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에 관한 시모음
여름밤이여, 옥상을 봐라 /이윤학
양옥 옥상에 다리 포개고 앉은 어머니
아래사랑채 지붕 위로 오른
측백나무 벼슬을 바라보신다.
때 낀 손톱으로 옥수수 알을 떼어내
입안에 털어 넣는 어머니의 눈시울
붉은 페인트칠 달빛이 들어앉는다.
새벽에 일어나 돌아다니다 보면
아침 먹을 때가 되고
들일 나갔다 들어와 점심 챙겨 먹고
낮잠 한숨 자고
담뱃잎 따다 엮어 하우스에 널면
금방 저녁 먹을 때가 되지.
마루에 전깃불 밝히면
언제 들어왔는지
제비 한 쌍이 똥 받침대 대못에 앉아
저녁 먹는 걸 구경하지 뭐냐.
저 낭구*들은 다 지켜봤을 겨.
별것 있남. 금방 지나가는 겨.
저녁 먹으면 텔레비 틀어놓고
다리 뻗고 잠들어야 하는 겨.
어제가 모두 전생 같은 것이여.
*낭구 : 나무의 충청남도 사투리
한여름 밤의 영웅전 /강대선
공전하는 하루입니다
강력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꿈꿔봅니다
신문, 광고, 단톡방, 웹 사이트를
스크롤을 내리며 읽어갑니다
고생해서 성공한 이야기는 식상하기까지 합니다
베끼고 급조하고 재탕 삼탕으로 가는
그렇고 그런 영웅들의 이야기 속에서
반짝, 새로운 영웅들이 출현하기도 합니다
스킨십도 수용도 메타버스 속
운과 실력 사이에서 탄생한 영웅들이 복제 유통됩니다
대권 도전은 또 한 번 변이를 일으키고
강력한 변이 바이러스가 지지율을 먹어 치웁니다
흥행몰이는 점입가경입니다
이제는 누가 진정한 영웅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사고인지 사건인지 좌인지 우인지
거짓말 같은 우화 속입니다
깜짝 영웅들이
깜깜이로 공전을 거듭하고 있는 밥입니다
한여름 밤 /이영광
조치원 내창천 곁 침침한 돼지 목살 집엘 들어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선풍기에 손을 얹은 채
주인에게 말대답을 하고는 내려다보니, 그
낡은 선풍기, 헤드엔 덮개도 없이 강풍으로
맹렬히 돌고 있더라고. 주인이 한마디 더 하고
내 손이 몇 센티만 아래로 미끄러졌다면 피범벅
됐을 거야. 놀랐어, 놀라긴 했는데 고기를 구우며
늦는 학생들을 기다리면서도, 어떻게 사람들
드나드는 길목에 저걸 덮개도 안 씌우고
틀어놨는지 이해가 안 되고, 저러다 누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주인은 대체 무슨 경을 칠 건가
싶어서, 일어나 그 선풍기 꺼버리고 자리로 왔다.
고기가 알맞게 익자 도착한 학생들에게 선풍기
얘기를 하며, 어떻게 사람들이 저렇게 무감각,
무신경할 수 있느냐고, 목살이 목에 걸린 듯 연신 얼굴을
찡그렸다. 두 학생도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러다
건너다보니, 그 선풍기 또 웽웽 잘만 돌아가고 있고,
밤은 후덥지근하기만 해서 서둘러, 이차 가자며 먼저
일어섰다. 저 집엔 다신 안 간다, 술기운 누르며
비틀대고 있자니, 조만간 어디 농가 주택 구해 텃밭
일구며 살자던 다짐이며, 몸 부려 땀 흘리고 사는
꿈인지 현실인지가 생각났다. 손가락 없는 손으로
어쩔 뻔했나? 아니, 왜 나는 내 잘린 손가락들은 잊어먹고
선풍기 걱정만 늘어놓았나? 살 만큼 산 건지 철딱서니
없는 건지, 알 듯도 모를 듯도 하던 한여름 밤이었다.
한여름 밤의 록(Rock) /강보철
지친 마음 감싸 안은
찌는 듯한 여름밤
잊어요, 지난 기억들
서로의 손가락을 하늘로
우리, 토해내요 쌓였던 울분
우리, 찔러봐요. 내일로
막힌 마음 다독이는
후텁지근한 여름밤
견뎌요 지난 일들
서로의 목청을 세상으로
우리, 뱉어내요 터질 것 같은 욕망
우리, 함께해요. 내일로
힘든 마음 감추는
흠뻑 젖은 여름밤
이겨내요 지난 상처들
서로 어깨를 나란히
우리, 털어내요 답답한 현실을
우리, 나가요. 내일로
다시 찾은 여름, 이 밤
소리 질러봐, 다 같이 소리 질러봐
우린 할 수 있다고
높게 뛰어봐, 다 같이 뛰어봐
우린 할 수 있어요
여름밤 /박영선
담장 밖으로 뻗어 나간 능소화 줄기 밑으로
누군가 자물쇠를 숨기듯 걸어놓았다
잠금장치에 녹이 올라 붙지 않은 건
잠근 이의 마음이 아직 새것이란 뜻인지
내 집 담장에 걸어 놓은 건
내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열어 보겠다는 속셈이었을지
열쇠란 숨기고 싶은 붉은 기억 꾸러미
담 밖이 궁금한 능소화 한 줄기는
열쇠의 사용 설명서를 꽃잎 뒷장에 숨기는 능청을 부리고
개구리는 찌꺽찌꺽 열쇠 푸는 소리를 낸다
꽃대 아래에 서성이던 잠이
만월처럼 잠긴 수심을 흔들어본다
한여름 밤의 상념(想念) /정든산천 노영환
하루의 해가 저물면
우리는 밤이 주는 안식에서 피로를 풀고
충전하며 내일을 기약한다
세상은 조화롭지 않은가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남과 여
낮과 밤 음양의 조화가 흥미롭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순응하면
우리의 삶은 평탄하며 평온하다
동물은 식욕만 충족하면 만족하는데
인간은 명예와 부 권력과 지위
문화의 향유 취미생활 등에서도
성취와 최대의 만족감을 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욕망은 또 더 높은 욕망을 원하고
부와 명예와 권력 등은 제어력을 상실하면
혼돈의 늪에 빠져들어 생명력을 때론 잃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주변이 정리된 단조로운 생활과
욕망의 늪을 뛰어넘은 마음을 비운 가난한 자가
자신을 편안하게 하고 그러한 생활이 자유와 편안함을
나아가서는 행복감에 젖어 들게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지향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한없는 물질적 욕망을 추구할 것인지
마음의 자유와 행복감을 원하는지
행복 불행도 자신의 마음과 결단 습관 행위에서
좌우되기도 합니다
단 한 번 오르는 삶의 무대는 재연도 없으며
지울 수도 없기에 보통 사람에게는
혜안 있는 인생 멘토와 동행할 수 있다면
초연하는 인생극장이 더욱 더 성공적인
무대가될 것입니다
여름밤 /박용하
열대야에 가만히 물어본다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너는 무엇을 사랑하느냐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이 한여름을 나고 있는
지난해마냥 부채에 의지해 이 여름을 나려는 납량 엽기 가족이여
그 가족 중에
바람 한 점 없는 열기 속에 시를 추구하는 자가 있다
불굴의 시를 원하는 자가 있다
팔꿈치에 괴는 땀을 훔치며
날벌레들의 난무를 조용히 지켜보며
바람 한 점 없는 열기를 지키는 일이 사치라는 것을
고압의 비애라는 것을
고장 난 사람의 짓이라는 것을
사랑의 절정에서 사랑한다고 말할 때처럼 덧없는 짓이라는 것을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허망한 짓이라는 것을
시로 말해지지 않는 짓이라는 것을
그러면서 이 세상에 따스하거나 더운 정신이란 말이 없듯이
땀에 전 러닝셔츠에게 말하듯이 또 물어본다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시가 필요할까
시로서 염원할 그 무엇이 있을까
등줄기에 줄줄 땀이 채고
몸 닿는 곳마다 짜증스런 밤에 시를 쓰겠다고 덤비는 사람이
그 어느 시절 승부욕에 휩싸여 적개심과 위악을 감행하고
울분깨나 쏟아붓던 악동이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
2등은 이미 진 거라며 혈서를 쓰기도 했던 사람은
어쩌다 시詩 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지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 자주 지는 사람이 되어 있고
자신조차 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다
열대야에 조용히 물어본다
너는 무엇을 소원하느냐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북쪽으로 2백 킬로미터도 갈 수 없는 나라에서
남북으로 찢기고
동서로 갈리고
신분과 계급으로 똘똘 뭉친 나라에서 너는 무엇을 바라느냐
여름밤 /문태준
풀벌레가 운다
오늘 이 밤에는
풀벌레 소리가
전경(全景)
내 만면(滿面)에도
풀벌레 소리
한 소리의
언덕
골짜기
한 소리의
여름밤
돗자리로 펴놓고
모기장으로 쳐놓고
거기에
빈 쭉정이 같은
내가
내 그림자가
일렁일렁한다
여름밤의 푸가 /함기석
콘크리트 담 아래 맨드라미가 피어 있다
핏덩이 낙태아다
고양이가 굶주린 새끼들을 데리고
어두운 지붕 난간을 아슬아슬 내려온다
금속 가위와 폐가 떠가는 공중
하늘에서 음표들이 내려오고
아기의 발목 하나가 시퍼런 땀을 흘리며 초조히
골목을 걸어 다니는 밤
콘크리트 담 아래 맨드라미가 되어 있다
어린 꽃살이 흘리는 비린 꿈 비린 울음
옥상에서 창백한 달이 몰래 이마를 내밀고 본다
어느 여고생의 얼굴일까
그때 여름 밤 /박인걸
그해 밤꽃 피던 여름 밤
별들이 무리지어 흐르던 밤
달 빛이 고고히 빛나던 밤
시원한 바람이 옷깃 스치던 밤
아무도 없는 밤길을 혼자 걸으며
멈춰있는 시간을 혼자즐겼네.
속삭이는 별무리와 하나 된 나는
꿈과 희망을 쏘아 올리며
가슴에 간직한 나만의 비밀을
하늘향해 큰 소리로 털어 놓았네.
풀벌레도 이미 잠든 숲에는
나뭇가지 사이로 달빛만 흐르고
아무도 몰래 피는 들꽃무리가
길 걷는 나에게 향기를 뿌렸네.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나만의 감동
그해 여름밤은 마법 같은 시간
나만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엮어
일기장 구석에 걸어두었네.
이 밤도 그곳에는 그때 그 순간이
고운 이야기들로 펼쳐지겠지,
여름밤 /강소천(1915~1963)
하늘의 별들이
죄다 잠을 깬 밤.
별인 양 땅 위에선 반딧불들이
술래잡기를 했다.
멍석 핀 마당에 앉아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빗자루를 둘러메고
반딧불을 쫓아가면,
반딧불은 언제나 훨훨 날아
외양간 지붕을 넘어가곤 하였다.
반딧불이 사라진
외양간 지붕엔
하얀 박꽃이 피어 있었다.
여름밤 풍경 /이기영
소낙비 그치고
뒤란 장독대
떨어진감나무 파란 열매들
나팔꽃 오므리는 저녁
매미가 늦은 소리내다 그치고
폭 좁은 평화가 주위를 감싸자
장대 매단전등에 의지해
감꼭지 명주실 꿰던 까만 손끝
나직한 헛간 초가지붕
박들이 달빛 안고 잠들때
잠든 동생 팔목에 둘러주고
같이 잠들었던 여자아이
여름밤
농도 연하게 그려진 수채화 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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