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도가니 <1> /강연옥 심장이 뜨겁게 끓어도 내 의식엔 언제나 눈이 내려 가장자리부터 식는 난 얼음의 도가니다 일탈을 꿈꾸는 영상들이 뜨겁게 달아올라 끓을 때면 괄호 속에 갇힌 먼저 풀어야 할 숫자처럼 수많은 부호 속에서 해답을 찾는 내 글쓰기는 펜 끝이 닿는 의식의 가장자리부터 식는다 한없이 의식을 얼리는 얼음의 도가니와 한없이 끓고 있는 심장의 치열한 이중성은 서로 닿는 순간마다 풀지 못하고 늘 덧없이 증발해버리는 오답이다 금속성으로만 깰 수 있는 빙산처럼 두꺼워진 내 얼음의 도가니에 가끔 “쩡-”하고 금가는 쇳소리 울린다 시리고 아프다 그리하여 가슴은 끓어야하는 난 얼음의 도가니다 이대로 얼마나 더 아파야 하나 * 시 제목은 최수철의 「얼음의 도가니」에서 따옴 얼음을 밟다 /김종제 삶이 강과 같아서 병석에 드러누운 저 노친네도 가장자리부터 얼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슨 미련 같은 것 아닐까 그냥 떠내려가지 못하고 돌이나 흙 같은 살붙이를 부여잡고 마지막 안간힘 쓰는 목숨 같은 것이겠다 갑자기 뚝 떨어진 영하의 한밤 중심에서 물 흐르는 소리 같은 고동마저 들리지 않으면 한 생이 마침내 저무는 것인데 아직 살얼음일지도 몰라서 안쪽으로 한 발씩 더듬어가는 것이다 당신이 이루어놓은 가계 같은 강을 건너가야 하므로 얼어붙은 당신을 밟고 가는 것이다 저 아래가 꽁꽁 얼어서 다리부터 밟고 가는 것이다 깊게 얼은 등짝 밟고 가다가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는 강의 한가운데를 밟고 건너가야 네 이름으로 집 하나 세우는 것이다 얼음을 밟는다는 것 얼음의 강을 건넌다는 것 얼어붙은 당신을 건너간다는 것 생에서 생으로의 맞바꿈 같은 것이다 얼음 건너에 분명 꽃 피는 피안 같은 것 있겠다 얼음불꽃 /조연호 부지깽이 끝에 매캐한 연기가 걸려 올라온다. 겨우 입 벌린 메꽃 한 송이가 되어 엄마 곁엔 순산한 셋째 계집애가 누워 있었다. 손가락 다섯, 발가락 다섯, 생식기를 꼼꼼히 살피고 나서 엄마가 편히 눈을 붙였고, 누룩곰팡이가 아랫목을 따라 끊임없이 기어다녔다. 달그락거리는 배고픔들이 따뜻한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밤새 꿈 앞을 서성대고 있었다. 강이 빈한한 날을 지난다. 부지깽이를 쥔 엄마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불꽃나무가 자란다. 뿌리며 가지며 아궁이 속을 확확 드나들고도 나무는 아직 차갑다. 누이가 몰래 자작시를 보여준다. 그 시구에 내가 유치한 눈물 훔치다가, 세 번째도 딸, 아빠가 뒤집어 엎은 상을 훔치다가, 이 저녁은 느닷없는 평화 속에 끝난다. 강이 투명하고 가벼운 수의를 입고 강 건너 찬안댁 할머니를 부르러 간다. 미역줄거리가 끓고, 부지깽이를 저으면 화르륵, 엄마들이 일어서다간 도로 누웠다. 얼음을 녹여 차를 끓이다 /하영순 뜨겁던 대지가 식어 찬 기운이 전신을 휘감는 날이면 그리움이 파노라마처럼 흰 구름으로 날아간다 냉혹한 현실 속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마음에서 울어나는 훈훈한 정 그대 따뜻한 눈길이 정신을 살찌우고 부드러운 말 한마디 봄날에 눈 녹듯 쌓인 설음을 녹인다 얼음 같은 눈길을 내게 준다해도 입었던 윗저고리를 벗어 감싸 안으리 모나고 비틀어진 바위를 깎아 공이 될 때까지 나 서러워도 입다물고 입안 가득 채워놓은 침으로 가슴에 응어리를 녹이며 창문을 연다 수행이란 얼음을 녹여 차를 끓이는 것이 라면 한 잔의 찻잔 속에 내 얼을 우려 보리라 얼음기둥 /하재봉 내 추운 정신이 옷을 벗고 산등성이를 올라 마주보는 곳, 그 곳에서부터 눈이 내린다 매서운 채찍이 나를 후려치고 그러나 혀를 깨물며 견디는 정신의 극점 앞으로 석달 동안은 눈이 내리리라 약한자는 땅속으로 숨고 또 몇몇은 어깨동무하고 단단하게 힘을 함쳐 북풍과 맞서 일어서리라 지상은 숨소리도 그친 채 다시 태양이 뜰 때까지 엎드려 있을 것이다 누가 새벽의 들판 위로 걸어가는가 누가 저녁의 강물 위로 돌아오는가 높은 곳에서 보면 산과 들이 껴안고 있는 가랭이 사이로 흐르지 못하는 강이 누워 있다 큰물고기들은 하류로 도망치고 물이 결빙하는 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한 피라미들은 차가운 얼음 사이 숨을 거둔다 얼어붙은 강물 위로 돌을 던지면 돌은 물속으로 가라앉지 못하고 딱딱한 얼음의 표면위를 스쳐 변방으로 미끄러져 간다 다시 따뜻한 세계가 올때까지 한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강의 힘 석달을 그치지 않고 눈을 내려서 세계는 소복을 입고 무수히 많은 죽음과 결별한다 곧 강이 풀리리라 그리하여 눈뜬 죽음들을 데리고 지상의 낮은 곳까지 내려가서 거대한 무덤을 만들리라 이제 어떤 이름의 새와 꽃과 물고기가 이 지상을 다스리겠는가 한 그루 얼음기둥으로 산위에 서서 나는 기다린다 내 두 눈의 물이 해와 달로 바뀌어 갈 때까지. 얼음 호수 /손세실리아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동안 단 한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봉(封)해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얼음나라 戀人 /김병훈 얼음과 얼음이 만나 물이 된다 물과 물이 만나 수증기가 된다 수증기와 수증기가 만나 비가 된다 너와 나의 만남은 언제쯤 물이 되어 너와 나의 사랑은 언제쯤 수증기가 되고 너와 나의 이별은 언제쯤 비가 될까 우린 언제까지 얼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야하는 것일까 난 이미 너의 심장을 녹여줄 준비가 끝났는데... 얼음 호수 /김명인 가장자리부터 녹이고 있는 얼어붙은 호수의 중심에 그가 서 있다 어떤 사랑은 제 안의 번개로 저의 길 금이 가도록 쩍쩍 밟는 것 마침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빙판 위로 내디딘 발걸음 돌이킬 수 없다 깨진 거울 조각조각 주워들고 이리저리 꿰맞추어보아도 거기 새겼던 모습 떠오르지 않아 더듬거리지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한때의 파문 어느새 중심을 녹여버렸나 나는 한순간도 저 얼음 호수에서 시선 비끼지 않았는데 얼음 호수 /최영철 한뎃잠을 자는 것들에게는 두꺼운 얼음이 때로 방한복이다 못 가득 바람 한 점 못 들어오게 두툼한 방한복을 껴입기까지 물고기는 물벌레를 먹고 물벌레는 물고기의 배설물을 받아먹었다 저토록 두꺼운 옷을 짜 입기까지 못 안의 것들은 수면을 간지럽히는 햇살을 마다하고 바닥에서 뽑아낸 서늘한 실로 쉴새없이 수면을 수놓고 있었다 한겨울 난전에 좌판 벌이는 노점상에게는 일찍부터 휘몰아친 칼바람이 추임새였다 줄줄이 딸린 식솔들의 배고픈 손이 후끈한 보약이었다 처음에는 손발이 차고 턱이 얼어붙어 무엇을 사라고 외치는 소리 몇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았으나 소한 넘기고 대한 가까워 오자 팔뚝을 걷어붙이고 다시 일어서는 몸에서 확확 더운 김이 터져나왔다 그 더운 입김 옆에서도 못을 덮은 얼음은 녹지 않고 겨울 내내 멈추지 않았던 물고기와 물벌레의 얼음 노동 옆에서도 장사치의 손과 발은 얼어붙지 않았다. 얼음의 틈 사이로 절망을 흘려보낸다 /박윤규 우리는 절망에 빠진 무기력보다는 희망에 가득찬 열정을 서로에게서 볼 수 있었다. …… 그러나 내게는 운명을 꿈꿀 만큼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 북극을 탐험한 에드가 포의 '병속에서 발견된 원고' 중에서 부빙浮氷이다 나는 간헐적으로 얼음의 신에게 물의 신과 바람의 신에게 저녁 식사를 하듯 간단한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저녁 식사와는 다른 것이 기도를 끝낸 뒤에도 나는 전혀 포만飽滿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렇게 동료들은 경건하면서도 자신의 안녕을 위해 기도를 올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확고한 운명조차 지워 버리려는 얼굴 위로 섬뜩한 의지의 핏줄이 굵게 나타났던 것이다 한 동료가 양팔을 넓게 벌린 채 무표정하게 먼 우주의 별과 교신이라도 하듯 흔들리는 뱃전에서 엎드렸다 일어서더니 수직의 하늘로 알지 못할 언어를 내뱉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나긴 삶의 마지막 속죄일 수도 있었다 생존의 희망이 전혀 사라진 곳에서 극한 추위와 피로, 어둠만이 지배하는 곳에서 푸른 나무에 앉아 휴식하는 아름다운 새의 울음소리를 기억해 낸 것일까 浮氷이 하늘 가장자리를 휘몰아 온다 이렇게 엄청난 물의 혼돈을 이제껏 나는 느낀 적이 없다 누구도 그랬을 것이다 부빙이 크게 부딪혀가며 사나운 짐승의 비명소리를 내는 것을 우리는 들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못다한 일들에 대한 아쉬움을 생각한다거나 흘러간 시간들에 대해 추억한다는 것 또는 앞으로의 (아마도 지독히 짧을 것이지만) 우리에게 배당된 시간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 나와 동료들은 살기 위한 수단을 적어도 부리지는 않는다 굶주림과 거친 파도에 극도로 지쳐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에 지극한 평온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물론 앞으로의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어느 물길에 휩싸이다가 어느 얼음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묻힐지 몰라도 살아온 날들은 참 황홀하였으며 따뜻한 한 잔의 우유가 그리워질 뿐이다 얼음덩이는 우리들 여정의 마침표를 찍어주리라 내 이름을 영원히 파헤쳐지지 않을 깊은 얼음 골짜기에 묻으며 우리가 함께 살았고 함께 죽음을 즐거이 기억하리라 얼음의 문장 14 /송찬호 그는 나뭇가지 속에 매장되었다 나뭇가지들이 그의 몸 안에서 길을 찾기 위해 서로 격투를 벌였다 그들의 오랜 무기였던 횃불을 밝혀 둔 채, 탁, 탁 불꽃은 격렬한 소리를 내며 탄다 불꽃이 그를 높이 치켜올린다 다른 해안, 다른 새벽으로 그를 밀어보내기 위하여 마침내 그들은 노 젓기를 멈춘다 새들이 얼어 떨어지는 높은 곳에서 그의 늙은 손, 그 노를 가슴에 얹어놓은 채 이제 오랫동안 뱃사람들은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의 혼을 외쳐 부르던, 그의 몸에 달라붙은 조개 구멍들이 그 치명적인 항구를 보여줄 것이다 얼음을 주세요 /박연준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어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빛 눈물을 흩 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 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 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랜지 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 무럭 늙느라 케이크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 들어갈지도 늙은 몸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얼음처럼 물처럼 /차영섭 날씨가 추우면 위기다 물의 입자들이 비상시에 대비하여 꽁꽁 단결한다 날씨가 풀리면 호기다 비상을 해제하여 화합하고 활동하며 생명을 돕는다 얼음처럼 물처럼 단결하고 화합하며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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