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 권오범
모든 것이 바쁘다
해는 화끈하게 삶고 싶고
장마는 구름에 물 적셔와
세상 물바다 만들고 싶고
그 등쌀 아랑곳없이 살아남아
기어이 대를 이으라고
바람이 초목들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후덥지근하게 지쳐버린 중복 허리
사람도 덩달아 수고로워야 한다
햇볕 피하랴 비 피하랴
시들고 물손받은 먹을거리들
어떡하든 살려 내랴
선풍기 냉장고 에어컨
부채라고 해서 마음 놓고 쉴 새 있겠는가
누워 빈둥대지 말고 하다못해 모기라도 쫓아야지
하루살이들 이별 파티 때문에 가로등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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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 손석철
세월이란 그림 그리시려고
파란색 탄 물감솥 펄펄 끓이다
산과 들에 몽땅 엎으셨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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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 유자효
이 여름에
우리는 만나야 하리.
여미어 오던
가슴을
풀어헤치고
우리는 맨살로
만나야 하리.
포도송이처럼
석류알처럼
여름은
영롱한 땀방울 속에
생명의 힘으로
충만한 계절.
몸을 떨며 다가서는
저 무성한
성숙의 경이 앞에서
보라.
만남이 이루는
이 풍요한 여름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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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 이상홍
아침부터
그늘은 일어나 무릎끓고
기도를 했지만
낡은 교각 뒤에서
떨던 몇 마리까지
차례로 끌려나와
탈색당하는
정오
연도에는
치를 떠는 수만의 푸른 이파리들
==============
+ 여름 / 임영준
작열하는 태양이
축복으로 느껴진다면
만끽할 수 있다
세찬 장대비 속
환희를 안다면
누릴 자력이 있다
노출이 자랑스럽고
자연에 당당하다면
깊게 빠진 것이다
풀밭에 누워
별들과 어우러질 수 있다면
줄길 줄 아는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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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 최영철
쌈 싸 먹고 싶다
푸른색을 어쩌지 못해 발치에 흘리고 있는
잎사귀 뜯어
구름 모서리에 툭툭 털고
밥 한 숟갈
촘촘한 햇살에 비벼
씀바귀 얹고
땀방울 맺힌 나무 아래
아,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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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꽃 / 이문재
그대와 마주 서기는
그대 눈동자 바로 보기는
두렵고 또 두려운 일이어서
저기 뜨락에 핀 꽃
여름꽃을 보고 있다
어둠의 끝에서
몸을 활짝 열었던 아침꽃들
정오가 오기 전에
꽃잎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안으로 돌아가 있다
해를 바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려워서 여름꽃은
꽃잎을 모아 합장한다
여름꽃을 자기 안으로 들어가
해의 눈동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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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날 /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랑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어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 고질한 병아라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갠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랑 그것들 봅니다
간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
+ 여름날 / 신경림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 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
+ 여름밤 / 권영호
물뱀 잔등 같은 길
자근자근 밟고
기억 속으로 숨은 바람 찾아갔었지
바람은 온데 간데없고
개구리울음소리만
귓전 가득 생각의 북을 올려
발목 잡힌 마음만
눈먼 어둠 속 홀로 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었네
----------------------
+ 여름밤 / 이준관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아들아, 세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은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 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
+ 여름밤 / 정호승
들깻잎에 초승달을 싸서
어머님께 드린다
어머니는 맛있다고 자꾸 잡수신다
내일 밤엔
상추잎에 별을 싸서 드려야지
=============
+ 여름밤 / 초봉희
논배미
달이 뜨면
마음을 합장하고
문간 등
붉은 웃음
개구리 신명나고
여름은
한숨 돌리고
고즈넉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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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방 / 김달진
긴 여름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앉아
바람을 방에 안아 들고
녹음을 불러들이고
저 불암산마저 맞아들인다
------------------------
+ 여름밭 / 문태준
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
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가 있지
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
그냥 둬보자는 것이다
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
토란은 넓은 그늘 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
참외는 장대비를 콱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
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 스윽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
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
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
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 귀는 밝고 눈은 맑다
그러니 그냥 더 둬보자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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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비 / 김덕성
열풍을 깔아 앉히고
아침을 식히려 비가 내립니다
님이 보낸
사랑의 빗방울처럼
정겹게 내리면서
반갑게 다가와
뜨거운 살결을
식히는
달콤한 청량제
누구는 비를
눈물이라고 말을 하지만
난 생수라
말하고 싶어요
내 손바닥에 내린 빗방울 하나
따르르 그르며
그리움을
실고 와 전하는
님의 편지니까요
==============
+ 여름 산 / 반기륭
울울창창 숲속엔
녹음이 빗살 무늬처럼 펼쳐지고
다람쥐 청설모
갈지자 행보하며
가는 길을 안내한다
아버지처럼 둥근 눈 뜨고
바라보는 듯한 여름 산은
나약한 인성을 담금질하고
허약한 의지를 풀무질한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여름 색깔과 풍광에 도취되어
자연의 오동통한 살 속에 빠져들고
오대산 정상은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
+ 여름 산 / 장석남
둥글게 흰 풀잎의 둥근
둥근 위에 앉은 잠자리의 투명
투명 위에 앉은 여름 산
비 온 뒤
이목구비 뚜렷한
여름 산 메아리 속으로
먼 훗날 살 집을
걸린다
둥글게 흰 풀잎의 둥근
둥근 위에 앉은
이슬과 해와,
발자국
--------------------------
+ 여름 숲 / 권옥희
언제나 축축이 젖은
여름 숲은
싱싱한 자궁이다
오늘도 그 숲에
새 한 마리 놀다 간다
오르가슴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마다
뚝뚝 떨어지는
푸른 물!
-----------------------
+ 초여름 / 김용수
고운 님 얼굴 닮은
마음으로
가만가만 불어오는
명주바람 앞세우고
싱그러운 연초록
잎사귀 사이로
은빛 햇살 쏟아져
아늑 거리는 신록의
꿈을 안고
여름 너 벌써 왔구나!
==============
+ 초여름 / 박태연
온 산이
아래, 중간, 꼭대기
소년 소녀가 가득하다
연하고 가냘픈 피부의
청소년 소녀들이 살랑대며 재잘댄다
푸른 대화로 술렁대고 수런스럽다
위로 뛰고 옆으로 돋고 아래로 뻗는 힘
어디로 튈지 모은다
사이사이 사각대며 키재기를 한다
외로운 빈 하늘 공간에 푸르름으로
외로움을 밀어내며 성장한다
누구나 외로우니까 말없이 자랄 뿐이다
시간은 뿌리 가지 전신 모두를 자라게 한다
동공 속으로 흔들어대는
잎새가 손 흔들며 반긴다
내 귓속 가득 온통 산이 재잘대고
온 산 가득 소년 소녀를 품고
싱그러움에 나도 따라 푸르러간다
------------------------------
+ 그해 여름 / 허형만
햇살 조금 빗물 조금
적당히 데불고
내 고향 순천을 찾아가던 그해 여름
죽여 시집간 누이의 치맛자락
섬진강 푸른 물에 저녁놀로 떠서
서럽게 서럽게 흐르고 있었다
-------------------------
+ 또 한여름 / 김종길
소나기 멎자
매미 소리
젖은 뜰을
다시 적신다
비오다
멎고
매미 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 소리
매미 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 보내는가
--------------------------
+ 어느 여름 / 신헌정
애벌레들이 녹음을 와삭와삭 베어 먹는
나무 밑에 비 맞듯 서다.
옷 젖도록 서다.
이대로 서서 뼈가 보이도록 투명해지고 있다
================
+ 여름바람 / 오보영
땀 젖은 몸
말려 주고
달궈진 맘 식혀 주는
당신은
님 내게 보내 주신
축복이어라
님 내게 향한
사랑이어라
-------------------------
+ 여름방학 / 나태주
여름방학 때 문득 찾아간 시골 초등학교
햇볕 따가운 운동장에 사람 그림자 없고
일직 하는 여선생님의 풍금 소리
미루나무 이파리 되어 찰찰찰 하늘 오른다
-----------------------------
+ 여름소묘 / 허영자
견디는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불벼락 뙤약볕 속에
눈도 깜짝 않는
고요가 깃들거니
외로운 것은
혼자만이 아니리
저토록 황홀하고 당당한 유록도
밤 되면 고개 숙여
어둔 물이 들거니
-----------------------------
+ 여름 일기 1 / 이해인
여름엔
햇볕에 춤추는 하얀 빨래처럼
깨끗한 기쁨을 맛보고 싶다
영혼의 속까지 태울 듯한 태양 아래
나를 빨아 널고 싶다
여름엔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향기로운 땀을 흘리고 싶다
방울마저도 노래가 될 수 있도록
뜨겁게 살고 싶다.
여름엔
꼭 한번 바다에 가고 싶다.
바다에 가서
오랜 세월 파도에 시달려온
섬 이야기를 듣고 싶다.
침묵으로 엎드려 기도하는 그에게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오고 싶다.
===================
+ 여름의 땅 / 차영섭
여름엔 땅도 바쁘실 거예요
사람들은 덥다고 물로 물로 가는데
땅은 꼭 해야만 할 일이 많거든요
겨울 내내 참고 얼지 않게 붙든 뿌리랑
봄이 오자 사람들이 뿌린 씨앗이랑
봄의 땅이 애써 싹트게 한 식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자라게 해야 하거든요
좀 더 멋있고 튼실하게 키워서
가을에 오는 햇빛이 쏘옥 단물 들게 하게요.
--------------------------
+ 여름 장마 / 변종윤
색동옷 갈아입더니
어느새 바람 불어
홀랑 벗었다.
비가 오면 긴 장맛비가 지루합니다
화단에 피어난 새하얀 백합은
무더운 여름날 떨고 있다
인정머리 손톱만큼도
없는 빗줄기에
허리가 휘어지고
머리가 깨질 듯
고통스럽다
이를 악물고 참아 보지만
이젠 포기한 채 꿈꾼다.
긴 장맛비
체념을 했다.
----------------------------
+ 여름 한때 / 조성국
가문 마당에
소낙비 온 뒤
붉은 지렁히 한 마리
안간힘 써 기어가는
일필휘지의 길
문득
길 끝난 자리
제 낮은 일생을
햇볕에 고슬고슬하게 말려
저보다 작은 목숨의 개미 떼
밥이 되고 있다
-----------------------------
+ 여름 한철 / 도종환
동백나무 묵은 잎 위에
새 잎이 돋는 동안
아침 창가에서 시를 읽었다
난초잎이 가리키는 서쪽 산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며
바로 세우지 못한 나랏일에 마음 흐렸다
백작약 뿌리를 달여 먹으며
견디는 여름 한철
작달비 내리다 그친 뒤에도
오랜 해직 생활에 찾아온 병은
떠날 줄을 몰랐다
여름밤 깊고 깊어 근심도 깊은데
먼 마을의 등불도 흔들리다 이울고
띠구름 속에 떴다 지는 까마득한 별 하나
================
+ 여름휴가 / 손병흥
분주한 일상 잠시 물린 채
자연히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숨은 명소 찾아 펄럭이는 시간
못내 기다려왔던 정겨운 여행길
눈에 보이는 풍경처럼 삶 배우려
아직도 살가운 정 남아있는 곳 찾아
어릴 적 고향 전경 빼닮은 두메산골
숲 그늘 드리운 골 깊은 계곡을 지나
그냥 훌쩍 길 떠나보는 여름휴가
검푸른 파도 한없이 넘실대는 바닷가
설레는 마음 가득한 추억거리 담아다
고적함 색다르고 여류롭게 체험해 보는
휴식 재충전 한가로움 이내 넘쳐나도록
모처럼 만에 즐겨보는 낭만적인 나날들
---------------------------------
+ 그늘 만들기 / 홍수희
8월의 땡볕
아래에 서면
내가 가진 그늘이
너무 작았네
손바닥 하나로
하늘 가리고
애써 이글대는
태양을 보면
홀로 선 내 그림자
너무 작았네
벗이여,
이리 오세요
홀로 선 채
이 세상 슬픔이
지워지나요
나뭇잎과 나뭇잎이
손잡고 한여름
감미로운 그늘을
만들어 가듯
우리도 손깍지를
끼워봅시다
네 근심이
나의 근심이 되고
네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벗이여,
우리도 서로의
그늘 아래 쉬어 갑시다
-----------------------
+ 숲 속 여름밤 / 김길자
한나절 외출했나
눈 비비며 찾아도 없더니
해 질 무렵에야
어슬렁어슬렁
모습 들어내고
그 적막
고요함이 흐르는 데
숲 속에 들려오는
오케스트라의 선율 따라
풀꽃처럼
한숨 섞어 토해 내는
풀벌레 울음소리
무도회가 열렸다
솔바람 손 내밀고
산들바람 그 손잡아
흥겹게 춤춘다
풀벌레들의
생음악에 맞추어
------------------------------
+ 여름, 개망초 / 박종영
너, 살아오면서
푸대접으로 서러워한 적
한두 번이던가
무디고 습습한 바람 스쳐갈 때마다
키 큰 몸뚱이 흔들리며
서러움 툭툭 부서지던 개망초,
그래도 노란 꽃 소리 없이 피워내고
간결한 향기 시샘하는 여름 한나절,
어느 무서운 낫질에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너, 계란 꽃이여,
내 살아온 날의 서러움으로
오늘,
네 허리 붙들고 부끄럽구나
===================
+ 여름 만나기 / 최병준
태양
희망과 높은 이상을
불러일으키며
웃음과 만남을
심어 주는 살아 있는 눈동자
모래
소망과 삶을
불러일으키며
인내와 의지를
키워 주는 살아 있는 씨앗들
바다
넓은 아량과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며
꿈과 행복을
심어 주는 살아 있는 마음의 안식처
파도
너는 하얀 춤과 시원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힘과 용기를
심어 주는 살아 있는 미소.
-------------------------------
+ 쓸쓸한 여름 / 나태주
챙이 넓은 여름 모자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빛깔이 새하얀 걸로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올해도 오동꽃은 피었다 지고
개구리울음소리 땅속으로 다 자즈러들고
그대 만나지도 못한 채
또다시 여름은 와서
나만 혼자 집을 지키고 있소
집을 지키며 앓고 있소
-----------------------------
+ 하늘의 여름 / 차영섭
여름엔 하늘도 힘드실 거예요
사람들은 덥다고 덥다고 피서를 가는데
하늘은 꼭 해야만 될 일이 있거든요
산에 산에 나무들도 키워야겠고
밭에 밭에 열매들도 익혀야 하니까요.
햇살 속에 물감이랑 설탕이랑 몰래 숨겨서
과일에게 곱게곱게 색칠도 해주고
듬뿍듬뿍 설탕을 뿌려 줘야 하니까요.
-------------------------------------
+ 고향의 여름밤 / 강대실
모낸 논다랑치
불 꺼진 외딴집,
쑥불타는 마당 한편에
누런 황소 한 마리 누워
어둠 씹어 먹고
편히 쉬는 밤
접동새만
검고 깊은 뒷산에서
밤을 지새기 외로워
처량한 울음으로 고향 여름밤을 지키고 있다
====================
+ 여름밤의 광란 / 김종석
태풍과 비바람 몰아치면
고목은 젊은 날 생각할 틈 없이
옆으로 누워 푸른 바다
보고 싶어 한다
분노처럼 검은 구름
통째 찢겨지고
텅 빈 모래사장에 나는
마음 낮추고 싶어 한다
잔잔한 파도 기다리며
취한 몸부림, 비바람 되어
태풍 되어 광풍처럼 달려 가 보고 싶은
모래사장의 꿈
태양은 어느 곳을 비추고 있는지
아쉬운 소리
얼마쯤 기다리면
파도 잔잔해 질 수 있을까
봄과 가을 사이 꽉 죄여 있어
여름날 밤 그 꿈은
나의 마음이었네.
------------------------------
+ 초여름, 네 벗은 / 나태주
초여름, 네 벗은 가는 팔을 보고 싶어라
초여름, 네 벗은 종아리를 보고 싶어라
긴 겨울 옷 속에 감추었던 팔과 종아리
신록 푸른 바람 속에서 보고 싶어라
---------------------------------
+ 초여름의 풍경 / 김재혁
날이 덥다
보이지 않는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새들의 울음소리에 나뭇잎들이 시든다
더운 날 나무에게는 잦은 새소리가
불안처럼 느껴진다
익어가는 토마토마다 빨갛게 독기가 차 오르고
철길을 기어가는 전철의 터진 내장에서
질질질 질긴 기름이 떨어진다
약속에 늦은 한낮이
헐레벌떡 달려온 아파트 화단엔
기다리는 풀벌레도 없다
아이의 손에 들린 풍선이 터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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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밤의 꿈 / 이현승
나뭇잎에 베인 바람의 비명
몸이 벌어지면서 나오는 신음들
수도꼭지의 누수처럼 집요하게 잠을 파고드는
불편한 소리들
아, 들끓는 소리와 소리 사이
폭발과 폭발 사이 화산의 잠
어둠 속에서 숨죽여 우는 사람이 있다
누가 밤하늘에 유리 조각을 계속 뿌려대고 있다
======================
+ 한여름 밤의 꿈 / 정아지
잠든 산자락 덮고
여름밤은 꿈을 꾼다
숨죽여 흐르는 계곡 물소리
정적, 고요, 평화를 만끽하기에는
한여름 밤은 짧기만 하다
먹빛 어둠, 가지마다 별등 켜고
보금자리 튼 산새
꿈꾸며 요동치는 몸 위로
별똥이 우수수 쏟아진다
잊어야하는 순간에도 잔영으로 남아
못 잊게 만든
현실을 가로채 버린 판타지
그 딜레마에 빠져
한여름 밤, 꿈이 허덕거린다
---------------------------------
+ 한여름 새벽에 / 박재삼
이십오 평 게딱지 집 안에서
삼십몇 도의 한더위를
이것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내 새끼야, 내 새끼야
지금은 새벽 여섯 시
곤하게 떨어져
그 수다와 웃음을 어디 감추고
너희는 내게 자유로운
몇 그루 나무다
몇 덩이 바위다.
-----------------------------------------
+ 그해 여름-아버지 / 김용수
대지가 뒤끓는 대낮
대청마루 뒤안길은
여름 바람이 몰래 지나가는 길
뒷문 열어제치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솔솔 히 바람
반질반질한 대청마루 바닥에
목침을 베고 누워
딴청을 부리시던 아버지
매미소리 감상하며
소르르 여름을 즐기시던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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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미가 없던 여름 / 김광규
감나무에서 노래하던 매미 한 마리
날아가다 갑자기 공중에서 멈추었다.
아하 거미줄이 쳐 있었구나.
추녀 끝에 숨어 있던 거미가
몸부림치는 매미를 단숨에 묶어버렸다.
양심이나 이념 같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후회나 변명도 쓸데없었다.
일곱 해 동안 다듬어온
매미의 아름다운 목청은
겨우 이레 만에
거미밥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걸리면 그만이다.
매미들은 노래를 멈추고
날지도 않았다.
유달리 무덥고 긴 여름이었다.
======================
+ 비 개인 여름 아침 / 김광섭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
+ 비의 냄새 끝에는 / 이재무
여름비에는 냄새가 난다
들쩍지근한 참외 냄새 몰고 오는 비
멸치와 감자 우려낸 국물의
수제비 냄새 몰고 오는 비
옥수수기름 반지르르한
빈대떡 냄새 몰고 오는 비
감 펄펄 나는 순댓국밥 내음 몰고 오는 비
아카시아 밤꽃 내 흩뿌리는 비
청국장 냄새가 골목으로 번지고
갯비린내 물씬 풍기면 젖통 흔들며 그녀는 와서
그리움에 흠뻑 젖은 살 살짝 물었다 뱉는다
온종일 빈집 문간에 앉아 중얼중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혼잣소리 내뱉다
신자라고 너머 홀연 사라지는 하지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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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숲 속에서는
바람이 잠들고
마을에서는
지붕이 잠들고
들에는 잔잔한 달빛
들에는
봄의 발자국처럼
잔잔한
풀잎들
마을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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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여름을 사랑합니다 / 이채
겨울은 덥지 않아서 좋고
여름은 춥지 않아서 좋다는
넉넉한 당신의 마음은
뿌리 깊은 느티나무를 닮았습니다
더위를 이기는 열매처럼
추위를 이기는 꽃씨처럼
꿋꿋한 당신의 모습은
곧고 정직한 소나무를 닮았습니다
그런 당신의 그늘이 편해서
나는 지친 날개 퍼고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은
가슴이 작은 한 마리 여름새랍니다
종일 당신의 나뭇가지에 앉아
기쁨의 목소리로
행복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당신의 어느 하늘의 천사인가요
나뭇잎 사이로 파아란 열매가
여름 햇살에 익어가고 있을 때
이 계절의 무더위도 신의 축복이라며
감사히 견디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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