름에
우리는 만나야 하리
여미어 오던
가슴을
풀어헤치고
우리는 맨살로
만나야 하리
포도송이처럼
석류알처럼
여름은
영롱한 땀방울 속에
생명의 힘으로
충만한 계절
몸을 떨며 다가서는
저 무성한
성숙의 경이 앞에서
보라.
만남이 이루는
이 풍요한 여름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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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 이시영
은어가 익는 철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수박이 익는 철이었다
통통하게 알을 밴 섬진강 은어들이
더운물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찬물을 찾아 상류로 은빛 등을 파닥이며 거슬러 오를 때였다
그러면 거기 간전면 동방천 아이들이나
마산면 냉천리 아이들은
메기 입을 한 채 바께스를 들고
여울어 걸터앉아 한나절이면 수백 마리 알 밴 은어들을
생으로 흝어가곤 하였으니,
그런 밤이면 더운 우리 온몸에서도
마구 수박내가 나고
우리도 하늘의 어딘가를 향해
은하수처럼 끝없이 하옇게 거슬러 오르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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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 정윤목
여름 사르락
흰 눈처럼 빛나던 빛
간 데 없고
흐려지는 안개비
소스락
강 만들 때
아이들
천방지축 뛰어놀고
땀방울
기쁜 열기
여름빛
쨍쨍하지만은,
우수의 습기 가득할 때
그리움 더욱 간절하여지고
희망조차 옅어지며
하나의 이름,
묻어둘 때
새들의 노래
풀들의 소리
끊임없는 파도
마음과 마음
=============
+ 여름 / 정호승
꽃나무에 술을 뿌리다
술에 꽃잎이 지다
아버지는 채송화를 보고 울고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선다
산 너머 우박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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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 지철승
돛단배의
돛이고 싶다
바람 가득 흰 돛에 달고
사랑하는 여인 찾아 바다를 헤매는
젊은 선원을 따라
머나먼 항해를 하는
돛단배의
돛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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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하 / 윤보영
오늘부터 여름이다
봄꽃이 너무 많아
아직 다 데려오지 못해
아침기온이 서늘한 여름이다
내안에
마중 나와 데려온
네 생각이 무성하게 들어찬
여름이다
꽃 보다
네가 더 보고 싶을
여름이다.
---------------------
+ 담쟁이 / 목필균
누구냐
내 마음의 벽을 잡고 올라서는 너는
7월 태풍, 모진 비바람 속에도
허공을 잡고 올라서는 집착의 뿌리
아득히 떠내려간 내 젊음의 강물
쉼 없이 쌓여진 바람벽을 기어오르는
무성한 그리움의 잎새
어느새 시퍼렇게 물든 흔들림으로
마음을 점령해가는 네 따뜻한 손길
==============
+ 여름밤 / 김길자
처마 끝에
보름달 걸어 불 밝히고
말아놓은 멍석
주르르 펴
온 가족 둘러앉아
우물에서
막 꺼낸 먹은 수박 맛
창자까지 시려와
삼복더위도
까만 씨 속으로 숨는다
별꽃 피던 이야기 코 골고
엄마 품에 안긴 아기 꿈꾸는
유년기의 여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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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밤 / 김정호
바람 스치는 소리였던가
아니 물 푸른 울음으로 되살아나
강물 흐르는 소리였던가
끝내는 화해할 수 없었던
우리들의 여름밤
마지막 남은 햇살은
뜨거운 입김처럼 불어
언젠가는 한 번은
헤어져야 한다는
능소화를 닮은 그대
꽃잎 붉게 지고 난 자리
거기
네 그림자가 서 있다
아! 이 밤도
나는, 또
잠들지 못하고
밤새껏 강물로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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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밤 / 문인수
저인망의 어둠이 온다
더 많이 군데군데 별 돋으면서
가뭄 타는 들녘 콩 싹 터져 오르는 소리 난다
가마솥 가득 푹 삶긴 더위
솥검정 같은 이 더위를 반짝반짝 먹고 있다
보리밥에 장아찌 씹듯
저 별들이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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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밤 / 유금
저녁 먹자 초승달이 아까워
사립문 닫고 더위에 누웠네
하늘 맑으니 모기가 귓가를 지나고
별 흩어지니 거미가 처마로 내려오네
박꽃은 하얗게 피고
국화잎은 점점 커지네
이웃집 아이 달 노래 부르는데
그 가락 어찌 그리 간드러진지
==============
+ 여름 비 / 송정숙
생각 없이 무작정 갈 수 있는
아름다운 동행
찔레꽃 시샘하여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 협주곡
비 속에 나체를 세워놓고 싶은
욕망에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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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비 / 이성선
대낮에 등때기를 후려치는 죽비소리
후두둑
문밖에 달려가는 여름 빗줄기
--------------------
+ 여름 산 / 고명
아침나절 내린 비가 질척하게 고여 있는
숲길, 나무들의 젖은 몸에서
짙은 페로몬 냄새가 풍겨나고 있다
짐승의 거친 숨소리 울음으로 풀어내며
흐트러진 머리칼 푸르게 출렁이고 있다
한낮의 잠 속으로 노곤하게 빠져드는
알몸의 여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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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숲 / 박상희
넉넉히 거친 바람 숨겨
초록의 향으로 돌려주렴.
따가운 햇살
몰래 숨어 쉬어가도
모른 체 덮어주렴.
지친 나그네 덥석 주저앉아
세월 보따리 풀어놓거든
초록으로 다독다독 감싸주렴.
=============
+ 초여름 / 허형만
물 냄새
비가 오려나 보다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
바람결
따라 흔들리고
애기똥풀에 코를 박은
모시나비
지상은
지금 그리움으로 자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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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팔월 / 문태준
여름은 흐르는 물가가 좋아
그곳서 살아라
우는 천둥을, 줄렁줄렁하는 천둥을
그득그득 지고 가는 구름
누운 수풀더미 위를
축축한 배를 밀며 가는
물뱀 몸에 물을 가득 담고 있는,
불은 계곡물
새는 안개 자욱한 보슬비 속을 날아
물버들 가지 위엘 앉는다
물안개 더미같이, 물렁물렁한
어떤 것이 지나가느니
상중(喪中)에 있는 내게도
오늘 지나가느니
여름은 목 뒤에 크고 묵직한 물주머니를
차고 살아라
-----------------------
+ 풋여름 / 정끝별
어린 나무들 타오르고 있어요
휘휘 초록 비늘이 튀어요
풋, 나무를 간질이는 빛쯤으로 여겼더니
풋, 나무 몸을 타고 기어올라
풋, 나무 몸에 파고들어요
가슴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을까요
어느새 휘감치는 담쟁이덩굴은?
온몸을 뒤틀며
뿌드득 뿌드득 탄성을 지르며
풋, 나무 힘줄 세우는 소리
용트림하는 풋나뭇가지
초여름 저물녘 입술 자국에
겨드랑이부터 뚝뚝
초록 진땀을 흘리고 있어요
풀물 냄새를 풍기는
순 풋나무
담쟁이 치마폭에 폭 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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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나비 / 오보영
마땅히 내려앉을
꽃이 없어서
풀숲 위를 방황하던
하얀 나비가
나보다 한발 앞서 태평양을 건넜네
딸네 집 앞뜰 화사한
분홍 꽃에 앉아
두 날개 팔랑이며 반기어 맞네
그러던 님
예 와서 만났노라고
님의 체취
한껏
들이쉬고 있다고
자랑하며 어서 오라 손짓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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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낙조 / 송수권
왜 채석 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나는 지름 만권의 책을 쌓아 놓고 글을 읽는다
만 권의 책, 파도가 와서 핥고 핥는 절벽의 단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나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할 만권의 책
오늘은 내가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 지르고
이 한바다에 재를 날린다
켜켜이 쌓은 책 속에 무일푼 좀벌레처럼
세 들어 산다
왜 채석 강변에 사느냐 묻지 말아라
고통에 찬 나의 신음 하늘에 닿았다 한들
끼룩끼룩 울며 서해를 날으는 저 변산 갈매기만큼이야 하겠느냐
물 썬 다음 저 뻘밭에 피는 물잎새들만큼이야
자욱하겠느냐
그대여, 서해에 와서 지는 낙조를 보고 울기 전에
왜 나 채석 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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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바다 / 김덕성
팔월 초순
불가마 속 같은 찜통더위에 밀려
달려와 가슴을 헤치니
글쎄 느닷없이
하이얀 거품을 물고
사자처럼 달려와
반갑게 포옹하며 물세례를 주는 파도
숨을 돌리려 하면
다시 밀려와 반복하는 바다
이제 몸 열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여름바다가
이렇게 좋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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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바다 / 이제민
태양이 이글거리는
무더위가 찾아오면
하나둘씩 모여드는 사람들
작은 도시를 이룬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온몸이 타들어가는 열기 속에
바다는 모처럼 긴 기지개를 켠다.
백사장은
알록달록한 꽃무늬로 물들고
바다는
물장구치는 아이들의 천국이 된다.
밀려오는 파도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저 수평선 끝에서 부는 짭짤한 바람에
닫혔던 마음은 넓어져만 간다.
바다는 여름내
작은 도시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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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름날 / 박효찬
그녀 입술에
빨간 립스틱의 그리움은
장미꽃 넝쿨 사이 묻어두고
유난히 큰 안경알이 낯섦은
세월이 흔적인가
꿀벌들 윙윙 쫓던
여왕벌은
텃밭 배추 꽃잎에 앉아
아름다움과 도도한 모습 찾으러
윙 윙
관능적임은 고상한 척
아름다움은 주름살로 변해버린
여왕벌아!
이젠
초야에 묻혀
장독대 항아리 속 된장만큼이나
구수한 이야기 풀어놓으며
친구들과 함께
저물어 가는 석양을 맞이하자.
================
+ 혹서일기 / 박재삼
잎 하나 까딱 않는
30 몇 도의 날씨 속
그늘에 앉았어도
소나기가 그리운데
막혔던 소식을 뚫듯
매미 울음 한창이다.
계곡에 발 담그고
한가로운 부채질로
성화 같은 더위에
달래는 것이 전부다.
예닐곱 적 아이처럼
물장구를 못 치네.
늙기엔 아직도 멀어
청춘이 만리인데
이제 갈 길은
막상 얼마 안 남고
그 바쁜 조바심 속에
절벽만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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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푹풍에도 그다음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푹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푹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 홀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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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고지리 / 김귀녀
열 평 남짓한 채마 밭
여름더위를 견디느라
고지리의 여름이 끓고 있다
감자밭에 앉았다 들어오는 남편 얼굴에
땀 구슬이 송송 달리고
상추는 물도 주지 않았는데
쑥쑥 자라고 달팽이와
사과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다
하늘 향해 고개 들던
장미, 시들시들 고개 떨구어
내 목을 자꾸 마르게 한다
인견바지 궁둥이 쪽에
구멍이 났어,
바지 하나로 여름을 날 수 없다고
주문해 달라는 남편 얼굴도 덥다
다래가 익어가고
그 숲에서 나는
무더위를 훼치는 한 마리
여름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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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능소화 / 정끝별
꽃의 운이 감기는 것과
꽃의 손이 덩굴지는 것과
꽃의 입이 다급히 열리는 것과
꽃의 허리가 한껏 휘어지는 것이
벼랑이 벼랑 끝에 발을 묻듯
허공이 허공의 가슴에 달라붙듯
벼랑에서 벼랑을
허공에서 허공을 돌파하며
홍수가 휩쓸고 간 뒤에도
붉은 목젖을 돋우며
더운 살꽃을 피워내며
오뉴월 불 든 사랑을
저리 천연스레 완성하고 있다니!
꽃의 살갗이 바람 드는 것과
꽃의 마음이 붉게 멍드는 것과
꽃의 목울대에 비린내가 차오르는 것과
꽃의 온몸이 저리 환히 당겨지는 것까지
===================
+ 여름의 달밤 / 김소월
서늘하고 달 밝은 여름밤이여
구름조차 희미한 여름밤이여
그지없이 거룩한 하늘로서는
젊음의 붉은 이슬 젖어내려라.
행복의 맘이 도는 높은 가지의
아슬아슬 그늘 잎새를
배불러 기어도는 어린 벌레도
아아 모든 물결은 북 받았어라
뻗어 뻗어 오르는 가시덩굴도
희미하게 흐르는 푸른 달빛이
기름 같은 연기에 멱감 을러라
아아 너무 좋아서 잠 못 들어라
우긋한 풀대들은 춤을 추면서
갈잎들은 그윽한 노래 부를 때,
오오 내려 흔드는 달빛 가운데
나타나는 영원을 말로 새겨라
자라는 물벼이삭 벌에서 불고
마을로 운 슷듯이 오는 바람은
눅자 추는 향기를 두고 가는데
인가들은 잠들어 고요하여라
하루 종일 일하신 아기 아버지
농부들도 편안히 잠들었어라
영 기슭의 어둑한 그늘 속에선
쇠스랑과 호미뿐 빛이 피어라
이윽고 식 재리의 우는 소리는
밤이 들어가면서 더욱 잦을 때
나락밭 가운데의 우물가에는
農女의 그림자가 아직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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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오면 / 이해인
산에 오르지 않아도
신록의 숲이 마음에 들어차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묵묵히 기도하며
이웃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자고 했지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파도 소리가 마음을 흔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탁 트인 희망과 용서로
매일을 출렁이는 작은 바다가 되자고 했지
여름에 울창한 숲에서
그늘을 제공하는 한 그루 나무
시원한 파도 소리를 느낄 수 있는 바다....
이렇게 인간의 좋은 휴식처가 되어 주는
산과 바다의 모습을 통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자고
전하는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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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여름 풍경 / 정연복
날이 덥다
보이지 않는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새들의 울음소리에 나뭇잎들이 시든다
더운 날 나무에게는 잦은 새소리가
불안처럼 느껴진다
익어가는 토마토마다 빨갛게 독기가 차 오르고
철길을 기어가는 전철의 터진 내장에서
질질 질 질긴 기름이 떨어진다
약속에 늦은 한낮이
헐레벌떡 달려온 아파트 화단에
기다리는 손에 들린 풍선이 터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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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여름의 꿈 / 황동규
긴 겨울눈에 주저앉은 비닐하우스가
생시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는 꿈
깬다.
초여름에 겨울 꿈을 꾸다니!
프로이트에 의하면 진짜 꿈은 다 개꿈이라지만,
꿈의 출구에 삶의 입구 표지를 붙일 수는 없다.
새벽길 나서니 길섶 홍건히 젖어 있고
먼동 트는 하늘에는 금빛 별 무리
땅에는 은빛 별꽃 무리
별꽃, 석죽과의 막내 꽃,
별빛 한 줄기 줄기는 별 꽃잎의 하트형이라고
초여름 새벽이 일러준다.
지금 뛰는 가슴도 하트형이다.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삶의 이마에 뜰 때까지,
삶의 출구가 꿈의 입구로 열릴 때까지.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아니면 또 어떠리.
이 세상 어디엔가 꽃이 눈뜨고 있는 길이,
초여름 새벽을 가라.
==================
+ 푸른 초여름 / 김상옥
세상엔 말도 노래도 다 사라진다.
네가 옹알이를 시작하면
물에 뜬 수련, 수련 속의 이슬도 구른다.
꿈꾸듯 네 긴 속눈썹 깜박이면
강보에 싸인 채 요람이 흔들린다.
좜좜좜 네 작은 손등의 푸른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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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름의 선물 / 임영준
청춘의 한 자락
한라의 가슴 영실에
나만의 보금자리를 꾸미고
얼음 같은 계곡물에 몸을 담근 채
수많은 별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인생 별거 아니라 했다
사랑, 반짝하는 별똥별이라 했다
그리고 카르페디엠
두고두고 내리받은 선물이 되었다
나를 밝히는 빛이 되었다
그 여름 한라에 쏟아진 별들은
아직도 나를 벌렁벌렁 들뜨게 하며
유혹의 암시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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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여름의 노래 / 문태준
오늘은 만물이 초여름 속에 있다
초여름의 미풍이 지나간다
햇살은 초여름을 나눠준다
나는 셔츠 차림으로 미풍을 따라간다
미풍은 수양버들에게 가서 그녀를 웃게 한다
미풍은 풀밭의 염소에게 가서 그녀를 웃게 한다
살구나무 아래엔 노랗고 신 초여름이 몇 알 떨어져 있고
작은 연못은 고요한 수면처럼 눈을 감고 초여름을 음미한다
초여름은 변성기의 소년처럼 자란다
하늘은 나무의 그늘을 펼치고
하늘은 잠자리의 날개를 펼친다
나는 잠자리의 리듬을 또 따라간다
초여름 속에서 너의 이름을 부르니
너는 메아리가 되어
점점 깊어지는 내 골짜기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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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름 새벽에 / 박재삼
이십오 평 게딱지 집 안에서
삼십몇 도의 한더위를
이것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내 새끼야, 내 새끼야
지금은 새벽 여섯 시
곤하게 떨어져
그 수다와 웃음을 어디 감추고
너희는 내게 자유로운
몇 그루 나무다
몇 덩이 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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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름의 미황사 / 이가림
내리쳐도 내리쳐도
한사코 솟구쳐 나오는 머리통을
그 어떤 도끼로도 박살 낼 수가 없었나 보다
짙푸른 구곡(九曲) 병풍으로 둘러선
산등성이마다
잘생긴 달마들 기웃기웃 서서
동백꽃들 벙근 젖가슴을 보느라
회동그란 눈에
불이 붙어 있었네
영문 모르고
여름 한문 외우기 공부에 붙들려온
땅강아지 같은 아이들
돌담 너머 뙤약볕에 익어가는 까마중에만
한눈 팔려
생각 사(思)자에 마음(心)이
하나같이 떨어져나가고 없었네
허허, 달마산이 바로 절간이거늘
미련한 중생들은 무엇하러 빈 법당에서 빌고 있는가,
한마디 내뱉고 싶어 죽겠는 건달 나그네
일찌감치 절마당에서 빠져나와
풀숲을 휘젓는데
암여치 한 마리 숫여치를 엎고 나는
그 숨가쁜 활공(滑空)의 순간의 사랑
대낮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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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 냄새 끝에는 / 이재무
여름비에는 냄새가 난다
들쩍지근한 참외 냄새 몰고 오는 비
멸치와 감자 우려낸 국물의
수제비 냄새 몰고 오는 비
옥수수기름 반지르르한
빈대떡 냄새 몰고 오는 비
김 펄펄 나는 순대 국밥 내음 몰고 오는 비
아카시아 밤꽃 내 흩뿌리는 비
청국장 냄새가 골목으로 번지고
갯비린내 물씬 풍기며 젖통 흔들며
그녀는 와서
그리움에 흠뻑 젖은 살
살짝 물었다 뱉는다
온종일 빈집 문간에 앉아 중얼중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혼잣소리 내볕다
신작로 너머 홀연 사라지는 하지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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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레이는 초여름 / 서문인
철렁이는 초여름
흐르는 강가에 서면
빙어같이 튀어 솟는
그대 향한 그리움
돌아서면
그렇게 귀엽던 당신
가시밭 넝쿨 장미로 피었으니
어여뻐 죽겠네
죽겠네
내 마음 쓸어
편지를 쓰면
펄펄 뛰는 내 가슴
옛 추억 속에
포옹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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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여름 저녁에 / 김경미
한여름, 선풍기에서 나오는 약풍 혹은 미풍이란 글자
처음 사랑의 편지 받았던 촉감일 때 있다
크게 속상하고 지친 울음 거두고 마악 여는 문
경첩에서 흰 바다 갈매기들 바닷물 닿을 듯 낮게
마중 나올 때가 있다.
극도로 줄이거나 높인 음악소리 속
가본 기억 없는 모로코사막의 터번 두른 낙타
눈 아픈 모래바람 앞서 가려줄 때 있다
유리창 너머 시원한 액자 속 흰 양떼구름들
살아 움직이는 활동사진처럼
갈래머리 계집아이의 어린 설레임 되감아줄 때 있다
어떤 여름 저녁,
그 모든 것들 한꺼번에 밀려나와
더위보다 큰 녹색 수박의 무수한 조각배들
잊을 수 없는
석양의 출항을 시작할 때가 있다.
======================
+ 여름날-마천에서 / 신경림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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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날의 수채화 / 김소미
딩동댕
실로폰 소리 같은
영롱한 아침
도토리 나뭇잎
사이사이
쏟아지는 은구슬
산새들의
청청한 세레나데
여름 숲이 흔들리다
풀잎 이슬
또르르 구르는
고즈넉한 오솔길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서
수채화 같은 여름날
화폭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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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바다에 눕다 / 박명숙
여름 바다로 가자
파도가 노래하고
조가비의 꿈이 있는 곳
그곳에 메마른 가슴을 적시며
사색의 시간을 갖자
여름 바다로 가자.
햇빛 부서지는 바다가
시리도록 아름다운 것은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
지난날의 추억이 파도처럼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노래에
꿈을 실어 춤을 추자
파도야! 파도야! 꿈을 품으라
부서지고 깨지며 아프게 소리쳐라
파도가 부르는 노래는
향긋한 바다 향기
슬픈 이에겐 위로의 노래가
기쁨이 있는 곳에 희망의 노래를
파도야! 파도야! 높이 솟아라
조가비에 새긴 꽃 빛 물결
아름다운 문양의 언어를 새겨라
여름 바닷가 별들의 고향
연인들의 사랑 노래 들려다오
뜨거운 태양 빛이 바다에 눕고
다시 여기에
아름다운 추억을 묻으며
달빛의 그리움을 잠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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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숲 속에서는
바람이 잠들고
마을에서는
지붕이 잠들고
들에는 잔잔한 달빛
들에는
봄의 발자국처럼
잔잔한
풀잎들
마음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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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을 이별하고 / 오세영
아쉬워 잡은 손을 이제는 놓아주오
세월의 붓놀림에 잠시 잠깐 속았을 뿐
이제는 휘 날아오는 가을빛이 보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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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여름 바닷가 / 정연희
뜨거운 태양이 정열을 부르고
파도 소리가 가슴을 적시는
지난여름 바닷가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시원한 솔바람 사이로
향기롭던 우리의 속삭임
물결처럼 일렁인다
바람에 흩어져 버린
우리의 지난날
그리워 다시 찾은 바다에는
정다운 우리의 이야기가
파도에 실려 가슴을 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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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여름 문턱에서 / 김귀녀
뙤약볕에 나방 한 마리
나비잠 자고 있다
초여름 바람이
한차례 회오리처럼
세차게 지나가는데도
미동도 없다
삶에 지친
모과나무 위로 날아오르던
참새 한 마리 흘끗
눈길 한번 주더니
날아간다
하늘에는 꽃구름 스쳐가고
바람도 낯설지 않은지
스르르 장미 숲으로 들어간다
아직도 여름은
저만치 서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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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은 깊어만 가고 / 김수용
풀벌레 노래하는
개 건너 과수원 가는 길
뜨거운 태양 아래 옥수수는
탐스럽게 익어가고
냇가에 물장구치는 아이들
해지는 줄 모른다
흙먼지 날리는 메마른 황토밭엔
앳된 아낙네의
애절한 사연이 가득하고
검게 그을린 얼굴에 흐르는
세월의 땀방울엔
고된 삶의 질곡이 남아있다
채마밭 사이로 군락을 이룬
개망초의 하얀 미소에
한낮의 열기는 식어가고
뻐꾸기 구슬피 우는
저녁노을 아래
여름은 점점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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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오는 여름밤은 / 박성룡
비가 오는 여름밤은
일찍이 소등하고
창가에나 조용히 누워 있는 것이 멋이네
한밤 내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에
흐려진 가슴을 씻기우고 누워 있으면
꽃밭에 쭈그린 청개구리보다도 오히려
내 마음이 화려하이
아침마다 서울을 가자면
저 먼 三井里에 이르는 길,
혹은 더 먼 마을의 들길까지도
수북이 수북이 피어 있던
그 허어연 들국화들도 지금쯤은
비를 맞겠지
지금의 내 눈,
내 귀만큼이나 어둠에 예민해져
그 허이연 목덜미로 비를 맞겠지
비가 오는 한여름밤은
일찍이 어린 것들을 달래어 잠재우고
창가에나 조용히 누워 있는 것이 멋이네
한밤 내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에
흐려진 가슴을 씻기우고 누워 있으면
꽃밭에 도사린 꽃뱀보다도 오히려
내 몸매는 화려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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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 여름 비에 젖다 / 고은영
빗물 머금은 여름
싱싱한 초록의 길섶에 서다
고향 어귀
새파란 청춘을 연주하던 소년이
빗줄기를 타고 와 낮고 맑은 음률로
여름을 연주하고 있다
허공엔 무력한 시간을 지나온
내 발자국이 무수한데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다
기다림은 욕망을 키우지 않았어도
늘 기대를 저버린 빈손이 멍하고
순장된 사랑의 조각들이 그립기만 하다
여전히 더운 열기를 식히는 비가 내린다
빛바랜 풍경으로 나는 그저 비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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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여름에 대한 위로 / 박종영
뒤란 장독대에 봉숭아 꽃이 한창이다
연분홍 꽃망울 대궁마다 가지런히 매달아
뜸한 마당이 붉은 웃음으로 풍성하다
봉숭아의 까만 씨,
작은 싹에서 저토록 주렁주렁
꽃등 달고 우쭐대는 품을 보노라니
갑사댕기 누나의 아련한 노래가 가슴을 친다
입추 무렵 고추잠자리 빙글빙글
볼록한 씨주머니 탐낼 때면,
톡톡, 작은 번식으로 서럽게 흩어지는
질박한 사랑의 눈동자,
늦은 오후 울 밑 아픔의 계단에서
붉은 입술 따 손톱에 물들이며
들뜬 첫눈이 오면 사라질 네 흔적의 안타까움에서,
그토록 슬픈 여름에 대한 위로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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