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歲月) 시(詩) 모음 20篇
#세 월 / 이해인 수녀님
물이 흐르는 동안
시간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물이 흐르고
하늘엔 흰 구름
땅에는 꽃과 나무
날마다 새롭게
피었다 지는 동안
나도 날마다 새롭게
피었다 지네
모든 것 다 내어주고도
마음 한켠이
얼마쯤은 늘 비어 있는
쓸쓸한 사랑이여
사라지면서 차오르는
나의 시간이여
#세월 / 정연복
한 올 한 올 느는
새치 속에
내 목숨의
끄트머리도 저만치 보이는가
더러 하루는 지루해도
한 달은, 일 년은
눈 깜짝할 새 흘러
바람같이 멈출 수 없는
세월에게
내 청춘 돌려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으리
그래도 지나온 생 뒤돌아보면
후회의 그림자는 길어
이제 남은 날들은
알뜰살뜰 보내야 한다고
훌쩍 반 백년 넘어 살고서도
폭 익으려면 아직도 먼
이 얕은 생 깨우칠 수 있도록
세월아,
너의 매서운 채찍으로
섬광처럼 죽비처럼
나의 생 내리쳐다오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 / 법정스님
물소리 바람소리에 귀기울여 보라.
그것은 우주의 맥박이고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이고
우리가 살만큼 살다가
갈 곳이 어디인가를
소리 없는 소리로 깨우쳐줄 것이다.
이끼 낀 기와지붕 위로 열린
푸른 하늘도 한번쯤 쳐다봐라.
산마루에 걸린 구름,
숲 속에 서린 안개에 눈을 줘보라.
그리고 시냇가에 가서 맑게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가보라.
차고 부드러운 그 흐름을 통해
더덕더덕 끼여 있는
먼지와 번뇌와 망상도 함께
말끔히 씻겨질 것이다.
#세월 / 함민복
문에 창호지를 발라보았지요
창호지를 겹쳐 바르며
코스모스 꽃무늬도 넣었지요
서툰 솜씨에
울어, 주름질 것 같던 창호지
햇살에 말리면
팽팽하게 펴졌지요
손바닥으로 두들겨보면
탱 탱 탱 덩 덩 덩
맑은 북소리 났지요
죽고 싶도록 속상하던 마음도
세월이 지나면
마음결 평평하게 펴져
미소 한 자락으로
떠오르기도 하지요
#세월 / 류시화
강물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홀로 앉아 있을 때
강물이 소리 내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그대를 만나 내 몸을 바치면서
나는 강물보다 더 크게 울었네
강물은 저를 바다에 잃어 버리는 슬픔에 울고
나는 그대를 잃어 버리는 슬픔에 울었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먼저 가 보았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그 서러운
울음을 나는 보았네
배들도 눈물 어린 등불을 켜고
차마 갈대숲을 빠르게 떠나지 못했네
#세월 / 도종환
여름 오면 겨울 잊고
가을 오면 여름 잊듯
그렇게 살라 한다
정녕 이토록 잊을 수 없는데
씨앗 들면 꽃 지던 일 생각지 아니하듯
살면서 조금씩 잊는 것이라 한다
여름 오면
기다리던 꽃 꼭 다시 핀다는 믿음을
구름은 자꾸 손 내저으며
그만두라 한다
산다는 것은
조금씩 잊는 것이라 한다
하루 한낮 개울가 돌처럼
부대끼다 돌아오는 길
흔들리는 망초꽃 내 앞을 막아서며
잊었다 흔들리다 그렇게 살라 한다
흔들리다 잊었다 그렇게 살라 한다
# 세월 / 박철
아스팔트에서 조금만 굽어 들어가도
먼저 반기는 것은 폐가 한 채다
납삭한 스레트 지붕 비스듬한 지게 작대기
올망졸망 장독대가 자유롭다
잡풀은 지천으로 뻗어 있고
문고리엔 한 시대의 소란이 있다
예 살던 주인은 더 나은 집에서 옛집 생각에
코끝이 시릴 것이다
온전히 자기 몫을 다한 뒤의 기진한
집 한 채가 아름답게 산자락을 수놓는
볕 좋은 가을이다
#세월 / 곽재구
사랑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세월은 가슴팍에 거친 언덕
하나를 새겨놓았다
사람들이 울면서 언덕을 올라올 때
등짐 위에 꽃 한 송이 꽂아놓았다
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눈물을 모아 염전을 만들었다
소금들은 햇볕은 만나 반짝거렸다
소금은 소금 곁에서 제일 많이 빛났다
언덕을 다 오른 이가 울음을 그치고
손바닥 위 소금에 입맞추는 동안
세월은 언덕 뒤 초원에
무지개 하나를 걸어놓았다
# 세월 / 고재종
그러니까, 오뉴월 진초록 속을 뚫고
선홍 선홍 선홍빛 석류꽃 피는 일이
저토록 산뜻하고 해맑아서
새들도 꽃가지에서 꽃잎 따물고
저리 우수수 날아오른다면.
그러니까, 그 꽃그늘 새울음 아래
우리 가슴속 꽃 밝히고 새 날리며
우리 서로 얼굴 맞볼 때
네 맑은 눈동자 속에 내 얼굴 잦아들고
내 짙은 눈동자 속에 네 얼굴 젖어든다면.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윽고는
저기 청산이며 나무들이며 풀꽃들이며
대책없이 흔들어대는 쑥꾹새 울음에
뚜욱 뚜욱 뚜욱 석류꽃마저 지는 일이
단 하루라도 단 한시라도 늦춰만 진다면.
#강 같은 세월 / 김용택
꽃이 핍니다
꽃이 집니다
꽃 피고 지는 곳
강물입니다
강 같은 내 세월이었지요.
#무심헌 세월 / 김용택
세월이 참 징해야
은제 여름이 간지 가을이 온지 모르게 가고 와불제잉
금세 또 손발 땡땡 얼어불 시한이 와불것제
아이고 날이 가는 것이 무섭다 무서워
어머니가 단풍 든 고운 앞산 보고 허신 말씀이다
#세월의 학교에서 / 최승자
거리가 멀어지면 먼 바다여서
연락선 오고 가도
바다는 바다
섬은 섬
그 섬에서 문득 문득
하늘 보고 삽니다
세월의 학교에서
세월을 낚으며 삽니다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입니다
# 세월 / 오보영
나만
흐르는 게 아니라오
나만
덧없는 게 아니라오
그대도
동반하는 거라오
그대도
변해가는 거라오
숲도 나무도
달라지듯이
산새도 바람결도
오고 가듯이
모두가 다 같이
흘러가는 거라오
#세월의 갈피 / 권대웅
오래된 장롱을 열었을 때처럼
살다보면 세월에서 문득
나프탈렌 냄새가 날 때가 있다
어딘가에 마무리하지 못하고 온 사랑이
두고 온 마음이
쿡, 코를 찌를 때가 있다
썩어 없어지지 못한 삶이
또 다른 시간으로 자라는 저 세월의 갈피
들판에는 내가 켜놓은 등불이 아직 깜박이고
정거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눈물들
아 사랑들
지붕을 넘어 하늘의 계단을 지나 언덕들
숨어 있던 계곡들이
일제히 접혔다 펴지며
붕붕 연주하는 저 세월의 아코디언 소리들
인생의 노래가 쓸쓸한 것은
과거가 흘러간 것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살면서 나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골목을 돌아설 때 불쑥 튀어나오는
낯익은 바람처럼
햇빛 아래를 걷다가 울컥 쏟아지는
고독의 멘스처럼.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세월은 / 조병화
세월은 떠나가면서
기쁨보다는 슬픔을 더 많이 남기고 갑니다
봄 여름이 지나가면서 가을을 남기고 가듯이
가을이 지나가면서 겨울을 남기고 가듯이
만남이 지나가면서 이별을 남기고 가듯이
사랑이 지나가면서 그리움을 남기고 가듯이
아, 세월 지나가면서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남기고 갑니다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 신현림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나폴레옹의 이 말은 10년 동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이었다
게으름을 피울 때마다
내 많은 실패를 돌아볼 때마다
송곳은 가차없이 찌르고 찔러왔다
모든 불행엔 충고의 송곳이 있다
자만치 말라는, 마음 낮춰 살라는 송곳
불행의 우물을 잘 들여다보라는 송곳
바닥까지 떨어져서
다시 솟아오르는 햇살의 송곳
송곳은 이제 지팡이처럼 내게 다가와
신들린 듯 거친 바다처럼 밀어간다
# 시간 / 윤수천 아동문학가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 죄가 아니다
시간을 허비한 것도 죄가 된다
빠삐용이 죽음 직전까지 가서
깨달았던 것도
시간을 허비한 것에 대한 낭비죄였다
내일은 언제나 올 것 같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최선이란 말이다
#시간의 탑 / 유미희 아동문학가
할머니,
세월이 흘러
어디로
훌쩍 가 버렸는지 모른다 하셨지요?
차곡차곡
쌓여서
이모도 되고
고모도 되고
작은엄마도 되고,
차곡차곡
쌓여서
엄마도 되고
며느리도 되고
외할머니도 되었잖아요.
우리 곁에
주춧돌처럼 앉아 계신
할머니가 그 시간의 탑이지요.
#세월이 가는 줄만 알았는데 / 김수용
세월이 가는 줄만
알았는데
추억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스라이 사라져 간
싸한 기억 속에
가시로 남아 있는
그 사람
여름이 떠나고
또다시
가을의 문턱에 서니
흰머리 휘날리는
주름진 눈가에
시린 눈물
살포시 머물다 사라진 후
떨어지는 꽃잎에 투영되는
그리운 사람
'詩心에젖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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